해주스님
바다와 같은 공덕 지닌 마음 계발에 노력
마음에 따라 고통․즐거움 받기도
그 마음은 변함없이 온전히 똑 같아
바다가 죽은 시체를 담아 두지 않듯
부처도 더러운 것을 품고 있지 않는다
부처님은 수행 방편을
바다’에 비유해서 ‘화엄경’ 등에 말씀하셨습니다.
해인심(海印心-바다에 도장을 찍은 것과 같다)’라는 말입니다.
이를 직역하면
‘바다가 잠잠하면 온갖 물상이 다 비친다’라는 뜻으로
바다의 모든 것을 다 담아 내면서
모든 것에 물들지 않는 청정한 마음을 표현한 것입니다.
그리고 부처님 같은 마음을 지어가는 모습을
불심행(佛心行) 혹은 원력행(願力行)이라고도 표현했습니다.
그래서 오늘 불심행과 원력행에 대해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우리 모두는 부처로 출현했습니다.
각자의 부처를 출현을 통해
우리도 부처님 같이 살아야 하겠습니다.
불교 상징의 꽃은 연꽃입니다.
화엄(華嚴)도 모든 꽃으로 불국세계를 장엄함을 의미합니다.
그 꽃이 연꽃입니다.
연꽃하면 진흙에서 피어 더러움에 물들지 않는다고 말하는데
처렴상정
(處染常淨-더러운 곳에 처해 있더라도 때
묻거나 물들지 않고 항상 깨끗하다)은 말입니다.
세간에 경계에 접해 있으면서도
청정한 모습을 연꽃에 비유한 것입니다.
또한 진흙 속에 핀 연꽃을 화중련
(火中蓮-불 속에 핀 연꽃)이라고 표현합니다.
불에 들어가면 모든 것이 다 타지만
그 안에 불 속에 핀 연꽃입니다.
불속에서 연꽃을 피운다는 말로
우리가 평소에 쓰는 번뇌의 마음으로
성불한다는 의미를 비유한 것입니다.
그리고 ‘바다 속에 핀 연꽃’은
우리들의 생사윤회 속에 있습니다.
생사의 흐름 속에 있으면서
부처로 살아가는 자불(自佛)이 출현한다고 표현했습니다.
그래서 바다 속에서
연꽃이 솟아오르고 부처님이 출현하는 것입니다.
중생들이 그 자리를 떠나지 않고
우리도 부처님 같이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바다’를 생각하면 무엇이 떠오르십니까?
지금까지 살아오고 그동안 경험했던 인연들에 의해
느낌이 개개인마다 다를 것입니다.
바다를 바라보기만 해도
마음이 시원한 경우도 있을 것이요,
바다에서 죽을 경험도 있을 것입니다.
이는 각자의 바다의 경험에 의해
형성된 바다의 이미지일 것입니다.
부처님 가르침 속에 바다는 어떤 비유로 사용하고 있을까요?
불가에서는 바다를 ‘고해(苦海-고통바다’를 떠올립니다.
반야심경에 ‘아제아제 바라아제’라고 하듯이
이 고행의 바다를 건너서 피안행으로 가자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계, 생사의 바다를 넘어야 합니다.
우리는 그 속에 살고 있습니다.
부처님은 고통의 바다를 다 건너가서도
반야바라밀다행’를 통해 고통을 이겨내신 것입니다.
화엄경에서 바다의 의미가 고해 즉,
생사흐름 속에 떠다니는 모습도 있지만
고통의 소멸이라고 하는 환멸(還滅),
그 바다가 깨달음의 바다라는 각해(覺海).
부처님의 특징적인 모습을
원력과 깨달음을 바다에 빗대어 말하고 있습니다.
바다는 생사고통을 다 말려 없애고,
그 자리에 깨달음,
즐거움의 바다의 물로 채운 것이 각해라고 하는 것입니다.
어떤 분은 바다를 무섭게 생각 하실 것이고,
어떤 분은 평화롭게 생각하실 것입니다.
어떤 분은 고해로, 어떤 분은 각해로 보시는 것입니다.
바다 자체가 다른 것이 아닌 보는 분들의 마음에 달린 것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씀 드리면 각해나,
고해나 보는 분의 마음은 다르지 않고 같습니다.
다 갖춰져 있는 부처님의 마음입니다.
그 계발을 온전히 하지 못하고 가능성만 갖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불성이 있는 존재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마음을 어떻게 일으키고, 쓰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마음 씀씀이가 달라져서
고통을 받기도, 즐거움을 받기도 합니다.
그 마음은 온전히 똑 같습니다.
온전히 모자라지 않는 지혜의 마음이 갖춰져 있고,
우리 마음이 온전한 부처의 마음입니다.
어떤 분은 윤회하는 업을 짓고,
어떤 분은 부처님 마음으로 공덕을 짓습니다.
그 마음을 일으켜서
부처님처럼 되겠다고 하는 것이 보리심(菩提心)입니다.
그 보리심을 일으킬 때를 ‘발보리심’했다고 말합니다.
앞에 말씀 드렸듯이 해인심(海印心-바다가 잔잔하면
하늘에 있는 땅에 있는 물상이 다 비친다)이라 했고,
해인삼매(海印三昧)에 들면 ‘번뇌 망상에 요동치지 않고
그 잔잔한 마음 상태가 되면
어떤 것에 흔들리거나 물들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 중생들의 본래 마음이자 부처님 마음입니다.
하지만 중생들은 ‘지혜의 마음을 다 가지고 있지만
사용할 줄을 모르더라’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망상과 집착으로 마음이 요동쳐서 그렇습니다.
본래 있는 불성을 사용할 수 있으려면
우리 마음이 부처님 마음이고,
중생이 본래 부처와 다르지 않는
아주 구족된 존재임을 확고한 신심이 있어야 합니다.
신심이 무엇입니까? ‘
모든 덕상이 구족된 부처님과 본래는
똑 같은 존재구나’라는 믿음을 확실히 해야 합니다.
그 믿음은 ‘생사윤회의 업을 본래 뿌리가 있는 것이 아닌
중생 교화를 하는 부처님의 지혜의 마음 그대로 인 것이구나.
신심을 제일 먼저 전제로 해야 합니다.
신심이 없으면 성불할 수 없습니다.
그 믿는 마음을 보리마음으로 바뀌려면,
깨달음의 행으로 나타나려면
부족한 마음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보려면 관찰을 해야 합니다.
들꽃에 핀 작은 꽃에서도
무한한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본래 원만한 마음을 관찰해 보십시오.
내가 설 수 있는 능력의 존재를 갖고 있는 깨달음의
오(悟). 견성(見性). 여래의 성품.
그 마음을 그대로 쓸 수 있습니다.
변질 되지 않고,
번뇌로 나타나지 않는 불보살님의 용심이 돼야 합니다.
그래야 여래성(如來性)이 그대로 일어납니다.
부처님 성품이 그대로 들어난 것이기 때문에
부처님이 오신 것입니다.
타불이 아닌 자불이 출현하신 것입니다.
그것을 화엄에서는 온 부처를 장엄했다고 합니다.
그럴 수 있는 힘이 해인삼매입니다.
모든 중생들은 중생이 아닌
다른 사물이 아닌 부처님 마음입니다.
그것이 삼매의 힘입니다.
모든 것은 자기가 생각하는 데로 나타납니다
보리심으로 나타나면 전부 부처님일 뿐입니다.
괴로운 부처님 보셨습니까?
윤회하는 부처님 보셨습니까?
부처의 자기 특징을 드러내기만 하면
모든 이들에게 즐거움을 줄 수 있습니다.
발보리심 공덕입니다.
바다는 공덕해(功德海)입니다. 공덕이 무진장하니까요.
그래서 보리심을 일으키는 그 자체가 공덕을 짓는 것입니다.
어떤 공덕을, 수행으로 마음을 깨닫고 써야 할 것인가?
우리 본래 마음을 믿으면 마음을 보게 되기에
그 마음을 그대로 쓰는 것이 공덕으로 마무리 짓게 되는 것입니다.
공덕행을 통해 온전히 자신을 볼 수도 있습니다.
그 마음을 닦아 나가면 마음을 닦는 것이 수심(修心)입니다.
어떻게 닦느냐? 행위로 닦기에 공덕행입니다.
화엄경에서 간단히 말하면 바라밀행입니다.
반야바라밀이 아니면 해탈까지는 가지 못합니다.
그 대표적인 공덕이 바로 바라밀 10가지, 십지수행입니다.
바다의 10가지 특징이라면 어떤 것이 있을까요.
바다를 바라보면 넓다, 크다, 깊다,
푸르다 등 다양하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파도를 가르쳐 바다가 변했다 하지만
바다는 생겨났다가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본래 성품, 바다는 죽은 시체를 담아 두지 않습니다.
더러운 것을 품고 있지 않습니다.
부처님 마음에도 더러운 것을 품고 있지 않습니다.
중생들이 마음에 품고 있으면
번뇌가 생기지만 바다가 넘치는 것은 보셨습니까.
아무리 많은 비가 육지에 내려,
바다가 쓸려가더라도 넘치는 것을 보셨습니까?
모든 것을 받아들입니다.
빗물이 육지의 모든 것을 쓸어가더라도
바다는 본래를 잃어버리지 않습니다.
생사의 가치를 뒀던 것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바다와 같은 공덕을 지닌
부처님의 지혜를 갖고 있고 우리 마음도
지혜를 잘 관찰해서 쓸 수 있도록
무진장한 원력행을 쓰는데 노력합시다.
모셔온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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