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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제불여래 친견

작성자신비아|작성시간24.07.03|조회수1 목록 댓글 0

[제불여래를 친견하고서 광대심으로써 가까이 모시고 공양하라]

 

혹시 어떤 사람은 말할지도 모른다. “나는 제불여래를 본적이 없고 내가 제불여래를 친견하길 기다릴 때 다시 광대심을 발하여도 괜찮은가?” 이러한 설법은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다르다. 문수보살은 곳곳마다 여래를 친견하고, 언제든지 여래를 친견한다. 우리는 여래를 친견하여도 여래를 인식하지 못할 뿐, 절대 제불여래가 우리 몸 곁에 있지 않은 것도 우리 면전에 있지 않은 것도 아니다.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에서는 우리에게 시방삼세 일체제불여래가 자기 눈앞에 있고, 자기 주변에 있음을 일깨우신다. 어디에 있는가? 주위의 일체 사람ㆍ일체 일ㆍ일체 물건은 제불여래가 아님이 없지만, 애석하게도 자신이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수시로 인식하면 여래의 경계에 들어가고, 일진법계에 들어간다.

 

 

 

우리는 오늘 제불여래를 친견하지 못하는 이유는 제불여래가 범부로 바뀐 것이고, 제불여래가 마라의 경계(魔障)로 바뀐 것이다. 어떻게 변화시키는가? 자신의 의식심意識心이 바뀌어 나타난 것이다. 우리는 학불하여 부처님의 가르침을 믿어야지, 결코 자신의 의식을 믿어서는 안 된다. 자신의 의사를 믿으면 영원히 여래를 친견할 수 없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믿으면 제불여래는 지금까지 우리를 떠난 적이 없고, 시시각각 우리를 배려하고 보살피고 있다. 그래서 부처님과 마라는 일념의 순간, 일념의 깨달음에 있다. 깨달음은 곧 부처님을 믿음이고, 미혹은 곧 자신을 믿음이다. 자신의 망상ㆍ분별ㆍ집착을 믿으면 그것이 곧 마라이니, 제불여래를 모두 마라의 경계로 변화시킨다. 일념에 깨달은 사람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믿고 마라의 경계를 제불여래로 바꾼다. 이것이 참으로 가까이 모시고 공양하는 것이고, 우리가 응당 학습하여야 하는 것이다.

 

 

 

공양은 형식에 있지 않고, 금전에 있지 않으며, 또한 당번幢幡ㆍ 보개寶蓋, 칠보공구七寶供具에 있지 않다. 보현보살께서는 대천세계의 칠보공양은 모두 법공양과 견주지 못한다고 말씀하신다. 법공양에서 「여설수행공양如說修行供養」을 최상으로 여긴다. 부처님께서는 우리에게 어떻게 하라고 가르치면 우리는 착실히 그것에 따라서 하고, 부처님께서 우리에게 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치면 결정코 준수하여 범해서는 안 된다. 이를 「여설수행공양」이라 한다.

 

 

 

부처님께서 우리에게 하라고 가르치셨거늘 우리가 하지 않고 있는지, 부처님께서 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셨거늘 우리가 마침 하고 있지 않은지, 우리자신은 반성하고 또 반성한다. 어떤 사람은 말한다. “나는 부처님의 말씀을 명백히 들었지만, 나는 여전히 하고 있지 않다. 왜 하지 못하는가? 습기가 너무 무거워 하고는 싶지만 마음대로 안 된다.” 이 말이 맞다. 당신은 매우 솔직하게 말했다. 만일 이 일념이 과연 바뀌면 당신은 범부에서 성인으로 바뀔 것이다. 확실히 번뇌습기는 무량겁 이래 훈습하여 뿌리를 내렸다. 이 뿌리를 뽑아버리기란 결코 쉽지 않다.

 

 

 

당신들은 이런 상황에 놓여 있다. 나도 예외는 아니다. 나는 오늘 조금 성취가 있을 뿐이다. 이런 경험은 참고할만하다고 말씀드린다. 그것은 곧 불법의 훈습熏習을 떠나서는 안 되고 불법의 훈습을 특별히 강화시켜야 한다. 불법의 훈습은 「수지 독송하여 사람을 위해 연설함(受持讀誦,爲人演說)」이니, 곧 이 한 마디 법문이다. 수지란 결단코 받아들여 가르침대로 봉행하여 시시각각 유지하여 잃지 않음을 뜻한다. 독송이 긴요하다. 날마다 독경하여야 한다. 날마다 경전을 연설할 수 있으면 가장 좋다. 날마다 연설하려면 반드시 날마다 독송하여야 한다.

 

 

 

독송하지 않고 어떻게 연설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날마다 경전을 연설함은 자신에게 날마다 독송하지 않으면 안 되게 압력을 가한다. 우리가 경권을 펼치면 널리 퍼져서 모두 오처悟處가 있어야 법희가 충만할 수 있고, 자신의 무시 겁 이래 망상 습기를 약화시킬 수 있다. 나는 이번 생에 이러한 방법으로 조금 성취할 수 있었으니, 하루도 경본을 떠나지 않았다.

 

 

 

나는 이러한 방법으로 성취하였고, 이러한 방법으로 심량을 개척하였다. 나는 학불하기 전에 심량이 좁아 터졌다. 내가 학불한 후 7년차에 경전 강설을 시작하여 올해로 40년간 강설하였으니, 학불한지 47년이나 된 셈이다. 47년 동안 훈습함에 날마다 중단함이 없었다. 이렇게 무시 겁의 이러한 습기 번뇌를 일어서 가려내었으니,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고인의 전기를 읽으면 고래의 대덕들은 3, 5년간 습기를 다 없애고 10년에서 8년의 시간에 걸쳐 자신을 바꾸었다고 하니 47년의 시간이 걸린 나로서는 옛 대덕들에 대해 탄복하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의 선근은 나보다 두텁고, 그들의 지혜는 나보다 예리하였다. 그래서 거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고도 미혹을 깨뜨리고 개오하여 범부에서 성인으로 바꿀 수 있었다.

 

 

 

나의 이러한 근성은 여러분과 다를 바가 없어 모질게 마음을 먹고 반세기의 시간에 걸쳐 중도에 포기하지 않아 바꿀 수 있었다. 이것이 바로 광대심으로써 가까이 모시고 공양함이다

 

 

.-정공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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