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꽃 피는 봄날, 나는 출가를 생각한다’
‘꽃이라는 글자를 자세히 들여다보신 적이 있나요?
한글 중에 제일 꽃을 닮은 글자는 꽃이라는 글자 하나뿐이지요.
자세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그 속에 가득 차 있는 햇빛 때문에
왠지 눈시울이 뜨거워집니다.’
어느 시인의 노래처럼 정말 '꽃'이라는 글자는 꽃처럼 보인다.
틱낫한 스님은 종이를 들고 물어보셨다. 무엇이 보이나요?
‘여기에 구름이 보이지 않나요? 나무가 보이지 않나요?’
그저 단순한 꽃이라는 글자에서 꽃과 햇빛을 본다면
한 장의 종이에서 구름과 나무를 본다면, 그는 행복하다.
보이는 것 너머를 보고, 들리는 것 너머를 본다면
그는 이미 온갖 스트레스와 근심걱정, 그 너머에 있기 때문이다.
어느 해 봄이었다.
어린 부처님은 아버지 정반왕을 따라 농경제에 참석했다.
농부들이 땀을 흘리며 열심히 밭을 갈고 있었다.
가래로 파헤쳐진 흙속에서 벌레가 꿈틀 꿈틀 나타나자
어디선지 모르게 새가 날아와 벌레를 쪼아 먹는 것이었다.
산 것끼리 서로 잡아먹으며 살아가는 참혹한 현실을 본 태자는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어 자리를 떠나 가까운 숲으로 갔다.
그리고 나무 아래 앉아 깊은 사색에 잠긴다.
태자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그날 이후, 태자는 명상에 잠기는 시간이 많았다.
그러다가 결국 29세가 되었을 때 출가를 결행한다.
출가를 결심하는 결정적인 계기로 이런 일이 있었다.
태자는 어느 날 수레를 타고 성 밖으로 놀러 나가다가
동문에서 노인을 보고 충격을 받아 그냥 돌아왔다.
다음 날은 남문에서 병자를 보고 역시 그냥 돌아왔다.
다음 날은 서문에서 장례를 보고 역시 그냥 돌아왔다.
태자가 진짜로 본 것은 무엇일까?
29세의 나이에 정말 노인과 병자와 장례를 처음 봤을까?
처음이 아니라면 무엇이 태자를 그토록 충격에 빠트려
결국 모든 것을 포기하고 출가에까지 이르게 하였는가?
훗날 부처님께서는 그때의 심정을 이렇게 회고하셨다.
‘누구나 늙고 병들고 죽는다. 나 역시 그것을 피할 수 없다.
그런데도 이것은 나에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여
괴로워하고 부끄러워하고 혐오하는 것이리라.
내가 이렇게 관찰했을 때, 나는 청년이면서도
청년의 의기가 완전히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그렇다. 태자가 진짜로 본 것은, 그의 마음이었다.
꽃이라는 글자를 보면서 그 너머 ‘꽃과 햇빛’을 보듯이
종이를 보면서 그 너머 ‘구름과 나무’를 보듯이
태자는 노병사의 모습을 보면서 그 너머 ‘마음’을 보았다.
그래서 그 마음을 조복받기 위해 출가의 길을 택한 것이다.
이제 곧 부처님 출가재일이다. 나도 가끔은 출가를 하고 싶다.
욕망을 부추기는 사회, 그 뜨거운 불길을 피해 출가하고 싶다.
돈의 횡포가 점점 더 심해지는 사회, 그 악취를 피하고 싶다.
그러나 부처님은 말씀하신다. 밖을 탓하지 마라. 마음을 보라.
‘기쁨과 자비 안에 기거하라. 설령 원수들과 함께 있을지라도.
기쁨과 건강 안에 기거하라. 설령 병든 몸과 함께 있을지라도.
기쁨과 평화 안에 기거하라. 설령 세상이 어지러울지라도..’
몸은 세상 속에 있어도 마음으로 벗어나면, 이게 곧 출가다.
어느 봄날 부처님의 사색은 시작되었고
꽃 피는 봄날 나는 출가를 생각한다.
<월간>
-햇빛엽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