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이 간지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벌써 가을이 깊어가고 겨울이 다가서고 있습니다. 지금이 11월, 두 달 뒤면 내년이 되니, 『금강경』의 ‘일체유위법 여몽환포영 여로역여전 응작여시관’이 실감납니다.
‘일체 유위법’에서 유위법(有爲法)이라는 것은 무위법(無爲法)과 대조가 되는 말로서 애착으로 생겨난 모든 존재를 말합니다. 여기서의 ‘법’은 법칙의 ‘법’이 아니고 ‘존재’라는 뜻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분석의 대가이십니다. 그래서 우리 몸뚱이와 마음을 분석했습니다.
몸과 마음을 분석해 보니까 75가지 구성요소(담마)로 나누어집니다. 담마를 한문으로 법이라고 풀이했는데, 존재를 구성하는 요소를 말합니다. 우리의 몸뚱이든 마음이든, 지구든 우주든, 모든 존재들은 마치 몽·환·포·영과 같고 로와 전과 같다는 것입니다. 몽(夢)은 꿈이요, 환(夢)은 허깨비, 포(泡)는 물거품, 영(影)은 그림자이며, 로(露)는 이슬, 전(電)은 번갯불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모든 존재는 몽(꿈), 환(허깨비), 포(물거품), 영(그림자), 로(이슬), 전(번갯불)과 같다는 것입니다.
이 6가지의 공통점은 순간적으로 나타났다가 순간적으로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고정된 실체가 없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간밤에 꿈을 꾸었다하더라도, ‘그 꿈을 내놓아 봐라’ 하면 밖으로 내놓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머릿속에 남아있는 것도 아니고, 가슴에 있는 것도 아니고, 한 마디로 애매한 것입니다. 이렇게 실체는 잡을 수 없지만, 현상으로서는 존재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정확하게 관찰하라는 것입니다.
불교는 관찰의 종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응작여시관! 금강경 사구게의 핵심으로 가장 중요한 단어는 ‘일체유위법 여몽환포영 여로역여전 응작여시관’인데, 여기서도 가장 핵심적인 한 단어를 뽑는다면 바로 관(觀)입니다. 관(觀)을 해야 합니다.
관(觀)이란 관찰하라는 말입니다. 잘되면 잘 되는대로 관찰하고, 안되면 안 되는대로 관찰하고, 성질나면 성질난다고 관찰하고, 우울하면 우울하다고 관찰하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차츰 관찰자의 입장에 서게 됩니다. 몸뚱이가 죽더라도 “아무개 몸뚱이가 타고 있구나.” 하고 자신의 몸을 관찰할 수 있다면, 이것이 바로 윤회에서 벗어나는 지름길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태어나면 태어났다고 관찰하고, 늙어 가면 늙어간다고 관찰하고, 병이 들면 병이 들었다고 관찰하고, 죽으면 죽는다고 관찰하는 것, 이것이 바로 진정한 ‘관’입니다.
삶의 진정한 의미는 관찰에 있습니다. 어떻게 사는 게 진정 잘사는 삶인가? 부자가 되는 게 잘사는 것인가? 공부를 잘하는 게 잘사는 것인가? 진정으로 잘사는 것은 관찰을 잘하는 것입니다. 부자가 되든 가난하든, 공부를 잘하든 못하든, 일이 잘되든 안 되든, 그냥 있는 그대로 관찰하는 삶, 이것이 바로 잘사는 삶입니다.
관찰을 통해서 삶을 업그레이드upgrade시킬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무엇을 관찰하는가? 몸뚱이의 무상함을 관찰하고, 마음의 일어남?사라짐을 관찰하고 관찰자를 관찰하는 것입니다. 몸뚱이는 계속 변합니다. 바람이 한 바탕 불면 낙엽이 후루룩 다 떨어집니다. 얼마 안가 완전히 다 떨어질 것입니다. 제행무상(諸行無常)의 법문! 자연을 보고 있으면, 이보다 더 훌륭한 설법은 없습니다.
제행무상을 터득하게 되면, 제법(諸法)무아(無我)를 터득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열반(涅槃)적정(寂靜)을 터득하게 됩니다. 불교는 이 삼법인(三法印)의 도리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습니다. 진정한 출가는 제행무상, 모든 것은 변한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는 것입니다. 그래서 몸뚱이는 태어나서 늙고 병들어 죽고, 마음은 생겨나서 머물렀다 변화해서 사라지고, 우주는 형성되어 머물렀다 무너져서 텅 비게 된다는 이것이 바로 진리입니다.
한 마디로 변화가 진리입니다. 그러면 모든 사물은 다 변화하지만, 몸뚱이와 마음과 우주를 관찰하고 있는 이 관찰자는 상(常)・락(樂)・아(我)・정(淨)입니다. 이 관찰자가 불성(佛性)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열반경』에서, 불성은 ‘상・락・아・정’이라고 합니다. 몸뚱이와 마음과 우주는 다 변화하지만, 불성은 ‘상・락・아・정’이라는 이것이 바로 열반경의 핵심사상으로서 열반4덕(열반의 4가지 덕성)입니다.
“불성은 항상하고, 불성은 즐거우며, 불성인 ‘나’가 있고, 불성은 청정하다.”
불성은 공성(空性)이고 자성(自性)입니다. 관찰하는 주인공 즉, 관찰자가 바로 불성입니다. 이 관찰자는 “다만 바라볼 뿐, 시비하거나 분별하지 않습니다. 나와 남을 가르지도 않고 선악과 이해를 나누지도 않습니다.” 이것이 관찰자의 특성입니다. 관찰자는 다만 관찰만 할 뿐이지, 시비하거나 분별하지 않습니다. “아, 낙엽이 떨어지는 구나.” 하고 관찰을 할 뿐이지, 낙엽이 떨어지니까 “슬프다” 또는 “즐겁다” 이렇게 시비하고 분별하지 않습니다. ‘몸뚱이가 늙어가는구나.’ 이렇게 관찰을 할 뿐이지, 몸뚱이가 늙어가니까 “서럽다”라는 생각을 일으키지 않고 다만 관찰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관찰자의 삶은 평화롭습니다. 고통과 즐거움에 여여(如如)하게 대처합니다. 괴로우면 ‘괴롭다’고 관찰하고 즐거우면 ‘즐겁다’고 관찰할 뿐입니다. 관찰한다고 해서 괴로움과 즐거움이 금방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괴로움이 여전히 생기고 즐거움도 여전히 생겨납니다. 그러나 괴로우면 괴롭다고 관찰하고 즐거우면 즐겁다고 관찰합니다. “몸뚱이가 아프다, 월호가...” 또는 “마음이 즐겁다, 월호가...” 하고 자신의 닉네임을 붙여서 관찰합니다. 월호 몸뚱이가 아프고, 월호 마음이 즐거운 것이지, 내가 아프고 즐거운 것이 아닙니다. 다만 관찰자의 입장에서 월호의 몸과 마음을 관찰하고 있을 뿐입니다.
“보이는 것을 보기(見)만 하고 들리는 것을 듣기(聞)만 하고 느끼는 것을 느끼기(覺)만 하고 아는 것을 알기(知)만 합니다.” 견문각지(見聞覺知)! 시비분별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여여하게 바라보게 됩니다.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육근(六根)의 작용을 그대로 관찰할 뿐이지, ‘나’라는 한 생각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관찰할 때, 거기에 ‘나’는 없습니다.” 내가 보는 것이 아니고 눈이 보는 것입니다. 내가 듣는 것이 아니고 귀가 듣는 것입니다. 안・이・비・설・신・의(眼・鼻・耳・舌・身・意)가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눈은 보고(見) 귀는 듣고(聞), 그리고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몸으로 느끼는 것(覺)입니다. 그리고 뜻으로는 안다(知)는 것입니다. 다만 육근의 작용이 있을 뿐, 거기에 ‘나’는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다만 관찰의 기쁨이 있을 뿐입니다. 지혜와 자비는 여기서 샘솟는 것입니다. 바로 지금 여기에서 몸과 마음을 관찰하는 것이야말로 참다운 지혜와 자비의 근원이 되는 것입니다.
삶의 진정한 의미는 관찰에 있다.
몸뚱이의 무상(無常)함을 관찰하고
마음의 일어남・사라짐을 관찰하며
관찰자(觀察者)를 관찰하는 것이다.
몸뚱이는 생(生)노(老)병(病)사(死)하고
마음은 생(生)주(住)이(異)멸(滅)하며
우주는 성(成)주(住)괴(壞)공(空)하지만
관찰자는 상(常)락(樂)아(我)정(淨)이다.
관찰자는 다만 바라볼 뿐!
시비하거나 분별하지 않는다.
나와 남을 가르지도 않고
선악과 이해를 나누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관찰자의 삶은 평화롭다.
고통과 즐거움에 여여(如如) 하게 대처한다.
괴로우면 ‘괴롭다’고 관찰하고
즐거우면 ‘즐겁다’고 관찰한다.
보이는 것을 보기(見)만 하고
들리는 것을 듣기(聞)만 하고
느끼는 것을 느끼기(覺)만 하고
아는 것을 알기(知)만 한다.
이와 같이 관찰할 때,
거기에 ‘나’는 없다.
다만 관찰의 기쁨이 있을 뿐!
지혜와 자비는 여기서 샘솟는다
.-월호스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