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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윳따 니까야

부미자 경 (Bhūmija-sutta, S12:25)

작성자Viriya|작성시간26.06.22|조회수38 목록 댓글 0

2. 그때 부미자 존자가 해거름에 홀로 앉음을 풀고 일어나 사리뿟따 존자에게 다가갔다. 가서는 사리뿟따 존자와 함께 환담을 나누었다. 유쾌하고 기억할 만한 이야기로 서로 담소를 하고서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부미자 존자는 사리뿟따 존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3. “도반 사리뿟따여, 어떤 사문·바라문들이 업을 설하는데 즐거움과 괴로움은 자기 스스로 짓는 것이라고 천명합니다. 도반 사리뿟따여, 어떤 사문·바라문들이 업을 설하는데 즐거움과 괴로움은 남이 짓는 것이라고 천명합니다. 도반 사리뿟따여, 어떤 사문·바라문들이 업을 설하는데 즐거움과 괴로움은 자기 스스로도 짓고 남도 짓는 것이라고 천명합니다. 도반 사리뿟따여, 어떤 사문·바라문들이 업을 설하는데 즐거움과 괴로움은 자기 스스로도 짓지 않고 남이 짓지도 않는 우연히 발생하는 것이라고 천명합니다.

도반 사리뿟따여, 그러면 세존께서는 여기에 대해서 어떻게 설하며 어떻게 가르칩니까? 우리가 어떻게 설명하면 세존께서 설하신 것과 일치하게 되며, 세존을 거짓으로 헐뜯지 않고 세존께서 설하신 것을 반복하여 설한 것입니까? [세존께서 설했다고 전해진 이것을 반복하더라도] 어떤 동료수행자도 나쁜 견해에 빠져 비난의 조건을 만나지 않겠습니까?”

 

4. “도반이여, 즐거움과 괴로움은 연기된 것[緣而生]이라고 세존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무엇을 반연하여 [즐거움과 괴로움이] 있습니까? 감각접촉을 반연합니다. 이렇게 설하면 세존께서 설하신 것과 일치하게 되며, 세존을 거짓으로 헐뜯지 않고, 세존께서 설하신 것을 반복하여 설한 것이며, 어떤 동료수행자도 나쁜 견해에 빠져 비난의 조건을 만나지 않게 됩니다.

도반이여,  여기서 어떤 사문·바라문들이 업을 설하여 즐거움과 괴로움은 자기 스스로 짓는 것이라고 천명하는 것도 감각접촉을 조건으로 합니다. … 어떤 사문·바라문들이 업을 설하여 즐거움과 괴로움은 자기 스스로도 짓지 않고 남이 짓지도 않는 우연히 발생하는 것이라고 천명하는 것도 감각접촉을 조건으로 합니다.

도반이여, 여기서 어떤 사문·바라문들이 업을 설하여 즐거움과 괴로움은 자기 스스로 짓는 것이라고 천명하는데 감각접촉이 없이 [그 즐거움과 괴로움을] 경험할 것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 어떤 사문·바라문들이 업을 설하여 즐거움과 괴로움은 자기 스스로도 짓지 않고 남이 짓지도 않는 우연히 발생하는 것이라고 천명하는데 감각접촉이 없이 [그 즐거움과 괴로움을] 경험할 것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5. 아난다 존자는 사리뿟따 존자가 부미자 존자와 나눈 대화에 대해서 들었다. 그때 아난다 존자는 세존께 다가갔다. 가서는 세존께 절을 올리고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아난다 존자는 사리뿟따 존자가 부미자 존자와 나눈 대화를 모두 세존께 아뢰었다.

 

6. “장하고도 장하구나, 아난다여, 사리뿟따는 바르게 설명하였다. 아난다여, 즐거움과 괴로움은 연기된 것[緣而生]이라고 나는 말했다. 그러면 무엇을 반연하여 [즐거움과 괴로움이] 있는가? 감각접촉을 반연한다. 이렇게 설하면 내가 설한 것과 일치하게 되며, 나를 거짓으로 헐뜯지 않고, 내가 설한 것을 반복하여 설한 것이며, 어떤 동료수행자도 나쁜 견해에 빠져 비난의 조건을 만나지 않게 된다.

아난다여, 여기서 어떤 사문·바라문들이 업을 설하여 즐거움과 괴로움은 자기 스스로 짓는 것이라고 천명하는 것도 감각접촉을 조건으로 한다. … 어떤 사문·바라문들이 업을 설하여 즐거움과 괴로움은 자기 스스로도 짓지 않고 남이 짓지도 않는 우연히 발생하는 것이라고 천명하는 것도 감각접촉을 조건으로 한다.

아난다여, 여기서 어떤 사문·바라문들이 업을 설하여 즐거움과 괴로움은 자기 스스로 짓는 것이라고 천명하는데 감각접촉이 없이 [그 즐거움과 괴로움을] 경험할 것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 … 어떤 사문·바라문들이 업을 설하여 즐거움과 괴로움은 자기 스스로도 짓지 않고 남이 짓지도 않는 우연히 발생하는 것이라고 천명하는데, 감각접촉이 없이 [그 즐거움과 괴로움을] 경험할 것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


7. “아난다여, 몸이 있을 때 몸을 반연하여 일어난 의도를 조건하여 내적인 즐거움과 괴로움이 일어난다. 아난다여, 말이 있을 때 말을 반연하여 일어난 의도를 조건하여 내적인 즐거움과 괴로움이 일어난다. 아난다여, 마노가 있을 때 마노를 반연하여 일어난 의도를 조건하여 내적인 즐거움과 괴로움이 일어난다.* 이 의도는 무명을 조건으로 한 것이다.”**

 

8. “아난다여, 스스로가 몸으로 의도적 행위를 짓더라도*** 그것을 조건으로 해서 내적인 즐거움과 괴로움이 일어난다. 알아차리면서§ 몸으로 의도적 행위를 짓더라도 그것을 조건으로 해서 내적인 즐거움과 괴로움이 일어난다. 알아차리지 못하면서§§ 몸으로 의도적 행위를 짓더라도 그것을 조건으로 해서 내적인 즐거움과 괴로움이 일어난다.”

 

9. “아난다여, 스스로가 말로 의도적 행위를 짓더라도 그것을 조건으로 해서 내적인 즐거움과 괴로움이 일어난다. 아난다여, 남들이 그에게 말로 의도적 행위를 짓더라도 그것을 조건으로 해서 내적인 즐거움과 괴로움이 일어난다. 알아차리면서 말로 의도적 행위를 짓더라도 그것을 조건으로 해서 내적인 즐거움과 괴로움이 일어난다. 알아차리지 못하면서 말로 의도적 행위를 짓더라도 그것을 조건으로 해서 내적인 즐거움과 괴로움이 일어난다.”

 

10. “아난다여, 스스로가 마노로 의도적 행위를 짓더라도§§§ 그것을 조건으로 해서 내적인 즐거움과 괴로움이 일어난다. 아난다여, 남들이 그에게 마노로 의도적 행위를 짓더라도 그것을 조건으로 해서 내적인 즐거움과 괴로움이 일어난다. 알아차리면서 마노로 의도적 행위를 짓더라도 그것을 조건으로 해서 내적인 즐거움과 괴로움이 일어난다. 알아차리지 못하면서 마노로 의도적 행위를 짓더라도 그것을 조건으로 해서 내적인 즐거움과 괴로움이 일어난다.”

 

11. “아난다여, 이러한 법들은 무명의 영향을 받는다.# 그러나 무명이 남김없이 빛바래어 소멸하면 내적인 즐거움과 괴로움을 일어나게 하는 조건인 몸이 없으며,## 내적인 즐거움과 괴로움을 일어나게 하는 조건인 말이 없으며, 내적인 즐거움과 괴로움을 일어나게 하는 조건인 마노가 없다. 내적인 즐거움과 괴로움을 일어나게 하는 조건인 터전이 존재하지 않고 … 기반이 존재하지 않고 … 장소가 존재하지 않고 … 이유가 존재하지 않는다.###

 

 

* "'몸(kāya)‘이란 몸의 문(kāya-dvāra)을 말한다. 그러므로 몸이 있을 때(kāye sati)란 몸의 암시(kāya-viññatti)가 있을 때란 뜻이다.” (AA.ⅲ.144)

『청정도론』은 몸의 암시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마음에 의해 생긴 바람의 요소[風界]가 앞으로 나아가는 등의 행동을 생기게 한다. 이 바람의 요소의 형태 변화(ākāra-vikāra)를 ‘몸의 암시[身表, kaya-viññatti]’라 한다. 이것은 동시에 태어난 물질의 몸을 뻣뻣하게 하고 지탱하고 움직이게 하는 조건이다. 이것의 역할은 의도하는 것을 넌지시 알리는 것이다. 몸을 움직이는 원인으로 나타난다. 이것의 가까운 원인은 마음으로부터 생긴 바람의 요소이다. 이것은 몸의 움직임을 통하여 의도한 것을 알리는 원인이고 또 그 자체가 몸을 통하여, 즉 몸의 움직임을 통하여 알아져야 하기 때문에 몸의 암시라 한다. 이 몸의 암시는 마음으로부터 생긴 물질을 움직인다. 또한 온도로부터 생긴(utuja) 물질 등도 이 마음으로부터 생긴 물질과 서로 연관되어 있는데 그들이 움직이기 때문에 앞으로 나아가는 행동 등이 생긴다고 알아야 한다.” (Vis.XIV.61)

아비담마에서는 몸의 암시를 업을 짓는 매개체라 하며 그래서 몸의 문(kāya-dvāra)이라 한다. 그래서 위 주석서도 몸을 몸의 문으로, 다시 몸의 암시로 설명하고 있으며 본문에서 의도(sañcetanā)로 언급되는 업(kamma)은 이를 통해서 일어나는 것이다. (『아비담마길라잡이』 5장 §22 해설 참조)

 

위와 같은 방법으로 말(vacī)은 말의 문(vacī-dvāra)를 뜻하고 말의 문은 바로 말의 암시[語表, vacī-viññatti]이며, 이것은 말의 업[口業]을 짓는 문이 된다. (말의 암시에 대해서는 『아비담마길라잡이』 6장 §4 해설 참조)

 

같은 방법으로 마노[意,manno]는 마노의 업[意業]을 짓는 문이며, 이를 마노의 문(mano-dvāra)이라고 한다. 여기서 말하는 마노의 문이란 이런 의도적인 행위, 즉 업에 개입된 매순간 일어나는 알음알이를 전체적인 측면에서 일컫는 집합적인 명칭이라고 CMA는 설명하고 있다. (『아비담마길라잡이』 5장 §22 해설 참조) 한편 아비담마에서는 구체적으로 잠재의식(바왕가, bhavaṅga-citta)을 일러 마노의 문이라 한다. (『아비담마길라잡이』 3장 §12 해설 참조)

 

** “만일 [사실을] 가려버리는 (chādayamānā) 무명이 조건이 되면 세 가지 문에서 즐거움과 괴로움의 조건이 되는 의도가 일어난다. 이처럼 근본이 되는 무명을 통해서 이 사실을 말한 것이다.” (AA.ⅲ.144)

즉 주석서는 무명은 마음의 문에서만 조건이 되는 것이 아니라 몸의 문과 말의 문을 포함한 세 문 모두에서 의도가 일어나게 하는 조건이 된다고 설명하고 있다.

주석서에 의하면 세존께서는 즐거움과 괴로움이 단지 감각접촉 하나만을 조건으로 해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몸이나 말이나 마음이나 나나 남 등과 같은 다른 여러 조건들을 반연해서 일어나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이 문단을 말씀하셨다고 한다. (SA.ii.57)


*** “’스스로가 몸으로 의도적 행위를 짓는다(sāmaṁ kaya-saṅkhāram abhisaṅkharoti).’는 것은 남들의 명령이 아니라 스스로가 의도적 행위를 하는 것을 말한다.” (AA.iii.144-145)

주석서의 설명에서 보듯이 abhisaṅkharoti나 이것의 명사인 abhisaṅkhāra는 초기불전과 특히 주석서에서는 업형성이나 의도적 행위(cetanā)라는 상카라[行]의 적극적 측면을 나타내는 술어로 사용되고 있다. 그래서 『청정도론』 XVII.46에서도 ‘삼계의 유익하거나 해로운 의도를 일러 업형성(abhisaṅkharaṇaka)의 상카라라 부른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 “유익한 것(kusala)을 유익한 것이라고, 해로운 것(akusala)을 해로운 것이라고, 유익한 과보를 유익한 과보라고, 해로운 과보를 해로운 과보라고 알면서 몸의 문을 통해서 몸으로 의도적 행위를 짓는 것을 말한다.” (AA.ⅲ.145)

 

§§ 주석서는 알아차리지 못하면서 짓는 업(asampajāna-kamma)의 예를 다음과 같이 들고 있다.

“남자 아이나 여자 아이가 부모님들이 하는 대로 해야지 하면서 탑에 예배를 하고 꽃을 공양하고 비구 승가를 공경한다. 그들은 이것이 유익한 것이라고 알지 못하지만 그것은 유익한 것이다. 남자 아이나 여자 아이가 손으로 부모를 때리고 비구들에게 손을 치켜들고 몽둥이를 들고 욕을 하는 것은 알든 모르든 해로운 업이라고 알아야 한다.” (AA.ⅲ.145)

 

§§§ '마노로 의도적 행위를 짓더라도‘는 mano-saṅkhāraṁ abhisaṅkharoti를 옮긴 것이다. 여기서 마노의 의도적 행위(mano-saṅkhāra)는 「분석 경」(S12:2) §14에 나타나는 마음의 의도적 행위(citta-saṅkhāra)와 동의어임이 명백하다. 한편 「까마부 경2」(S41:6) §4와 「짧은 방등경」(M44/i.301) §14에서 마음의 [의도적] 행위(citta-saṅkhāra)는 인식(saññā)과 느낌(vedanā)을 뜻하는 것으로 나타나는데 이것이 본경에도 적용되어야 하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 “‘이러한 법들(imesu dhammesu)'이란 이러한 의도라는 법들(cetanā-dhammā)인데, 이것은 무명을 반연한 것이다. 무명은 의도라는 법들에게 함께 생긴 조건(sahajāta), 의지하는 조건(upanissaya)이다. 이와 같이 무명은 윤회(vaṭṭa)뿐만 아니라 윤회의 뿌리라고 알려주시는 것이다.” (AA.ⅲ.146)

 

## “번뇌 다한 아라한도 탑전을 청소하고 보리수나무 주위를 청소하고 앞으로 가고 뒤로 가고 하는 동의 몸으로 짓는 행위를 한다. 몸의 문에서는 20가지 과보의 법이 아닌 의도가 일어난다. 그러므로 ‘내적인 즐거움과 괴로움을 일어나게 하는 조건인 몸이 없다.’고 했다. 몸의 문(kaya-dvāra)을 통해서 생긴 의도(cetanā)가 여기서는 몸과 동의어다. 이것은 말과 마노에도 적용된다.” (AA.ⅲ.146) 

즉 여기서 ‘몸이 없다(kāyo na hoti)'는 말은 ‘몸의 문으로 일으키는 의도가 없다’는 말이라고 주석서는 분명히 밝히고 있다.

 

### “여기서 ‘터전(khetta)’ 등은 모두 유익하거나 해로운 업의 이름이다. 업은 과보(vipāka)를 자라게 하는 장소라는 뜻에서 ‘터전’이라 하고, 확립되게 한다는 뜻에서 ‘기반(vatthu)’이라 하고, 원인이라는 뜻에서 ‘장소(āyatana)’라 하고, 이유라는 뜻에서 ‘이유(adhikaraṇa)’라 한다.” (AA.iii.147)

 

부미자 경을 통해서 사리뿟따존자는 부미자 존자에게 괴로움-감각접촉의 2지 연기를 설했고, 이를 아난다 존자로부터 전해들은 세존께서는 이것을 인정하신 뒤에 다시 괴로움-의도적 행위-무명의 3지 연기를 설하셨다. 이처럼 본 「인연 쌍윳따」(S12)에는 다양한 관점에서 다양한 숫자의 구성요소를 포함한 연기가 나타나고 있다.

 

 

- 초기불전연구원 번역, 주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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