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사부로 요시미츠(新羅三郞義光, 1045~1127)의 태생, 출생배경 등과 관련해서는 두가지의 학설이 있습니다. 전자는 미나모토家의 후손으로서 온죠지(園城寺)의 신라명신(新羅明神)사당 앞에서 원복元服(성인식의례)을 행한 후 이를 기념하여 개명하였다는 설이고, 후자는 신라 화랑의 후예로서 일본으로 건너와 미나모토家에 편입되었다는 설인데 7:3의 비중으로 전자의 통설이 대세인 듯 보여집니다. 요시미츠에 대한 자세한 이해는 그의 가문인 '미나모토'에 관한 설명으로서 보완될 필요가 있기에 간략하게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세이와(淸和)천황의 증손자인 미나모토노 미츠나카(源滿仲)의 세 아들 중 차남 요리노부(賴信)가 훗날 다케다(武田) 가문의 터전이 되는 카이(甲斐)국의 지방관으로 임명되면서 미나모토 가문이 관동지방에 깊은 뿌리를 내리는 계기를 마련합니다. 요리노부의 임기4년동안 카이국 백성들로부터 확실한 신뢰를 받았고, 근방에서 거병한 다이라노 타다츠네(平忠常)의 반란을 진압하여 무장으로서의 명성또한 드높였죠. 이런 요시노부의 아들과 손자가 주동이 되어 일으킨 사건이 바로 '前9년의役'과 '後3년의役'입니다. 요시노부의 아들 요리요시(賴義), 그리고 그의 아들 요리이에(賴家)가 이를 통해 급부상하였는데 後3년의役에서 형 요리이에를 도와 큰 공을 세운 무장이 바로 미나모토노(신라사부로) 요시미츠입니다. (※ 참고로 後3년의役 이후의 미나모토 가문의 입지에 대해 말하자면... 요시이에 대代의 미나모토 가문의 입지는 그의 손자 다메요시(爲義)때에 이르러 지방세력으로서의 입지불안성, 후지와라 가문으로부터의 불인정, 다메요시의 무능함 등의 원인으로 급속도로 추락하게 됩니다. 12세기 중반에 이르러서는 미나모토家 내분이 일어나 심각한 위기를 맞이하였고, 이 때 가문내부의 혼란을 잠식시키고 그당시 강력한 가문 중 하나였던 다이라(平)家를 박살내면서 전국의 핵심인물로 급부상했던 자가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賴朝)죠. 즉 미나모토 가문이 가마쿠라 막부를 세우며 천하의 명문으로 자리잡던 시기가 1156년으로, 요시미츠 사후 상당기간이 지난 다음임을 먼저 제시합니다.)
요시미츠는 무공실력이 뛰어나고 특히 군사전략적인 면에서 당시에 획기적인 전술 중 하나였던 철갑기마부대를 창시했다고 합니다. 아마 이때문에 다케다 가문의 트레이드마크가 휘황찬란한 깃대를 꼽은 대규모 기마부대로 굳혀진 것 같습니다. 후대로 계승되는 가문의 가풍이란 것이 단지 문화적인 측면에서 뿐만아니라 전술적인 방면으로까지 확장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그가 자주 애용했던 어기(御旗:중요한 전투때마다 자가自家의 구분을 위해 직속부하들에게 들게 했던 상징 깃발)가 바로 '미하타다테나시'로 우리에겐 '풍림화산(風林火山)'의 깃발로 더 잘알려져 있습니다. 다케다 가문의 19대 당주였던 신겐(信玄)과 20대 당주 가츠요리(勝賴) 대까지 이어진 가문의 오랜 가보가 되었죠. 원청정치의 핵심인물이었던 도바법황(鳥羽法皇)의 신임을 받아 자신만의 입지를 다져나가며 가마쿠라, 무로마치 시대를 아우르는 강력한 다이묘 세력으로 거듭났습니다.
그리고... 후자의 학설은 신라사부로 요시미츠(新羅三郞義光)가 문벌가문들이 정권을 잡고 귀족 문화의 잔재를 남겼던 헤이안(平安)시대 말기, 시라카와상황(白河上皇)의 주도로 이끌어진 원청(院廳)의 부속 북방경비를 맡던 북면군(北面軍)의 대장 직책을 맡았던 신라인이라는 것인데... 이 북면군이라는 기구는 타국의 용병들로 이루어진 군대로 이중 상당수가 백제, 신라, 그리고 남만병이었다고 하기에 이 학설의 힘을 실어주고 있죠. 그의 조국은 성性에서도 알 수 있듯이 '신라(新羅)'이며, 신라 화랑단의 일원으로서 화랑 전통무예를 익히고 자신의 창조적인 기법을 더하여 '주짓수(柔術=유술)'라는 일본전통무술을 창시했다 전해집니다. 현재 '다이토오류 야와라(大東流柔術=대동류유술)'(※그냥 '야와라'라고 불리우기도 하고 우리에겐 '공권유술'로 잘 알려져있습니다.)로 불리우는 이 무술의 창시자라 할 수 있죠. 우리나라 전통무예와 상당히 흡사하여 화랑들이 수련하던 음양권의 음술(陰術)의 모방본이 아닌가와 관련하여 최근에 논란이 있었습니다. 어찌되었건 그는 엄연한 신라인으로 해상무역과 관련하여 일본에 건너가 일본인들에게 야와라를 전수시키면서 신임을 얻었던 것 같습니다. 후에 미나모토 가문에 편입되어 그 성性을 하사받았다 주장하며, 요시미츠의 태생과 관련하여 원래는 가야국(伽倻國)의 뿌리를 두고있다는 일설도 있습니다.
세이와(淸和)천황의 증손자인 미나모토노 미츠나카(源滿仲)의 세 아들 중 차남 요리노부(賴信)가 훗날 다케다(武田) 가문의 터전이 되는 카이(甲斐)국의 지방관으로 임명되면서 미나모토 가문이 관동지방에 깊은 뿌리를 내리는 계기를 마련합니다. 요리노부의 임기4년동안 카이국 백성들로부터 확실한 신뢰를 받았고, 근방에서 거병한 다이라노 타다츠네(平忠常)의 반란을 진압하여 무장으로서의 명성또한 드높였죠. 이런 요시노부의 아들과 손자가 주동이 되어 일으킨 사건이 바로 '前9년의役'과 '後3년의役'입니다. 요시노부의 아들 요리요시(賴義), 그리고 그의 아들 요리이에(賴家)가 이를 통해 급부상하였는데 後3년의役에서 형 요리이에를 도와 큰 공을 세운 무장이 바로 미나모토노(신라사부로) 요시미츠입니다. (※ 참고로 後3년의役 이후의 미나모토 가문의 입지에 대해 말하자면... 요시이에 대代의 미나모토 가문의 입지는 그의 손자 다메요시(爲義)때에 이르러 지방세력으로서의 입지불안성, 후지와라 가문으로부터의 불인정, 다메요시의 무능함 등의 원인으로 급속도로 추락하게 됩니다. 12세기 중반에 이르러서는 미나모토家 내분이 일어나 심각한 위기를 맞이하였고, 이 때 가문내부의 혼란을 잠식시키고 그당시 강력한 가문 중 하나였던 다이라(平)家를 박살내면서 전국의 핵심인물로 급부상했던 자가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賴朝)죠. 즉 미나모토 가문이 가마쿠라 막부를 세우며 천하의 명문으로 자리잡던 시기가 1156년으로, 요시미츠 사후 상당기간이 지난 다음임을 먼저 제시합니다.)
요시미츠는 무공실력이 뛰어나고 특히 군사전략적인 면에서 당시에 획기적인 전술 중 하나였던 철갑기마부대를 창시했다고 합니다. 아마 이때문에 다케다 가문의 트레이드마크가 휘황찬란한 깃대를 꼽은 대규모 기마부대로 굳혀진 것 같습니다. 후대로 계승되는 가문의 가풍이란 것이 단지 문화적인 측면에서 뿐만아니라 전술적인 방면으로까지 확장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그가 자주 애용했던 어기(御旗:중요한 전투때마다 자가自家의 구분을 위해 직속부하들에게 들게 했던 상징 깃발)가 바로 '미하타다테나시'로 우리에겐 '풍림화산(風林火山)'의 깃발로 더 잘알려져 있습니다. 다케다 가문의 19대 당주였던 신겐(信玄)과 20대 당주 가츠요리(勝賴) 대까지 이어진 가문의 오랜 가보가 되었죠. 원청정치의 핵심인물이었던 도바법황(鳥羽法皇)의 신임을 받아 자신만의 입지를 다져나가며 가마쿠라, 무로마치 시대를 아우르는 강력한 다이묘 세력으로 거듭났습니다.
그리고... 후자의 학설은 신라사부로 요시미츠(新羅三郞義光)가 문벌가문들이 정권을 잡고 귀족 문화의 잔재를 남겼던 헤이안(平安)시대 말기, 시라카와상황(白河上皇)의 주도로 이끌어진 원청(院廳)의 부속 북방경비를 맡던 북면군(北面軍)의 대장 직책을 맡았던 신라인이라는 것인데... 이 북면군이라는 기구는 타국의 용병들로 이루어진 군대로 이중 상당수가 백제, 신라, 그리고 남만병이었다고 하기에 이 학설의 힘을 실어주고 있죠. 그의 조국은 성性에서도 알 수 있듯이 '신라(新羅)'이며, 신라 화랑단의 일원으로서 화랑 전통무예를 익히고 자신의 창조적인 기법을 더하여 '주짓수(柔術=유술)'라는 일본전통무술을 창시했다 전해집니다. 현재 '다이토오류 야와라(大東流柔術=대동류유술)'(※그냥 '야와라'라고 불리우기도 하고 우리에겐 '공권유술'로 잘 알려져있습니다.)로 불리우는 이 무술의 창시자라 할 수 있죠. 우리나라 전통무예와 상당히 흡사하여 화랑들이 수련하던 음양권의 음술(陰術)의 모방본이 아닌가와 관련하여 최근에 논란이 있었습니다. 어찌되었건 그는 엄연한 신라인으로 해상무역과 관련하여 일본에 건너가 일본인들에게 야와라를 전수시키면서 신임을 얻었던 것 같습니다. 후에 미나모토 가문에 편입되어 그 성性을 하사받았다 주장하며, 요시미츠의 태생과 관련하여 원래는 가야국(伽倻國)의 뿌리를 두고있다는 일설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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