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중기 때의 문신 박수량(1491~1554) 선생의
비석엔 아무런 글자도 없다.
전남 장성군 황룡면 금호리에 있는
그의 묘 앞 비석은 그래서 ‘백비’(白碑)라고 불린다.
형조판서, 한성판윤, 우참찬, 중추부사 등
38년 동안 조정의 고위 관직을 두루 거쳤던
그는 서울에서 변변한 집 한 칸 갖지 못했을 만큼 청렴했다.
박수량 선생은 64살을 일기로 세상을 떠나면서
묘를 크게 하지 말고 비도 세우지 말라고 유언했다.
하지만 명종이 청백리의 죽음을 슬퍼해 서해 바다에서
빗돌을 골라 하사했다.
박수량이 생전에 자제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초야(草野)의 출신으로 외람되게 판서(判書)의 반열에 올랐으니,
영광이 분수에 넘쳤다.”
자손들은 “청백했던 삶을 비문으로 쓰면 오히려
그의 청렴을 잘못 알려 누를 끼칠 수 있다”며 백비를 세웠다.
임금의 하사품을 무시하지 않고 선대의 유언도 지킨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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