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5년 정월 어느 몹시 추운 날 오후, 런던 시 윔폴가(街)의 비교적 호화스러운 저택 2층 방 소파 위에 한 여인이 누워 있었다. 작은 체구에 전체적으로 섬세한 인상을 주는 생김새였다. 긴 눈썹에 둘러싸인 크고 깊은 눈은 꿈꾸는 듯했고 물결 같은 긴 머리카락에 반쯤 가려진 얼굴이 몹시 창백했다. 손발은 소녀처럼 작고 귀여웠다. 입고 있는 검정 벨벳 드레스가 썩 잘 어울렸다.
창문은 바람이라도 새어들세라 꼭꼭 닫혀 있었다. 벌써 오랜 시간 그렇게 미동도 하지 않고 누워있는 그녀는 숫제 하나의 정물(靜物)이었다.
엘리자베스 바렛 - 이것이 그녀의 이름이다. 영국 문단에서는 시인(詩人)으로서 어느 정도 이름이 알려져 있는 여자였다. 그러나 그런 것이 그녀에게 어찌 대수로운 일이랴. 그녀는 병을 앓고 있었다. 아직 독신이지만 처녀 시절의 꽃다움은 시든 지 오래였다. 자그마치 6년, 그녀는 병이라는 이름의 질긴 줄에 묶여 바깥세상과는 완전히 담을 쌓고 그 오랜 나날 은둔 생활을 해오고 있는 터였다. 충성스런 개 플러쉬를 유일한 벗으로 흡사 망령(亡靈)들의 세계와 같은 그 방 속에 갇혀 지내고 있는 것이었다.
윔폴가 50번지. 한 우체부가 그녀의 집 대문을 두드렸다. 엘리자베스에게는 전에도 가끔씩 우편물이 배달되고 있었다. 그것은 그나마 아직도 그녀가 붓의 활동을 멈추지 않고 있는 덕이라고 할 수 있었다. 마치 자신의 삶을 확인이라도 하려는 듯 그녀는 여러 사람과 교신(交信)을 하는 한편 간간 시작(詩作)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의 시를 읽고 몇몇 사람들이 편지를 보내 온 일이 있었지만 그녀는 그것들을 대부분 읽지도 않고 불 속에 넣어 두었다.
우체부가 전해준 편지는 역시 엘리자베스에게 배달되어 온 것이었다.
그 한 통의 편지 - 편지를 받아 들 때만 해도 그녀는 그 편지가 자기와 바깥세상 사이에 높이 쌓여 있는 그 ‘삶의 감옥’ 문을 열어 주는 열쇠 구실을 하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짐작하지 못했다. 그렇다, 그 한 통의 편지는 이 불행한 여자에게는 문학사에 있어 불후(不朽)의 로맨스의 여주인공이 되게 한 그 출발 신호였던 것이다.
발신인의 이름은 그녀도 알만한 사람이었다. 그녀는 봉투에서 편지를 꺼내어 천천히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바렛양, 저는 마음속으로부터 그대의 시를 사랑합니다.”
편지는 그 서두부터 열정을 띠고 있었다. ‘그대가 쓴 그 살아 있는 위대한 시’를 찬양하고 있었다. 그 열정적인 말들은 그녀의 마음에 불을 댕겼다.
“저는 그 시집(詩集)뿐만 아니라 그대 역시 진심으로 사랑합니다. 그대는 모르실 겁니다. 내가 그대를 뵈올 수 있는 기회를 아깝게 놓쳤다는 것을.”
어느 날 아침이었지요. 켄욘씨가 ‘바렛양을 만나보고 싶지 않은가’라고 말하면서 그대의 집으로 나를 데리고 갔었습니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그날따라 그대의 몸이 심히 불편하다는 얘기여서 그냥 돌아오고 말았습니다. 곧 다시 기회를 마련하려 했으나 만나 뵙지 못한 채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그것은 어쨌든, 그대의 시집은 저에게 있어 진실로 즐겁고 긍지를 느끼게 하는 감격스럽고 이름다운 선물이었습니다.
그대에게 충성을 약속하는 로버트 브라우닝 올림
그 편지의 힘은 대단했다. 엘리자베스의 돌이 되어 버린 가슴에 감성(感性)을 되찾아 준 것이었다. 그녀는 감미로운 행복감에 휩싸였다. 한 번도 본 일이 없는 남자, 그러나 그의 작품은 이미 책을 통해서 알고 있었다. 아직은 그녀의 이름만큼도 널리 알려져 있지 않은 젊은 시인이었다. 편지를 읽고 난 뒤로 그녀는 생기발랄하고 인생을 사랑하는 이 남자가 마치 예전부터 사귀어 온 사이처럼 가까이 느껴졌다. 그녀는 지체 없이 펜을 찾아 들었다.
“브라우닝씨, 저는 진심으로 당신에게 고마움을 전합니다.”
그녀의 답장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겨울은 마치 쥐의 눈을 감기듯 저를 가두어 버렸습니다.”
그녀는 다시 이와 같은 기지에 찬 말을 재미있게 섞어가면서 미묘한 구절로 조심스레 초대(招待)의사를 비쳤다. ‘봄이 오면 만날 수도 있겠지요.’. 그녀는 또 브라우닝의 시를 칭찬해 주고 나서 ‘그대의 호의를 고마워하며 충성을 바치는 엘리자베스 B. 바렛’라고 서명하였다. 그로부터 문학사상 유명한 일화를 남긴 두 시인의 문통(文通)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빅토리아 여왕 시대 초기의 이 두 시인은 시대에 맞는 우아하고 정교한 문장을 쓰고 있지만 감정을 표현하는데 있어서는 현대인 못지않은 솔직성을 보여주고 있다. 두 사람은 날마다, 혹은 하루걸러 서신을 교환했다. 그 숫자는 무려 5백 73통, 그러는 사이에 둘의 관계는 그 정점을 향하여 치달았다.
엘리자베스가 매사에 극도의 제약을 받고 있는데 반하여 로버트 브라우닝의 생활은 자유분방했다. 그는 런던에서 멀리 않은 곳에서 쾌적한 자연을 가까이하고 관대한 부모, 충실한 자매들과 더불어 살고 있으면서 시작(詩作)에 몰두하고 있었다. 부친은 광범위하고 수준 높은 독서가 몸에 밴 학자다운 교양인이었다.
젊은 브라우닝은 고귀한 용모에 타고난 사교성으로 주위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었다. 한때는 외교관의 비서로서 러시아와 이탈리아 등지를 여행했으므로 몸가짐도 매우 훌륭하게 세련된 신사였다. 마지막 외국여행에서 그는 까닭 없는 마음의 공허를 느끼고 한동안 하릴없이 세월을 허송했다. 그는 인생의 방향을 정하고 그것을 향하여 힘차게 항해해 나갈 수 있는 별이 필요하였다.
그때 외유하는 동안 출판된 엘리자베스의 두 권의 시집이 우연히 그의 손에 들어왔다. 그는 책장을 넘기는 사이에 ‘느낌이 새롭고 참신한 일찍이 대해 본 일이 없는 음악성, 풍요한 언어, 우아한 열정, 그리고 진실하고 새로운 용감한 사상’을 발견하였다.
아직까지 어느 한 여인을 사랑해 본 일이 없는, 사랑할 수 없다고 생각해 온 그였다. 그러나 이 여류시인은 그의 젊은 넋을 온통 뒤흔들어 놓았다. 그것은 하나의 충격이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펜을 들어 <그대의 시집뿐 아니라 그대까지도 진심으로 사랑합니다.>하고 대담한 고백을 할 수 있는 충동을 받았던 것이다.
그런 그의 사랑은 청순한 감성과 지성적인 이성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반면 엘리자베스의 감정은 다소 이 선을 넘은 감이 있었다. 그녀는 이미 스스로의 행동적 생활을 포기한지 오래였다.
소녀시절은 여느 소녀와 다름없이 건강한 몸이었고, 물질적으로도 유복한 가정의 귀염둥이 맏딸로 보냈다. 다만 문제가 있었다면 부친의 비정상적인 괴상한 버릇이었다. 부친은 재산가의 자손으로 명문(名門) 해로우와 캠브리지에서 공부한 사람이었는데 가족들에게는 절대적인 폭군으로 군림하고 있었다. 12명의 자녀를 둔 모친은 이미 그러한 남편과의 싸움에 완전히 지쳐 있었고 자녀들은 부친의 명령을 감히 거역할 생각조차 품지 못했다.
그렇다고는 해도 엘리자베스의 소녀시절은 행복했었다. 형제들과 즐겁게 뛰놀았고 가정교사로부터 그리스어와 불어를 배웠으며 거의 탐욕스러워 보일 만큼 열심히 책을 읽었다. 또 감흥이 일면 미숙한 대로 비극적인 시를 쓰기도 했다.
비극은 15세 때 일어났다. 심한 감기와 등에 입은 부상이 쉽사리 낫지를 않았다. 그 동안 모친이 세상을 떠났고 시골의 대저택을 판 부친은 자녀들을 끌고 이리저리 옮겨 다니다 끝내는 이곳 윔폴가에 정착했다. 그 동안에 엘리자베스의 병은 한층 더 악화되어 지금에 이르러선 그처럼 그림자와 같은 침묵의 삶을 보내게 된 것이었다.
바렛 가정의 비극은 따지고 보면 실상은 부친의 자녀에 대한 지나친 압박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도 있었다. 부친은 자녀들에게 결혼을 전적으로 금지했다. 그로 인한 가정 비극이 그칠 새 없었다. 그러나 엘리자베스는 부친의 그 이해할 수 없는 명령을 충실하게 지켰다. 때라서 엘리자베스와 바깥세상과의 담은 더한층 견고해질 수밖에 없었다.
말하자면 로버트 브라우닝은 이 감옥 같은 견고한 엘리자베스의 담장 문을 노크한 최초의 사내였던 것이다. 빠끔히 열린 담장 문을 통해 브라우닝은 매일처럼 편지를 들여보냈다. ‘봄이 오면 만나게 될 것입니다.’ 엘리자베스의 말을 명백한 초대로 확신한 브라우닝은 날이 따뜻해지자 봄이 왔다고 주장하였다. 엘리자베스는 ‘나의 봄은 약간 뒤늦게 온답니다.’고 뒤로 물러서는 척하면서도 그 초대의사를 명백히 밝혔다.
늦은 봄, 5월 어느 화요일 오후, 마침내 브라우닝이 윔폴가 50번지의 엘리자베스가 누워 있는 그 저택의 방문을 열었다. 그 완강하게 닫혀 있던 감옥의 문이 드디어 열린 것이다.
‘그대가 한번 왔을 때, 그대는 영원히 가지 않았습니다.’ 엘리자베스는 편지를 통해 브라우닝의 첫 방문에 대한 느낌을 이렇게 한마디로 표현했다. 로버트의 엘리자베스에 대한 사랑은 이제 단순히 정신적인 영역에만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분별을 잃을 지경이 되어 폭포수처럼 자기의 열렬한 사랑을 고백하였다. 그러한 편지는 엘리자베스를 괴롭혔다. 그녀는 그 편지를 반환하면서 다시는 그런 말을 하지 말아 달라고 따뜻하고 부드러운 말로 부탁하였다. 그들은 일주일에 한 번씩 만남으로 미진한 마음은 편지로 대신했다.
브라우닝의 방문은 엘리자베스에게 힘을 주었다.
‘한여름이 되면 밖으로 산책을 나설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이렇게 대담한 말까지 하였다. 브라우닝의 편지는 이제 사랑하는 사람의 편지로 변해 있었고 엘리자베스도 이제 더 이상 말리지 않았다. 엘리자베스의 유일한 걱정은 자신의 병으로 약한 몸으로 인하여 혹 상대방의 생활을 망치게 되지나 않을까 하는 것뿐이었다.
브라우닝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엘리자베스는 아직도 건강을 회복하지 못했고, 부친에 대한 효성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했다. 벌써 40에 가까운 나이였으나 그녀에겐 부친의 의사를 거역할 용기가 없었다. 폭군은 언제나 자신의 행동으로 인해 몰락하는 법. 가을이 다가오면서 엘리자베스를 이탈리아와 같은 따뜻한 곳으로 전지 요양시키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이 식구들 사이에서 조심스럽게 제의되었다. 그러나 부친은 마지막 결정단계에서 이를 완강히 반대하고 나섰다. 엘리자베스는 크게 실망하였다. 자기에 대한 부친의 사랑은 결국 이기적 소유욕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던 것이다.
마침내 자식을 노예처럼 묶어 놓았던 부친의 쇠사슬이 끊어지는 순간이 온 것이었다. 엘리자베스의 마음속엔, 40여 년에 걸쳐 섬겨 오던 우상이 깨어져 나간 대신 로버트 브라우닝이라는 젊은이가 들어선 것이다. 브라우닝에게 보내는 엘리자베스의 편지가 갑자기 열정을 띠기 시작했다. 참고 참아왔던 모든 말들, 표현하기 주저했던 모든 달콤한 말들이 엘리자베스의 펜 끝에서 그칠 새 없이 흘러 나왔다. 브라우닝은 엘리자베스의 성(姓)에서 따서 그녀를 ‘바’라는 애칭으로 불렀다. ‘그대만의 바’ --
그녀도 편지 끝을 그렇게 마무리하곤 했다. 마음이 그렇다고는 해도 아직도 둘 사이에는 쉽사리 뛰어 넘을 수 없는 장애물이 여럿 가로놓여 있었다. 가장 큰 장애물은 역시 엘리자베스의 건강이었다. 브라우닝은 엘리자베스에게 거실을 아래층으로 옮기라고 충고하였다. 엘리자베스는 자기가 브라우닝에게 부담이 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을 버릴 수 없었다. 더욱 두려운 것은 둘 사이가 혹시 남에게 알려지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만약 부친이 그 사실을 안다면 브라우닝의 편지가 자기에게 전달되지 않을 것은 물론이려니와 일주일에 한 번인 방문조차 허락되지 않을 것이다. 애정이 자라는 것과 정비례로 불안과 긴장도 더해갔다.
다시 봄이 왔을 때, 둘은 이탈리아로 함께 도망치는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엘리자베스는 얼른 용기가 생기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보행연습만은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이제 다시 겨울이 오면 그녀는 전처럼 감옥과 같은 방안에 갇히게 될 것이다.
그 무렵의 일이었다. 부친이 또 변덕을 부렸다.
“오늘 밤 명령이 내렸습니다.”
이렇게 엘리자베스는 브라우닝에게 서두르는 글씨로 9월 10일자 편지를 썼다. 명령이란, 지금 살고 있는 윔폴가의 집을 수리하기 위하여 1개월간 비우도록 준비하라는 것이었다.
“만일 딴 곳으로 옮기게 되면 적어도 1년 동안 결혼은 불가능하게 될 것입니다.”
부친의 변덕은 결과적으로 엘리자베스의 과단성에 불을 지른 것이었다. 브라우닝은 즉시 답장을 썼다.
“기다려온 덕분으로 우리가 얻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우리는 즉시 결혼식을 올리고 이탈리아로 가야 합니다. 지금 곧 결혼허가증을 얻으러 나가겠습니다. 그러면 토요일엔 결혼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번에는 엘리자베스도 주저하지 않았다.
1846년 9월 12일 토요일 아침, 엘리자베스는 충실한 가정부 윌슨과 함께 옛날 친구를 방문하러 간다는 핑계를 대고 집에서 빠져나왔다. 도중에 엘리자베스는 심한 현기증을 느꼈으나 구급약으로 위기를 넘겼다.
교회에 도착해 보니 브라우닝이 먼저 와서 초조하게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예식은 간단하게 끝났다. 그 자리에서 둘은 영원한 부부가 되었다. 기진맥진한 엘리자베스는 일단 집으로 돌아와 기운을 회복한 다음에 도망치기로 하였다. 식구들이 이사할 집을 찾느라고 법석을 하는 사이에 엘리자베스는 차근차근 짐을 챙겼다. 아버지에게는 용서를 구하는 편지를 남겼다.
집을 속히 비우라는 아버지의 명령이 재차 떨어졌다. 더 이상 우물쭈물할 시간이 없었다. 엘리자베스는 남몰래 짐을 밖으로 실어 내보냈다. 9월 19일 결혼일로부터 만 1주일째 되는 토요일, 엘리자베스와 가정부는 애견(愛犬) 플러쉬와 함께 윔폴가의 그 집 층계를 마지막으로 밟아 내려왔다.
신혼은 자못 목가적(牧歌的)이었다. 파리로, 피사로, 플로렌스로, 로마로...... 유명한 관광지와 휴양지로 여행을 하며 보냈다. 둘 사이에는 사랑의 따뜻한 불이, 평화와 시(詩)가 그리고 무엇보다도 물샐틈없는 우의가 있었다. 엘리자베스의 건강은 호전되어 갔다.
1849년 봄에는 아주 잘 생긴 아들이 태어나 두 사람의 행복을 더한층 큰 것으로 만들어 주었다. 엘리자베스의 부친은 끝내 딸을 용서하지 않았다. 엘리자베스가 보낸 편지들은 봉함도 뜯기지 않은 채 되돌아 왔다. 브라우닝은 조금도 변함없는 애정으로 엘리자베스로 하여금 사랑과 광명의 세계에서 살도록 보살펴 주었다.
그들이 플로렌스에 있던 무렵인 6월 어느 날 저녁, 엘리자베스의 기관지염이 갑자기 악화되었다. 즉시 의사가 불려왔다. 브라우닝은 엘리자베스를 품에 안고 있었다.
‘......그리고는 언제까지나 미소를 지으며 행복스럽게, 소녀처럼 청순한 모습으로 내 품에 안긴 채 내 뺨에 머리를 기대고 몇 분 지나지 않아 숨을 거두었다.’
브라우닝은 후에 엘리자베스의 최후를 이렇게 말했다.
엘리자베스 바렛 브라우닝은 그의 위대하고도 청순한 사랑을 시로 남겨 놓았다. 이 불후의 연가(戀歌)는 신혼시절 이탈리아에서 브라우닝의 주머니에 넣어 준 것으로서 여성이 영어로 사랑을 읊은 최고의 시다.
내 그대를 얼마나 사랑하였지, 말씀드리오리다.
감정이 시야(視野)에서 벗어나 생의 목적과 은총의 극치를 찾을 때
내 영혼이 도달할 수 있는 그 깊이와 그 넓이와 그 높이까지
나는 사랑합니다.
태양과 촛불, 일상생활의 가장 소박한 욕구를 나는 사랑합니다.
자유롭게 사랑합니다. 사람들이 정의를 추구하는 것같이 순결하게 사랑합니다.
그들이 찬양에서 물러서는 것 같이 오래된 슬픔 속에서 살려온 정열과
어린 시절의 신앙으로 나는 사랑합니다.
나의 잃어버린 성자(聖者)들에게
소실당한 것 같이 생각되는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내 전 생애의 숨결, 미소, 눈물로 사랑합니다.
그리고 신이 허락하신다면 죽은 후에 더욱 사랑하오리다.
엘리자베스의 사랑의 시를 한 편 더 소개하겠다.
참으로 그러할까요? 이 자리에 누워 죽고 만다면
내가 없으므로 그대는 생의 기쁨을 잃으실까요?
무덤의 습기가 내 머리를 적신다고 당신에게 햇볕이 더 차오리까?
그러리라는 말씀을 글월로 읽었을 때
님이여, 나는 놀랐습니다. 나는 그대의 것이 어니,
그러나 님에게야 그리 끔찍하오리까? 나의 손이 떨리는 때라도
님의 술을 따를 수 있사오리까? 그렇다면 님이여,
죽음의 꿈을 버리고 생의 낮은 경지를 다시 찾으오리다.
사랑! 나를 바라보소서. 나의 얼굴에 더운 숨결을 뿜어 주소서.
사랑을 위하여 재산과 계급을 버리는 것을
지혜로운 여인들이 이상히 여기지 않는 것같이,
나는 일을 위하여 무덤을 버리오리다.
그리고 눈앞에 보이는 고운 하늘을 그대 계신 이 땅과 바꾸오리다.』
-(인용시 피천득 역)-
[출처] 오천석 : 실화집 <노란 손수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