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7년 8월22일, 춘성스님은 세수 87세 법납 74세로 육신의 옷을 벗었다. 서울 화계사서 봉행된 영결식에는 당시 조계종 종정 서옹 스님을 비롯 운허·월산·월하·혜정·성준스님 등 수 천명의 추모인파가 구름떼처럼 몰려와 춘성스님을 애도했다.
당시 서옹 스님의 영결법어다. “춘성 노사 노니신 곳, 삼세의 불조도 영 볼 수 없도다. 이 세상에 걸림없이 한바탕 진탕지고 어데로 가시는고. 서울 가두에 전신을 나투시도다. 돌()…” 애도문은 끝이 없다. “스님의 참된 면목은 푸른 산, 흐르는 물이며 흰 구름 높은 하늘이옵니다…스님의 법음이 항상 사바에 머물고 스님이 시적(示寂)하신 깊고도 높은 뜻은 길이 불멸할 것입니다.(당시 총무원장 혜정스님 조사 中)” “스님은 필시 16성 5백성상 가운데 한 분이 말세에 권세(權世)로 하신 아라한이 아니신가 하고 생각해 왔습니다…(송담스님 조사 中)”
많은 이들이 이토록 애도했던 춘성스님(1891~1977)은 근현대 불교 격랑의 중심지에서, 스님으로 수행자로 도봉산 망월사 주지로 주어진 길을 묵묵히 걸어갔던 대자유인이다. 만해 한용운스님의 상좌인 그는 백용성스님과 함께 <화엄경> 사상을 웅변으로 전했던 ‘화엄법사’로도 통한다. 덕숭산 끝자락에서 장좌불와하던 고집스런 수행자로 시대의 선승 만공회상에서 치열하게 참선수행을 했던 간화선 수행자이기도 하다. 도봉산 망월사에선 수좌들을 매섭게 지도했던 어른으로 유명하다.
조계종 전 교육원장 무비스님은 망월사 일화를 들려준다.
“목에 총을 들이대고, 선지식 한명을 고르라면 춘성스님을 꼽겠습니다. 참으로 정진을 무섭게 하시는 분이었습니다. 당시 70대 후반의 나이임에도 대중들과 똑같이 정진하고 취침시간이 되면 탁자 밑에서 목침 꺼내고, 배 위에 방석 덮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절대 이불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망월사에는 그 때문에 이불이 없습니다.”
서대문형무소에서 만해스님으로부터 ‘조선독립의 서’를 받아서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전달케 한 장본인도 춘성스님이다. 1919년 3월1일 오후 2시, 서울 종로의 태화관에서 열린 독립선언 기념식에서 기념연설을 하고 만세삼창을 선도한 이유로 만해스님은 서대문형무소에 갇혔다. 만해스님의 옥바라지를 위해 상경한 춘성스님은 거처를 망월사로 정하고 서대문형무소를 드나들면서 만해스님을 시봉했다.
당시 망월사에 머물면서 추운 겨울에도 “스승이 추운 감방에서 떨고 있는데 제자인 내가 어찌 따듯한 방에서 잠을 자겠느냐”고 냉골에서 참선하며 밤을 지새웠던 일화는 유명하다. 이윽고 그 해 7월 만해스님이 저술한 ‘조선독립의 서’를 휴지에 써서 똘똘 말고 종이끈으로 만들어 옷의 갈피에 숨겨 춘성스님에게 전달됐고 이는 범어사의 한 스님을 통해 상해 임시정부로 전달됐다. 임시정부의 기관지인 <독립신문>의 1919년 11월4일자에는 춘성스님에 의해 임시정부에 전달된 ‘조선독립의 서’ 전문이 게재되기도 했다.
춘성스님이 ‘화엄법사’로 불린 일화도 흥미롭다. <화엄경>을 거꾸로 외웠다는 저간의 구전이 나온 것은 백용성스님과 함께 한 강의회에서 비롯됐다. 춘성스님은 백용성스님의 대각교당의 <화엄경> 법사로 나서면서 어린이 대상 대각일요법회서 교사로도 활동했다. 1928년 6월 <월간 불교>에도 춘성스님의 이름이 거명됐다.
“나에 대한 일체의 그림자도 찾지 말라”는 유언에 따라 춘성스님에 대한 조명은 지금까지 없었다. 춘성문도회가 입적 4주기가 되던 해인 1981년, 스님이 마지막으로 주석했던 성남 봉국사에 부도와 비석을 세운 것이 전부였다.
최근 효림스님이 봉국사 주지로 취임하면서 춘성스님을 찾는 움직임이 시작됐다. 한용운, 백용성 등의 평전을 저술한 근현대불교학자 김광식 부천대 교수가 팔을 걷었다. 김 교수는 2년여간 문헌자료 검토와 분석을 통해 춘성스님과 인연있는 스님과 재가자 등을 찾아다니면서 증언과 수많은 일화들을 채록, 마침내 그 일대기를 결집하게 됐다.
“여기 무애도인이 있다. 그의 이름은 춘성이다. 그러나 춘성은 역사에서 사라졌다. 그렇지만 제도권 역사에서 사라졌을 뿐, 역사 그 이면 무대에서 사라진 것은 아니다…이 책은 지금껏 지하의 우물 속에 묻혀 있었던 춘성을 지상으로 끌어 올리기 위한 첫 번째 마중물이 되고자 한다.” 김 교수가 <춘성>을 펴내는 말이다.
출처 : 불교신문/하정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