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수의 전삼삼후삼삼(前三三後三三)
항주 무착 문희(無著文喜)는 오대산 화엄사(華嚴寺)로 가다가 금강굴(金剛窟)에 들러 예를 갖추려고 했는데, (거기에서) 소를 끌고 가는 노옹을 만났다. (노옹은) 무착스님을 맞이하며 절로 들어갔다.
노옹이 말하였다.
“근래에 어디에서 오는가?”
“남방(南方)입니다.”
“남방에서는 불법을 어떻게 주지(住持: 간직)하는가?”
“말법시대의 비구들이 계율을 받드는 정도입니다.”
“대중은 얼마나 되는가?”
“삼백 내지는 오백쯤 됩니다.”
무착스님이 도리어 물었다.
“이곳에서는 불법을 어떻게 주지합니까?”
“용과 뱀이 뒤섞이고 범부와 성인이 함께 머문다(龍蛇混雜凡聖同居).”
“대중은 얼마나 됩니까?”
“전삼삼(前三三) 후삼삼(後三三)이다.”
날이 늦어지자 마침내 노옹에게 물었다.
“하룻밤 쉬어갈 수 있겠습니까?”
“그대에게 집심(執心: 붙드는 마음)이 있다면 묵을 수 없다.”
“(저) 문희(文喜)에게는 집심이 없습니다.”
“그대는 일찍이 계율을 받지 않았는가?”
“계율을 받은 지 오래입니다.”
“그대에게 만약 집심이 없다면 계율을 받들어서 어디에 쓰려는가?”
무착스님이 하직인사를 하고 물러나니,
노옹이 동자로 하여금 배웅하게 하였다.
무착스님이 동자에게 물었다.
“전삼삼 후삼삼은 얼마나 됩니까?”
동자가 ‘대덕(大德)이시여!’하고 부르니 무착스님이 ‘네!’하고 대답을 했다.
동자가 말했다.
“얼마나 됩니까?”
무착스님이 다시 물었다.
“여기는 어떤 곳입니까?”
“이곳은 금강굴(金剛窟) 반야사(般若寺)입니다.”
무착스님은 처연(悽然: 슬퍼하다, 은혜를 갚고자 하다)히 이 노옹이 다시 볼 수 없는 문수라는 것을 깨달았다. 곧 동자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특별히 한 마디를 청하였다.
동자가 게송으로 말하였다.
얼굴에 무진(無瞋: 성냄이 없음)이면 공양구(供養具: 공양의 그릇)이고
입안에 무진(無瞋: 성냄이 없음)이면 묘한 향기를 토하고
마음 안에 무진(無瞋: 성냄이 없음)이면 진보(珍寶: 진귀한 보배)이고
때가 없고 물들음이 없으면 진상(真常: 참되고 항상하다)이다.
말을 마치고서 균제동자와 절이 다 함께 (모습을) 감추었다.
杭州無著文喜禪師。(嗣仰山)往五臺華嚴寺。至金剛窟禮謁。遇老翁牽牛行。邀師入寺。翁曰。近自何來。師曰。南方。曰南方佛法如何住持。師曰。末法比丘少奉戒律。曰多少眾。師曰。或三百或五百。師卻問。此間佛法如何住持。曰龍蛇混雜凡聖同居。師曰。多少眾。曰前三三後三三。日晚。遂問翁。擬投一宿得否。曰汝有執心在。不得宿。師曰。文喜無執心。曰汝曾受戒否。師曰。受戒久矣。曰汝若無執心。何用受戒。師辭退。翁令童子相送。師問童子。前三三後三三是多少。童召大德。師應諾。童曰。是多少。師復問。此為何處。曰此金剛窟般若寺也。師悽然悟彼翁者是文殊也不可再見。即稽首童子。願乞一言為別。童說偈曰。面上無瞋供養具。口裏無瞋吐妙香。心裏無瞋是珍寶。無垢無染是真常。言訖。均提童子與寺俱隱
◆ 전삼삼후삼삼에 대한 해석은 다양하다.
1) 삼삼은 일정한 수량이 아니고, 전과 후는 피(彼) · 차(此)와 같으니, 전도 삼삼이요, 후도 삼삼이란 뜻으로 피차가 같음을 의미하는 말.
2) 삼삼은 한없는 수량을 의미하며, 곧 전후삼삼이란 뜻은, 전과 후는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고, 무수 무한한 뜻을 표시한 말.
3) 앞으로 삼보, 뒤로 삼보 결국 제자리이다. 인생은 결국 제자리이다.
4) 전삼삼 후삼삼이란 ‘인간이 태어나 깨치기 전의 과거, 현재, 미래의 삼계를 이른다. 또 욕계, 색계, 무색계인 삼계도 전삼삼’이라 한다. 후 삼삼은 깨친 후의 ‘과거, 현재, 미래와 욕계, 색계, 무색계’가 삼계인데 이것을 후삼삼이라 한다.
5) 3 + 3 = 6, 3 + 3 = 12 연기이다.
| 〈전등록〉 13권 자복화상전에 “옛사람이 전삼삼(前三三) 후삼삼(後三三)이라고 말한 뜻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에 선사는 “그대 이름이 무엇인가?” “아무개입니다” “차나 한잔 하게”라고 대답하고 있다. 삼삼(三三)은 보통의 숫자가 아니라 한정된 차별의 숫자개념을 초월한 무한의 숫자를 말한다. 또 〈조당집〉 12권 용회(龍回)화상전에는 “옛 사람이 전삼삼(前三三) 후삼삼(後三三)이라고 말했는데 무슨 뜻입니까?”라는 질문에 “서산(西山)에는 해나 뜨고 동산(東山)에는 달이 진다.”라고 대답하고 있다. 고정관념으로 사량 분별 하지 말라는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