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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은 왜 6년의 고행 끝에 그 길을 내려놓으셨을까요?

작성자향상일로|작성시간26.06.22|조회수23 목록 댓글 2

부처님께서는 6년 고행 끝에 이런 고행을 고집할 이유가 없다는 사실을 스스로 자각하셨습니다.

그래서 몸을 회복하기 위해 미음을 드시고, 냇가의 흐르는 물에 몸을 씻으셨습니다.

그것을 본 동료 수행자들은 곧바로 ‘고타마는 수행을 포기했다.’ 라고 단정해 버렸습니다.

당시에는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는 몸에 대한 어떤 집착도 가져서는 안 된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고타마가 원칙대로 혹독한 고행을 할 때는 동료 수행자들이 그를 존경하며,

‘고타마는 반드시 깨달을 것이다.’ 하고 큰 기대를 걸었습니다.

 

경전의 기록을 보면, 부처님께서는 꼼짝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 정진하셨기 때문에 몸에 이끼가 끼고 벌레가 생기기까지 했다고 합니다. 새가 와서 그 벌레를 쪼아 먹어도 전혀 미동이 없었다고 합니다. 부처님께서는 움직이지 않고 몸에 이끼까지 끼어 있으니, 멀리서 보면 꼭 동상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아이들은 ‘저 사람은 죽었다.’, ‘아직 살았다.’, ‘곧 죽을 거다.’ 하며 내기를 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살았는지 죽었는지 확인하려고 흙덩이를 던져 보기도 하고, 어떤 아이는 가까이 다가와 나뭇가지를 귀에 꽂아 보며 죽었는지, 살았는지를 확인해 보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부처님께서는 통증을 지그시 견디며 조금도 움직이지 않으셨습니다. 이런 기록이 남아 있을 만큼, 그 정진은 극한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누구도 흉내 낼 수 없을 정도로 6년을 고행했음에도 불구하고, 깨달음은 오지 않았습니다. 그때 마왕 마라가 부처님께 속삭였다고 합니다.

 

‘깨달음이라는 말은 있지만, 실제로 그런 경지는 없는 것이다. 열반이라는 말은 있어도, 그것을 증득한 사람은 없다. 이렇게 정진하다가 죽어 버리면 아무 의미도 없다. 그러니 수행을 그만두고 집으로 돌아가 신에게 제사를 지내라. 그러면 너는 인도 전역을 통일하는 제왕, 즉 전륜성왕이 될 것이다. 어서 집으로 돌아가라.’

 

경전에서는 이런 유혹을 마왕의 이름으로 표현합니다. 마왕의 이름은 ‘파순’이라고도 하고, ‘마라’라고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마왕은 기독교에서 말하는 사악한 ‘마귀’와는 다릅니다. 천상 가운데 인간 세계와 가장 가까운 곳이 사왕천이고, 우리가 절에 들어갈 때 보는 사천왕문이 바로 그것을 상징합니다. 그 위로 도리천, 야마천, 도솔천, 화락천이 있고, 가장 마지막이 타화자재천입니다. 이렇게 욕계에는 여섯 개의 천상이 있습니다.

 

이 가운데 가장 좋은 천상, 즉 자기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이루어지고 자유자재로 바꿀 수 있는 곳이 타화자재천입니다. 그곳의 왕을 자재천왕이라 하는데, 이를 흔히 마왕이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나쁜 짓을 하는 존재라는 뜻이 아닙니다. 다만 이 마왕은 해탈과 열반을 증득하는 일을 방해합니다.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을 막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욕계의 질서를 유지해야 하는 최고 책임자이기 때문에 그런 의미에서 마왕이라 불리는 것입니다. 마왕의 유혹은 부처님께서 출가하실 때도 나타났습니다.

 

‘왕자로 태어나 이렇게 편안하게 살 수 있는데, 왜 숲 속에 들어가 독충과 야생 동물 사이에서 고생하며 살려고 하느냐? 쓸데없는 생각 말고 빨리 집으로 돌아가라. 그러면 너는 인도의 전륜성왕이 될 것이다.’

 

이런 속삭임이 일어날 때마다, 부처님께서는 ‘그런 소리 하지 마라. 나는 용맹 정진하여 해탈을 증득할 것이다.’라고 스스로 다짐하며 다시 마음을 바로 세우셨습니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이것은 마왕이라기보다 ‘내면의 소리’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출가를 결심해도 마음 한구석에서 ‘그래도 결혼해서 사는 게 낫지 않겠느냐?’ 하는 생각이 올라오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러나 부처님에 대한 기록을 남긴 사람들은, 부처님이 이런 내면의 갈등을 겪는다고 표현하는 것이 어울리지 않는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그런 마음의 흔들림을 모두 ‘마왕의 유혹’이라는 형식으로 설명한 것입니다. 경전 곳곳에 마왕의 유혹이 반복해서 등장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6년 동안 죽기 살기로 정진했는데도 깨달음을 성취할 가능성이 보이지 않는다면, 우리 역시 ‘정말 깨달음이라는 게 있기는 한 걸까?’라는 의문이 들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도 마찬가지로, ‘정말 깨달음의 경지가 있을까?’ 하는 번뇌가 일어났던 것입니다.

 

▶고행 끝에서 발견한 제3의 길, 중도

 

그러나 부처님은 다시 결심을 굳히십니다. 그리고 마왕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파순이여, 썩 물러가라.

나는 네가 가진 군대의 실체를 안다.

욕망이 너의 군대이고, 성냄이 너의 군대이며, 어리석음이 너의 군대이다.’

 

인도 문화에는 ‘문자풀(muñjamāyā)’이라는 풀이 있다고 합니다. 이 풀을 입에 문다는 것은, 우리가 말하는 백기를 드는 것처럼 항복을 뜻합니다. 그래서 경전에는 ‘내가 문자풀을 입에 물 것 같은가? 아니다.’ 하고 결심하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이처럼 6년 동안 고행하던 젊은 수행자에게 굳은 결심이 있으면서도, 그 이면에는 번뇌가 끝없이 일어나는 것은 아주 정상적인 일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경전 기록을 보면, 싯다르타가 고행을 포기했다고 여겨진 행위는 크게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목욕을 한 것이고, 둘째는 유미죽을 먹은 것이며, 셋째는 길상초를 깔고 앉아 수행한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마지막 정진에 들어가실 때, 마침 한 목동이 풀을 베고 있었습니다. 그 풀은 억새와 비슷하지만 억새보다는 훨씬 부드러운 풀입니다. 이 지역에서는 그 풀로 새끼를 꼬거나 돗자리를 만드는데, 우리로 치면 짚과 비슷하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우리도 시골에서 바닥에 짚을 깔고 앉지 않습니까? 부처님도 마른풀을 한 아름 깔고 그 위에 앉아 명상을 하셨습니다. 이 풀을 길상초라고 하고, 인도말로는 ‘쿠사’라고 합니다. 내일 이동하면서 쿠사를 한 번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부처님은 비단 방석을 깔고 수행하신 것이 아니라, 풀을 깔아 자리를 마련하셨던 겁니다.

 

냇물에서 목욕을 했다는 것도 몸을 치장하려고 한 것이 아닙니다. 쓰러졌다가 다시 일어나 미음을 드신 것도, 우리가 오랜 단식 뒤에 곧바로 밥을 먹지 않고 미음으로 몸을 회복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러나 당시의 전통적 수행 관점에서 보면, 이것은 분명 고행을 포기한 것으로 보였을 것입니다.

 

부처님은 이렇게 몸과 건강을 회복하신 뒤,

자신이 발견한 중도의 길로 다시 정진에 들어가셨고,

마침내 깨달음을 얻으셨습니다. 이곳에서의 시행착오가 없었다면 깨달음도 없었을 것입니다.

이곳은 잘못된 길을 간 장소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스스로 그 잘못을 자각한 장소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바로 이곳이 ‘중도’를 발견한 곳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깨달음을 증득한 곳은 보드가야지만, 이곳에서는 고행을 통해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분명히 자각했고, 욕망을 따르지도 억제하지도 않는 제3의 길, 곧 중도를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그 중도의 수행을 통해 마침내 니르바나를 증득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출처 : 법륜 스님 정토회 스님의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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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初心 | 작성시간 26.06.22 new 댓글 첨부 이미지 이미지 확대
  • 작성자향상일로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6.06.22 new 고맙습니다. 청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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