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다가 살았던 시대는 이른바 ‘차축의 시대’가 인류의 정신사에서 시작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때였다. 당시 인도는 사회적으로나 정신사적으로 격변의 시대였다. 아리안 족들이 인도에 침입한 후 처음 펀잡 지역에서 정착하다가 점차 동진하여 오늘날의 갠지즈강 중부지역으로 이동하면서 많은 소규모 왕국을 건설했다. 그들 왕국 사이의 끊임없는 전쟁은 사회적 혼란을 야기했지만 동시에 다른 지역과의 교류도 가능케 했다. 이를 통해 상인계층이 교역을 통해 부를 축적할 수 있었을 것이다.
문화적, 종교적 측면에서의 변화는 보다 근본적이었다. 당시 인도사회에서는 바라문 계급의 종교적 이념이 지배적 이데올로기였다. 이들 바라문들의 사상은 후대에 불교가 수용했던 몇몇 핵심적인 관념을 발전시켰다. 예를 들어 모든 존재가 생과 사, 재생과 재사의 끊임없는 윤회과정 속에 있으며, 재생의 원인은 업이라고 하는 관념이다. 바라문계급은 제의 의례를 통한 업의 정화에 의해 보다 나은 재생이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이런 관념의 사회적 대응물은 말할 것도 없이 카스트 제도였을 것이다. 보다 나은 재생에 만족하지 못하고 완전히 윤회로부터 해탈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자아의 본질이 내적 감관의 조정자로서 모든 생멸하는 현상의 배후에 있는 불변하는 아트만이며, 그것이 궁극적으로 대우주의 본질과 동일하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당시 붓다를 위시한 사문들은 이런 바라문 사상과 비판하고 수용하면서 자신들의 새로운 종교적 이념을 추구해 나갔다.
이렇게 말하면 마치 불교가 바라문 사상의 아류라고 말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게 볼 필요는 없을 것이다. 불교의 연기설이 일반적으로 전제하듯이, 무릇 아무리 독창적이고 위대한 사상이라고 해도 적절한 선행조건이 채워지지 않으면 출현하지 못한다고 한다면, 당시 인도의 바라문들의 종교 관념은 불교적 사유가 발전되어 나올 수 있었던 적절한 토양을 제공했다고 말할 수 있다. 나아가 불교는 이들 바라문들의 핵심적 관념을 받아들였지만 이를 불교적으로 변용해서 해석했다.
불교가 바라문 전통으로부터 받아들인 업과 해탈이라는 두 가지 관념의 불교적 재해석을 예로 들어 보자. 우리 불교도들은 업을 전적으로 윤리적 의미에서 해석하는데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당시 인도사회에서 그 해석이 가진 혁신적 의미를 잘 이해하지 못한다. 하지만 붓다가 업을 더 이상 제의적 행위와 관련시키지 않고 오로지 윤리적 행위라는 의미에서 사용했을 때 사람들이 느꼈을 충격을 상상해 보라! 업이 재생의 원인이라는 주장은 일정 부분 수용되었지만, 이제 업은 전혀 다른 구제론적 의미를 얻게 되었다. 오직 스스로의 윤리적 행위만이 자신을 청정케 한다고 하는 붓다의 주장이 가진 중요성은 ‘차축의 시대’라는 표현이 보여주는 인문적 세계로의 전환의 의미를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일 것이다. 바라문은 태어남에 의해서가 아니라 윤리적 행위를 통해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하는 붓다의 지적도 카스트적 맥락에서 보면 가히 혁신적인 주장이었을 것이다. 아니 이것은 단순한 해석의 문제가 아니라 불교 승려들이 승단 내에서 실제 살아가는 방식이었다. 그들은 바라문 출신이건 수드라 출신이건 원칙적으로 승단 내에서는 평등했다.
두 번째로 붓다가 바라문들의 해탈의 이상을 어떤 방식으로 변용해서 수용했는지를 보자. 해탈은 불교에서도 최고의 가치이지만 그것에 이르는 길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제시되었다. 바라문 사상에서 해탈은 자신의 본질이 모든 사유와 언어를 초월한 아트만이라는 사실의 인식에 의해 얻어진다. 그들은 아트만의 인식이 인지적 방식, 즉 주-객의 방식으로는 파악될 수 없다고 하면서 그를 인식하기 위해 비이원적인 명상의 방식을 제시했다. 붓다가 아마 6년간의 수행기간 동안에 배웠다고 하는 명상은 이런 종류의 체험으로 이끄는 것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명상이 가진 커다란 문제는 주-객의 완전한 해소가 단지 죽음 이후에만 가능하다고 하는 점이다. 죽은 후에야 아트만의 본질을 이해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우리 자신의 본질이 그런 불이적인 아트만이라고 어떻게 알 수가 있다는 말인가? 그것은 믿고는 싶겠지만, 근거없는 독단적 주장에 불과할 것이다. 우리는 이런 반성이 ‘삼명경(三明經, Tevijja Sutta: 장부 제13경)’에서 제기되고 있음을 본다. 여기서 붓다는 비록 그들이 브라만을 보지는 못했고 그가 있는 곳을 알지도 못하지만 브라만과 합일하는 길을 알고 있다고 주장하는 바라문들을 마치 장님이 장님을 인도하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비판하면서, 그들은 마치 자신이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여인과 사랑에 빠졌다고 떠들지만 그 여인과 만난 적이 없기 때문에 그녀가 어디 사는지 또는 그녀의 신상에 대해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 사람과 같다고 비교하고 있다.
이런 비판은 붓다가 자신의 해탈경험의 내용이 바라문 사상의 독단적인 주장과는 다른 것임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불교의 명상을 다른 것과 구별시켜주는 요소는 무엇일까? 그것이 근래 우리나라에서 ‘마음 챙김’ 등으로 번역되고 있는 ‘정념’이라는 점은 의심할 여지가 없어 보인다. 이미 정념은 붓다의 최초의 설법으로 말해지는 ‘전법륜경’에서 8정도의 교설에서 제시되고 있다. 붓다가 예전에 그와 같이 수행했었던 다섯 비구들에게 자신의 깨달음의 경험을 전수하기 위해 집중적으로 가르쳤을 때, 그가 의지했던 것은 바로 정념과 삼매수행이었다. 삼매를 ‘마음이 하나의 대상에 몰입한 상태(心一境性)’라고 본다면, 이는 어떤 점에서 바라문 사상에서 말하는 주-객의 불이성과 비슷한 측면을 갖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차이는 불교적 삼매가 정념에 의해 인도된다는 사실에 있다. 정념이 대상의 인식과 동시에 인식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아는 것이라면 이것이 주-객 불이의 삼매 상태에 적용되었을 때 삼매의 내용이 변화되었으리라는 것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업의 숙명적 성격 배격
윤리적 행위로 재해석
경험 추상화 안 시키고
여실지견 중요성 강조
이런 삼매의 성격에 의지하여 붓다는 기존의 바라문 사상이 제시했던 불이적 체험의 사변성을 비판했다고 생각되지만, 붓다의 사상적 위대성은 자신의 깨달음을 개념적 분석을 통해 인지적으로 접근가능하게 설명했다는 점에 있다. 다시 말해 언어적, 개념적 범주들을 분석적으로 통찰함에 의해 해탈의 경험이 가능하다는 점을 보여준 점인데, 이는 당시 바라문 사상에서는 가능하지 않았던 것이다. 우리는 이것이 교설로서의 붓다의 가르침으로 불교의 독자적인 선정수행과 마찬가지로 번뇌의 소멸과 열반의 획득으로 이끈다고 선언되었음을 알고 있다. 이제 어떤 점에서 교설이 번뇌의 소멸로 이끄는지를 보자.
붓다의 가르침은 다양하지만, 가장 핵심적인 것은 무아설과 연기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들 사상은 앞에서 말한 ‘개념적 범주’로서의 5온이나 12처, 18계 등의 교설과 관련되어 설명되고 있다. 비록 후대의 불교문헌이긴 하지만 ‘중변분별론’이 보여주듯이, 이들 여러 교설은 ‘무아’의 의미를 다양한 측면에서 설명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무아의 사상이 어떤 점에서 붓다의 깨달음의 세계를 전해주고 있는가를 파악하는 것이 관건일 것이다.
‘무아상경’에서 붓다는 5온이 무상하고 따라서 고통스럽고 따라서 무아라는 방식으로 무아의 논증을 이끌어낸다. 여기서 무아의 반대로서의 자아는 바라문 사상에서 말하는 불변하는 아트만이다. 이것은 일종의 환원적 방법으로 각각의 5온 속에 어떤 불변한 것도 없다고 관찰함으로써 자아와 동일시된 5온에 대한 집착을 제거하는 방식이다. 실제 경은 이런 관찰의 결과 5온에 대한 탐욕이 소멸하고 마음이 해탈했다고 말한다. 붓다가 제시했던 또 다른 방식은 우리의 의식(識)이 감관과 대상에 의존하고 있다는 18계의 설명이다. 이것은 의식은 반드시 대응하는 대상을 가져야만 한다는 것으로서 이해되고 있는 한, 서양철학에서 후썰이 의식과 대상의 지향적 관계라고 말한 바로 그것일 것이다.
이 설명의 관점에서 지향적 대상을 초월한 존재라고 규정된 아트만은 설 자리가 없을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순전히 사변적이고 추상적인 존재로 간주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식과 대상 간의 관계가 포함되어 설해지고 있는 12지 연기설의 맥락에서도 아트만의 존재가 부정되듯이 말이다.
삼매와 명상수행을 통해 의식의 상태를 변화시킬 수 있듯이, 분석적 방식으로 심신의 구성요소 속에 지속적이고 단일한 아트만과 같은 그런 존재가 없다고 인식했을 때, 우리는 보다 근본적인 점에서 갈애의 뿌리 자체를 제거할 수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갈애의 대상이 실은 우리의 욕망의 투사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는 통찰은 동시에 의식 자체가 대상과 지향적 관계에 있다는 인지구조 자체에 대한 근본적 통찰을 함축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이제 문제는 대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대상을 향한 우리의 마음에 있으며, 마음을 변화시키는 것이 가장 중요한 문제라는 것이 분명할 것이다. 불교는 이와 같이 마음의 변화를 통해 사물을 여실히 볼 때 열반의 증득이 이루어진다고 보는 구제론인 것이다.
▲안성두 교수
필자는 그것이 명상이든 교설이든 붓다의 가르침이 보여주는 독창적 요소는 이와 같이 경험을 추상화시키지 않고 있는 그대로 아는 것의 중요성을 보여준데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아무리 거창한 철학적 체계라고 해도 경험의 추상화에 의거해 있다면 결국 언어게임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대승불교를 포함해서 후대의 모든 불교학파들은 여실지견의 의미를 재해석함에 의해 그들이 붓다의 본래 정신을 대변하고 있다고 주장할 수 있었을 것이다.
출처 : 법보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