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교육은 이중적인 잣대로 평가받고 있다. 미국의 대통령이나 교육부 장관은 한국의 교육과 교사에 대한 존경을 본받으라고 말하는데, 정작 우리 자신들은 교육이 뿌리부터 흔들리고 있다는 불안감을 공유하고 있다. 그 중 어떤 평가를 받아들일 것인가 하는 문제는 단순하지 않지만, 확실한 사실은 이 땅에 존경받는 교사나 교육자가 점차 사라지고 있다는 점이다.
교육자는 대체로 학교와 같은 교육기관에서 교육을 담당하고 있는 교사를 지칭하는 개념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교사에 한정되는 개념은 결코 아니다. 절집에서 사부대중을 바른 길로 인도하고자 하는 스님들도 당연히 교육자이고, 어느 날 길을 가다가 문득 내게 가르침을 준 낯모르는 사람도 교육자일 수 있다. 또한 가정에서 양육과 함께 교육을 담당하고 있는 부모도 중요하고 핵심적인 교육자에 속한다. 그럼에도 왜 우리는 그 많은 교육자들을 놔두고도 존경받는 교육자가 없거나 극히 드물다고 쉽게 말하게 되는 것일까?
이 시점에서 우리는 인류 역사에서 최고의 교육자로 인정받아온 선현들에 대한 그리움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그 대표적인 4대 성인 중에서도 석가모니 붓다는 여러 가지 면에서 최고의 교육자로 꼽힌다. 그 이유는 불교(佛敎)라는 개념 속에 ‘붓다의 가르침’이라는 의미가 담겨있을 뿐만 아니라, 붓다가 깨침을 얻은 후에 바로 가르침의 길로 들어서지 않고 있다가 범천의 간절한 요청을 받은 후에야 ‘중생을 향한 자비심과 깨달은 이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본 결과’로서 비로소 교육이 등장하는 특별한 사연 때문일 것이다.
이처럼 역사적으로는 이미 충분히 검증된 교육자로서의 붓다가 오늘의 우리에게는 어떤 의미로 다가올 수 있을까? 그 시대와 우리의 시대가 같지 않고 교육이 한 사회나 개인의 삶 속에서 차지하는 비중이나 위상이 다를 수밖에 없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런 질문은 꼭 필요하다. 사회적ㆍ역사적 배경의 차이는 자본주의적 삶의 양식이 보편적으로 확산된 한국사회의 구조적 특징과 연계되면서 교육자로서의 붓다와 스님의 위상에 대한 무관심 또는 의구심을 불러일으킬만한 상황으로 우리를 내몰 수 있는 가능성도 있다.
이런 현실 인식을 받아들인다는 전제를 가지고도 여전히 붓다는 우리 시대의 교육자로서의 충분한 자격을 지닐 수 있다는 주장을 펼치기 위해서는 먼저 그가 어떤 점에서 훌륭한 교육자인지를 보여주어야만 한다. 이 작업은 어찌 보면 매우 쉬운 일이지만, 다른 한편 매우 어려운 작업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치밀한 재해석과 현실 적용의 과정을 반드시 거쳐서 설득력을 담보해낼 수 있는 실질적인 내용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교육자는 먼저 그 스스로가 가르칠 만한 내용을 갖고 있어야 한다. 그 내용은 다양하지만, 우리가 진정한 교육자라고 평가할 수 있으려면 그 내용이 보편적 진리를 담고 있어야 할 것이다. 물론 모든 교육자에게 온전한 진리를 알고 있어야 한다고 요구할 수는 없기 때문에 최소한 그가 ‘진리를 추구하고자 하는 열망’과 그 ‘추구 과정에서의 일정한 앞서감’을 보여줄 수 있기를 기대하고자 한다. 그런 측면에서 붓다는 모든 교육자들의 스승으로 평가받기에 손색이 없다. 붓다는 깨침을 통해 다르마를 온전히 알고 있었고 그런 점에서 그는 완전한 ‘다르마를 통한 열반의 선생(先生)’으로서의 요건도 충분히 갖추고 있었다.
이 진리의 요소는 개인으로서의 자신과 사회적 연기망 속에 존재하는 자신을 연계시키면서 처해있는 상황을 분명하고 실천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실천적 지혜라는 교사의 또 다른 요건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교사(敎師)는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역사적ㆍ사회구조적 상황을 냉철하게 바라볼 수 있는 안목을 갖추고 있어야 하고, 그 안목을 자신의 교육활동을 통해 제자들에게 전하고자 하는 실천적 지혜와 열망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만약 그렇지 못할 경우 그는 단순히 기능적인 지식이나 가벼운 처세술만을 전달하는 직업인으로 전락할 가능성이 높다. 붓다는 자신이 처해있는 상황을 직시하면서 그 시대적 흐름을 도저히 그대로 수용할 수 없다는 불편함으로서의 고통을 말함으로써 가르침을 펼쳐나가기 시작했다. 그런 점에서 그는 실천적 지성인으로서의 교사의 모형을 보여준 셈이고 동시에 교육철학자로서의 모습도 잘 보여주었다는 평가가 가능하다.
교육철학이 확고하게 확립된 이후에 교사에게 요구되는 것은 전문성이다. 그 전문성은 다시 교육내용에 대한 전문성과 교육방법에 대한 전문성으로 나뉠 수 있고, 전자는 이미 진리라는 교육의 내용을 깨친 자로서의 붓다라는 개념 속에서 해명되었다. 남은 것은 교육방법의 전문가로서의 붓다인데, 그는 우선 제자들이 처해있는 교육 상황을 공동체적 차원과 개인적 만남의 차원으로 나누어 인식한 바탕 위에서 교육하고자 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공동체적 차원에서는 특히 승가공동체가 계율의 바탕 위에서 유지됨으로써 그 안에 있는 모든 구성원들이 자연스럽게 훈습(薰習)의 과정을 공유하는 방향으로 전개하고자 했고, 각각의 제자들과 만나는 과정에서는 그 자신의 모범과 미소, 설법 등을 충분히 활용하면서 제자의 수준에 맞는 가르침을 펼치고자 하는 대기설법(對機說法)의 방법론을 구사했다.
교육자 또는 교사로서의 붓다를 조명하기 위해서 또 하나 주목해야만 하는 지점은 만남 그 자체의 소중함에 대한 강조와 제자의 인격을 존중하는 자율적인 과정에 대한 강조이다. 붓다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모든 사람들을 친절함으로 맞이하고자 했고, 그들과 온전히 만나고자 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자신의 역할을 단지 ‘길을 보여주는 자’일 뿐이라는 겸손한 자세를 갖추고 있었다.
‘최상의 목표인 열반이 있고, 열반에 이르는 길이 있으며 안내자인 내가 있습니다. 어떤 제자들은 나의 충고와 가르침을 듣고 열반을 성취하지만, 어떤 제자들은 성취하지 못합니다. 그것을 내가 어찌하겠습니까? 여래는 다만 길을 보여줄 뿐입니다.’(맛지마 니까야: 107)
이처럼 붓다는 어떤 누구와의 만남에도 소홀하지 않으면서도 그를 억지로 이끌어가고자 하지 않고, 다만 진리의 길과 그 길을 통한 열반의 경지를 보여주고자 노력한 자율적인 교사이기도 했다. 그 붓다가 실존적 차원을 넘어서서 우리에게 다가올 경우, 그는 우리 시대가 요청하는 자율적이면서도 진리에의 열망을 결코 포기하지 않는 참교사라고 평가받아 마땅하다.
교육이 이상적인 형태로 실시된 적은 없지만, 현재 우리의 상황처럼 학부모들과 사회구성원들을 혼란스럽게 하는 경우는 흔치 않았다. 어떻게 해서든지 경쟁에서 이겨야 하고 그 승리를 위해서는 인간다움과 같은 인성교육적 요소들은 헌신짝처럼 팽개치는 것이 우리 시대의 현명함이라고 가르치는 모습은 단순히 ‘강남 아줌마’만의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정도가 다를 뿐 함께 빠져 있는 어두움[無明]의 터널을 상징한다.
이 질기고 처절한 어둠에서 벗어나기 위한 묘책이 쉽게 찾아지지 않는다는 절망감을 공유한 지도 오래되었다. 정치인들은 말할 것도 없고, 교과부 장관을 비롯한 교육권력들에게도 더 이상의 희망을 발견할 수 없다는 절망감도 충분히 확인하고 있는 중이다. 학교나 교사들에 대한 희망도 점차 사라지고 있고, 그런 와중에 우리 아이들만 밤중까지 학원가를 서성이다가 폭력의 주체 또는 대상이 되거나 죽음의 짙은 유혹에 빠져버리는 일들이 끊이지 않고 계속되고 있다.
우리에게 정녕 출구는 없는 것일까? 돌이켜보면 붓다의 시대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쾌락의 유혹에 순종하는 어두움의 터널 속에 살고 있었고 그 사실을 직시한 고타마도 잠시 진리를 가르치는 일이 가능하지 않을 것이라는 절망적인 판단에 도달했지만, ‘그래도 이해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라는 범천의 간절한 요청을 받아들여 ‘귀 있는 자는 잘못된 믿음에서 벗어나라.’고 선언하면서 역사적인 가르침의 수레바퀴를 돌리는데 더 이상 망설이지 않았다.
아직 절망하기에는 이르다. 먼저 그 희망의 씨앗은 이 땅의 교사가 뿌려야만 한다. 상황을 정확하게 인식한 바탕 위에서 진리에의 열망을 포기하지 않는 교사가 전문성을 바탕으로 자신의 제자들과 진정성 있고 인격적인 만남의 과정을 이어나가는 길만이 우리에게 남은 거의 유일한 출구임을 먼저 우리 모두가 확인하고 공유해야만 한다.
▲박병기 교수
그러면서 동시에 부모가 힘을 합해야 하고 더 나아가 사회 구성원 모두가 각자의 자리에서 교육자로서의 역할을 다하고자 다짐할 때에야 비로소 희망의 싹이 돋아날 수 있다. 이런 엄중한 실천적 지혜를 ‘우리 시대 붓다가 오시는 날’에 함께 나눌 수 있기를 기대하는 마음 간절하다.
출처 : 법보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