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는 수행의 종교이다. 불교인은 물론이거니와 불교에 대해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대부분 먼저 ‘수행’을 떠올릴 것이다. 그 이유는 불교의 목표인 깨달음, 혹은 열반은 수행의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이 말은 불교의 목표는 절대자에 대한 믿음과 귀의만으로는 이루어질 수 없음을 의미한다. 반드시 자신의 수행, 즉 실천행(實踐行)이 바탕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불교는 자력적 성격이 강하다. 내 스스로 수행하여 깨달음으로 나아간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불교에서 믿음이 의미 없는 것으로 치부되는 것은 아니다. 부처님께서 설하신 방법에 따라 수행을 하면 우리도 그 분과 같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확신이 바로 불교에서 말하는 믿음의 방식이다. 그렇기에 불교적 믿음은 부처님에 대한 확고한 신뢰와 확신으로부터 시작해서 깨달음을 통해 믿음의 내용을 직접 증득하는 것으로 나아가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고따마 붓다께서 설하신 수행의 결과를 단순한 수사적 표현이 아닌 실제적 가르침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다.
주지하듯이, 고따마 태자는 태어나자마자 어머니를 여의며, 죽음의 고통을 맛보았다. 태자는 이후 성장하면서 늙음과 죽음을 벗어나는 길을 찾고자 부모와 처자를 버리고 수행자의 길을 걷게 된다. 태자는 진리에 대한 앎을 갈구한 것이 아니라, 늙음과 죽음이라는 실존적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 것이다. 그렇기에 태자는 철학자가 아닌 수행자의 길을 걷게 된 것이다.
수행자가 된 고따마는 당시 수행자들이 모여 있는 마가다국의 라자가하(왕사성)로 갔다. 그곳에서 당시 많은 수행자들이 닦았던 선정 수행을 배우게 된다. 하지만 그는 곧 선정수행의 한계를 자각하고 만다. 선정상태에 들었을 때에는 마음이 평온하여 모든 고통을 벗어난 것 같았지만, 선정상태에서 나오자마자 다시 혼란된 마음상태로 돌아와 버린 것이다. 수행자 고따마는 이러한 선정수행으로는 늙음과 죽음이라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음을 확인하고, 다음으로 고행의 길을 선택하게 된다.
바라나시 근처에 네란자라 강이 흐르고 있었다. 강 근처에는 고행림이 자리하고 있었는데, 주변으로부터 멀지 않은 곳에 마을이 있어 수행에 필요한 음식을 얻기에 적당한 곳이었다. 고따마는 선정수행을 포기하고 고행을 닦기 위해 이곳으로 들어왔다. 고행림에는 고따마에 앞서 다섯 고행자들이 해탈을 얻기 위해 수행에 전념하고 있었다.
고따마는 당시 고행자들이 수행하였던 모든 유형의 고행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 중에서도 호흡을 극한의 상황까지 멈추는 수행과 극단적 단식을 주로 하였다. 하루에 쌀 한톨과 콩 몇 개로 연명하면서 치열한 고행을 지속하면서 극심한 고통을 감내하였다. 훗날 고따마 붓다는 “과거의 그 어떤 수행자들도 나와 같은 고행은 하지 못했으며, 미래의 어떤 수행자도 나의 고행에 미치지 못할 것이다.”라고 회상하였다. 이렇듯 철저하게 고행을 실천하는 모습에 다섯 고행자들은 크게 감명 받아 자발적으로 고따마의 수행을 돕기에 이른다. 이러한 지난한 고행의 과정이 ‘맛지마니까야’ 36번경(Mahāsaccakasutta)에 잘 묘사되어 있다. 그러는 동안 어느 덧 6년의 세월이 흘러갔다. 하지만 고따마는 그토록 희구하는 늙음과 죽음을 극복한 해탈을 얻지 못하였다. 결국 고따마는 고행으로는 궁극의 목적을 이룰 수 없다고 판단하고 고행을 중단하게 된다.
고행을 중단한 고따마는 네란자라 강으로 내려와 오랜 기간 고행에 지치고 먼지에 더럽혀진 몸을 씻은 뒤, 인근 마을의 수자따라는 처녀로부터 우유죽을 공양 받았다. 6년간의 극심한 고행으로 고따마의 몸은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수일 간 우유죽 공양을 받으면서 기운을 회복한 고따마는 자신의 수행을 되돌아보게 된다. ‘무엇이 잘못 되었을까?’ 수행의 전 과정을 면밀히 점검하였다.
이 모습을 본 다섯 고행자는 고따마가 고행을 버리고 타락했다고 비난하며 떠나갔다. 하지만 그는 이에 아랑곳 하지 않고, 여전히 숙고에 숙고를 거듭하였다. 그리고는 마침내 어린 시절에 감추어져 있던 기억의 한 편린을 되살리는데 성공한다. 부왕을 따라 농사의 시작을 알리는 행사에 참여했던 어린 시절, 태자는 나무그늘에 앉아 깊은 사색에 잠겨있었다. 그 때 알 수 없는 평온함에 깊이 젖어들었던 것이다. 그 평온함은 욕망과는 무관한, 그야말로 욕망이 결여된 평온함이었다. 그는 이 기억을 통해 이제껏 그 누구에게도 배우지 못한, 아니 그 누구도 알지 못했던 새로운 수행법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바로 ‘중도’의 수행법이었다.
고따마는 이 방법을 지속하게 되면 반드시 궁극의 목적을 성취할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는 훗날 보리수라 불리는 잠부나무 아래에 앉아 수행을 시작하였다. 수행을 시작한 지 얼마되지 않아 고따마는 위없는 깨달음을 얻어 정등각자(正等覺者), 곧 깨달은 자 붓다가 되었다.
중도 수행은 몸을 괴롭혀 정신의 해탈을 추구하는 방법이 아니었다. 또한 몸과 마음을 쾌락에 맡기는 천박한 것과도 전혀 달랐다. 중도 수행은 ‘욕망’으로부터 벗어난 청정한 마음을 통해 깊은 삼매의 상태로 들어가는 방식이었다. 이는 몸을 무조건적으로 부정한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 아닌, 건강한 몸을 기반으로 욕망을 떠난 건전한 마음상태를 추구하는 수행방식이었다. 이 수행이 진척되면 진척될수록, 몸과 마음은 더욱 더 평온해지고, 의식은 더욱 또렷해지며, 고통의 뿌리를 직시하게 되어 결국 수행자 고따마는 고통의 뿌리를 완전히 제거할 수 있었다.
깊은 삼매의 상태에서 벗어나 일상의 의식상태로 되돌아오더라도, 더 이상 번뇌에 괴로워하지 않게 되었다. 삼매의 상태나 일상의 상태나 그의 의식은 명료하고, 마음은 고요한 호수와 같이 되었다. 다시는 괴로움의 상태로 돌아가지 않게 된 것이다. 이 때 고따마 붓다는 “나의 생은 이것이 마지막이며, 나는 할 일을 모두 마쳤다.”라고 선언하게 된 것이다.
심신 쾌락에 내맡기거나
신체 괴롭히는 수행 부정
건강한 몸으로 번뇌 없애는
중도수행법으로 해탈 증득
바로 이것이 붓다가 버린 선정수행과 붓다가 택한 수행의 차이점인 것이다. 훗날 선가(禪家)에서 말하는 ‘평상심이 곧 도(道)’인 상태를 붓다는 중도 수행을 통해 증득하고 보여준 것이다.
고따마 붓다는 당시 인도의 수많은 수행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붓다는 다른 수행자들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다. 붓다 당시, 많은 수행자들은 자신의 수행을 자랑하거나, 권위를 내세우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였다. 또는 사람들의 고통에는 무관심한 채, 깊은 숲에서 혹은 마을과 떨어진 곳에서 자신만의 해탈을 위해 수행하였다. 그러나 붓다는 이러한 수행의 방식을 모두 비판하며 바른 수행이란 무엇인지, 참된 수행자란 어떤 사람인지를 분명히 보여주었다.
붓다는 당시 바라문이나 수행자들 가운데 흔히 행하고 있던 ‘점술’이나 ‘해몽’, ‘관상’과 같이 길흉을 판단하는 것은 물론, 뒤에서 중상하는 말을 하거나, 분노와 인색함, 편견과 선입견에 사로잡혀 행하는 모든 행위를 비판하였다. 이러한 행동은 어떠한 경우에도 수행자가 할 바가 아님을 분명히 하였다. 아울러 수행자가 갖게 되는 또 하나의 커다란 장애인 교만에 대해서도 특히 경계하였다. 그리고 늘 만족하고 간소한 생활을 하고, 몸과 마음을 고요히 하여 어떠한 경우에도 상식 있는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살만한 사소한 잘못도 범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할 것을 강조하였다. 사소한 행동 하나 하나에 주의를 기울여 삼가고, 나아가 모든 살아 있는 생명체를 깊은 자애심과 연민으로 감싸 안는 자비행의 실천을 제자들에게 기회 있을 때 마다 설하였고, 몸소 실천을 통해 보여주었다. 경전에서는 붓다에게는 휴식의 순간조차도 모든 존재를 연민하는 시간이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또 다른 경전에서는 다양한 세속적 주제로 토론을 일삼는 제자들에게 붓다는 수행자가 해야 할 바는 두 가지 밖에 없음을 설하고 있다. 즉 진리에 대해 토론하거나, 아니면 침묵으로 자신의 내면을 살피며 수행하는 것 이외에는 관심을 갖지 말 것을 주문한다. 이는 바로 붓다의 삶의 모습이기도 했다. 남녀노소는 물론이거니와 귀천을 불문하고 매일같이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가르침을 청할 때 붓다는 한 순간도 싫어하거나 성가시다고 여기지 않았다. 언제나 친절하고 온화하게 그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와 표현으로 해탈의 가르침을 주었다.
▲이필원 연구교수
그리고 가르침의 시간 이외에는 늘 수행에 전념하였다. 모든 욕망을 이타의 자비심으로 바꾸고, 어리석음을 진리의 밝은 지혜로 바꾼 붓다였지만, 어떠한 경우에도 수행을 중단하는 일은 결코 없었다.
붓다는 출가 수행자의 삶이란 수행 외에는 없음을, 그리고 그 수행의 삶은 고통에 아파하는 사람들을 보듬어 안고 해탈의 길로 안내하는 이타적 삶으로 표현되는 것임을, 당시 출가 제자들과 오늘날 우리들에게 절실한 심정을 담아 생생히 보여주고 있는 영원한 수행의 지표이다.
출처 : 법보 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