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가모니가 부처가 되기 위해 여러 겁을 통해 서원을 세웠다는 전생담이 있다. 이중에 선혜 행자 이야기가 있다. 선혜 행자는 연등부처님이 지나는 진흙탕 길에 자신의 옷을 덮고 그 위에 엎드려 자신의 몸을 밟고 지나가도록 한다. 그는 ‘이 세상에는 고통 받는 중생이 끝없이 많으니 내가 연등부처님처럼 최상의 깨달음을 얻어 마지막 한 생명까지 윤회의 바다에서 기필코 구제한 뒤 비로소 열반에 들리라’는 서원을 한다. 이것을 시작으로 부처의 역사가 본격화된다. 여기서 부처가 되어야 하는 이유, 부처가 되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실천적으로 분명히 선언하신다.
부처님이 태어나시면서 외친 ‘천상천하 유아독존, 삼계개고 아당안지(天上天下唯我獨尊 三界皆苦 我當安之)’, 즉 ‘하늘 위 하늘 아래 오직 인간 그 스스로가 존귀하다. 모든 중생이 고통 속에서 헤매고 있으니 내 기필코 이를 구원하리라’는 탄생게 또한 인간 위의 신과 신적존재, 그리고 권력이나 재물, 계급중심적인 사회 속에서 인간의 존엄성, 인간의 주체성을 외친 인권선언이었다. 암울한 현실 속에 있는 그들을 기필코 구원하겠다는 것이 부처님이 오신 이유임을 다시 한 번 선언하신 것이다. 부처님의 탄생과 깨달음은 바로 이렇게 사회적 변화와 변혁의 메시지를 갖고 있었으며,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 下化衆生)은 바로 깨달음의 사회적 실천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부처님은 자신을 따르는 제자들과 함께 승가공동체를 만들어 집도 절도 없는 거리에서의 생활하셨다. 철저한 무소유의 삶이다. 부처님은 제자들에게 부자든 가난한자든 가리지 않고 7집을 순서대로 탁발하도록 했다. 그래서 자신들이 언제나 중생의 노고에 힘입어 수행하고 있음을 느끼고, 자신들의 공부가 바로 누구를 향해 있는 것인가를 항상 확인하게 하셨다.
전 세계적으로 아직도 계급이 남아 있는 나라가 바로 인도이다. 브라만, 크샤트리아, 바이샤, 수드라와 이들에도 속하지 못하는 불가촉천민, 하라잔의 차별이 아직도 현대까지 뿌리깊이 남아 있는 나라이다. 지금도 그러한데 2500년 전에는 오죽했겠는가.
그러나 출가한 천민인 우팔리에게 승가공동체의 모든 사람이 차별 없이 경배하라고 했던 사건, 똥꾼 니이다이와 바보 주리반특을 대하는 부처님의 태도에서 알 수 있듯이 계급차별이 가장 완고했던 시대에 부처님은, 계급에 의해 차별하지 않고 제자로 받아들였고, 승단 안에서 모두 평등하게 수행했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혁명적인 것이다. 부처님이 탄생게에서 말씀하신대로 신과 인간의 굴레를 벗어나 모든 인간이 평등하고 존중되어야 한다는 인권선언을 실현하신 것이다.
이뿐 아니다. 부처님이 성도 후 6년 만에 고향인 카필라를 방문했을 때 어머니인 마하파자파티가 부처님에게 출가를 요청하였고, 이미 남편이 출가하여 혼자 남은 여자들이나 과부들, 특히 부처님의 부인이었던 야소다라를 포함하여 500여명의 여인들도 부처님에게 출가하기를 청하였다. 그동안 한 번도 출가를 거절한 적이 없던 부처님은 2번이나 거절을 하시지만 바이샬리에서 3번째 요청에 결국 출가를 허락하신다.
이것으로 부처님의 승가공동체 안에서는 계급적 평등, 여성의 평등이 구현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인권과 민주주의가 발달한 지금도 계급이나 성평등은 완벽하게 구현되지 않았다. 더욱이 오늘날까지 인도는 전근대적 여성차별이 유독 심각한 나라였는데, 당시 인도의 풍속은 여자는 남자에 예속된 노예 같은 존재일 뿐 인간으로서의 권한은 전혀 없었기 때문에, 승가공동체에서 이들을 동등한 수행자로 인정한다는 것은 부모, 자식, 남편에 의지 하지 않고 스스로 존재하는 인간의 존엄한 가치를 인정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부처님의 깨달음은 단지 인간에게만 구현되는 것이 아니었다. 싯다르타 태자가 12살 때 아버지 숫도다나왕과 함께 농부들과 풍년을 기원하는 농경제 파종식에 참여했다. 이때 태자는 뙤약볕에서 땀을 흘리며 쟁기질하는 농부를 보았다. 그리고 그 농부의 채찍을 맞으며 힘들게 밭을 가는 소를 보았고, 그 소의 쟁기 끝에 파헤쳐진 꿈틀거리는 작은 벌레들을 보게 된다. 이때 새들이 날아와 그 벌레를 쪼아 물고 날아가는 것을 보고 작은 충격을 받는다. 그는 나무아래 홀로 앉아 방금 일어난 일을 되새기면서 ‘아 가엾다. 어찌하여 살아있는 것들을 서로 죽이기를 거듭하는가, 모든 생명은 더불어 행복할 수 없을까’하는 고민을 하게 된다. 그 고민을 해결하기 위해 결국 왕위를 버리고 출가를 결심하게 되어 6년의 고행 끝에 보리수나무 아래서 새벽별을 보고 깨달음을 얻으신 것이다. 이렇듯 부처님의 깨달음의 출발은 ‘만생명이 더불어 행복하기 위한 것’에서 비롯되는 생명의 가르침이다.
또한 전생담에는 비둘기를 숨겨준 보살과 매의 이야기가 나온다. 비둘기를 잡아먹으려는 배고픈 매를 향해 비둘기 무게만큼의 자신의 몸을 보시하지만, 결국 자신의 온몸을 저울에 올려놔야 비로소 비둘기와 같은 몸무게가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에서 비둘기와 매라고 하는 중생들을 모두 살리는 보살의 자비연민을 강조하고 있는 것으로, 결국 하찮은 작은 비둘기라 할지라도 인간의 생명과 동등한 무게를 지니고 있다는 생명해방, 동물해방의 가르침의 표현이기도 한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인 연기법으로 볼 때, 깨달음과 사회적 실천 즉 상구보리와 하화중생이 둘이 아닌 이치이며, 깨달음을 얻는 구도행 자체가 또한 중요한 사회적 실천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보다 사회적 구체성을 갖는 사례를 살펴보자면 로히니 강의 물로 인해 야기된 전쟁을 막은 부처님의 평화의 실천을 빼놓을 수 없다.
당시 카필라국과 콜리국은 본래 형제적 우애를 갖는 좋은 사이였지만, 큰 가뭄으로 곡식이 말라죽고 식수마저 구할 수 없게 되자 다툼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두 나라의 사이에 있는 로히니강의 물을 자기네 땅에 더 많은 끌어오려고 다툼이 벌어져 급기야 두 나라 왕이 군대를 동원하여 전쟁 직전까지 가기에 이른다.
이것을 안 부처님은 “내가 가지 않으면 이들이 서로를 죽이고 파괴하고 말겠구나.”라고 생각하여 전쟁 일촉즉발의 양쪽 군대사이에 들어가 두 나라의 왕을 불러놓고 묻는다. “왕들이여, 당신들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물의 값어치는 얼마나 나가는 것입니까?” 왕들은 대답한다. “얼마 되지 않습니다.” 그러자 다시 부처님은 묻는다. “그러면 양쪽 병사들의 목숨과 피의 값은 얼마나 됩니까?” 왕들은 “세존이시여, 값으로 따질 수 없습니다”라고 말한다. 이어 부처님은 “작은 가치의 물 때문에 값으로 따질 수 없는 사람들의 목숨을 해친다는 것이 온당한 일입니까?”라고 되묻는다. 이렇게 부처님은 이들의 전쟁을 중지시킨다. 만일 부처님의 평화를 위한 노력이 아니었다면 로히니 강물은 아마도 피의 강물이 되었을 것이다.
부처님 당시 기원전 7~5세기 북인도는 코살라국, 마가다국을 비롯하여 밧지, 말라, 앙카 등 16대국이 서로 쟁패를 벌이며 끊임없는 약육강식의 전쟁이 계속되는 불안과 고통의 세월이었다. 각 나라 모두 전제군주의 폭정과 수탈 속에 신음하는 백성들의 참담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이 시기에 거부장자들이 생겼고, 수많은 수행사문들이 있었던 시대였다. 그러나 부처님은 본국인 카필라의 왕족뿐 아니라, 당시 무소불위의 최대의 강국이었던 마가다국의 빔비사라왕까지 제자로 교화·개종시켰고, 카필라국을 멸망시킨 코살라국의 왕 프라세나짓왕까지 교화시켰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단순히 사회적 정의와 평화, 평등의 구현이 아니었다. 궁극적인 길에 이르는 깨달음과 새로운 삶을 위한 가르침의 감화력이 기반된 것이다.
부처님의 이러한 교화의 힘은 바로 오늘날 갈등과 전쟁의 국제정세를 외교력으로 평화를 이루게 만든 효율적이고 의미 있는 사회적 실천이 아닐 수 없다. 인근 국가 간의 긴장과 갈등 속에 있는 왕들과 장자들을 모두 감화시켜 변화하게 하시고, 엄혹한 시대에 신분의 차별을 사회적으로 주장하기보다 승가공동체 속에 평등의 모델을 만들어 미래사회의 모델이 되는 실천하신 것이다.
부처님은 오늘과 같은 개념의 사회적 실천가를 넘어선다. 모든 것이 연관되며, 상호의존의 연기적 깨달음 속에는 자신의 삶을 변화시키는 수행과 실천이 둘이 될 수 없듯이, 부처님의 가르침은 그 자체로 많은 사람들에게 신의 굴레, 계급의 굴레, 차별의 굴레 등 모든 굴레로부터 벗어나 참자유, 대자유를 얻게 하신 해탈의 가르침이셨고, 그런 점에서 부처님은 인간의 해탈과 사회적 해방을 위한 실천가였다.
▲유정길 공동대표
불교는 좌선과 명상만을 강조하는 ‘앉은뱅이’ 종교가 아니다. 끊임없이 걷고 걸으면서 길에서 만나는 사람들의 구체적 고통을 해탈하게 해주신 부처님처럼 ‘걷는 종교’로서의 본연의 모습을 회복해야 할 것이다.
출처 : 법보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