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다 이전의 삼매가 가진 단점을 알아야 붓다의 ‘바른 삼매’가 구체적으로 무엇이 다른지 알 수 있다. 싯다르타가 스승을 떠났던 이유는 삼매에서 출정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붓다가 가르친 삼매는 出定이 없어야만 하고, 당연히 없을 수밖에 없다. 正定이란 단순히 깊은 삼매 상태에 들어가는 게 아니라, 사유가 완성되어 번뇌가 사라진 상태로 고정되는 것이니 출정이 없을 수밖에 없다.
붓다는 자신의 삼매를 한마디로 ‘一行三昧’라고 했다. 이것은 ‘법으로 된 세계가 단 하나의 모습(一相)으로 진행(行)되었음을 알고 살아가는 상태를 말한다. 다시 말해 12연기를 명확하게 이해하여 바르게 기억했으니, 모든 게 연기한 법이라는 사실을 절대 잊지 않기에 모든 번뇌가 사라진 상태로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멈춤(止 )’이라는 단어가 등장하는데, 이것은 사마타(止, samatha)로 ‘(감각을)멈춘다’라는 말이다. 그리고 사마타와 함께 위빠사나(觀, vipassana)도 언급되는데, 이것은 ‘(대상을)관찰한다’라는 말이다. 일반적으로 사마타는 마음을 안정시키는 수행이고, 위빠사나는 사물의 본질을 통찰하는 수행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면서 이것이 불교수행의 양대산맥처럼 생각한다. 그래서 사마타와 위빠사나를 함께 닦는 지관상수(止觀雙修), 대승의 사마타와 위빠사나라는 뜻의 마하지관(摩詞止觀)도 심심치 않게 등장하는 단어이다.
충격적으로 들리겠지만, 이것은 불교수행이라고 말할 수 없다. 우리는 인과로 사유하기에 사마타나 위빠사나 수행을 하면 그 결과로 깨달음이 얻어질 것이라고 여긴다. 하지만 17강 정념(正念)에서 밝혔듯이, 불교의 수행은 ‘4념처(四念處)’이다. 4념처도 깨닫고 난 후에 실행하는 것이지, 4념처를 수행해서 깨달음을 얻는 게 아니다. 최상의 깨달음은 이미 붓다가 성취했고, 우리는 그가 깨달은 내용을 배우고 사실인지 아닌지 확인하는 작업만 하면 된다. 그렇게 확인했다면 그때 4념처로 기억시키는 수행을 하면 되는 것이다.
사마타는 감각을 차단해 대상에 집중하는 게 목표이다. 그래서 대상에 집중하면 그것과 하나 된 것 같은 느낌의 삼매 상태를 경험하게 된다. 이 상태에서는 감각이 차단되었기에 오직 그 대상만 남아 있는데, 매우 고요하고 평화로워서 마치 세상에서 벗어난 것처럼 느껴지게 된다. 반면에 위빠사나는 대상을 해체 분석하는 데 특화된 관찰이다. 그러다 보니 모든 존재를 지수화풍과 같은 각각의 요소로 분별하고, 또 그런 구성요소로 되었다는 확증편향이 생겨난다.
사마타와 위빠사나의 목푯값이 명확하기에 제아무리 사마타와 위빠사나를 한들 그것만으로는 최상의 깨달음인 12연기로 절대 귀결되지 않는다. 그래서 8정도에서 “내 마음도 보고 느끼는 것도 결국 12처의 작용으로 드러나는 법”이라는 사실을 명확하게 고정하여 사는 게 바른 선정이라고 밝힌 것이다.
위에 인용한 경전의 문장에서 해탈했다고 했을 때도, “만약 마음에 머물게 된다면 선나(禪那)에 머물러 순서에 머문다(若心住 禪住順住)”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고요히 멈추는 선나(禪那, 止)에 머물면서 초선부터 비상비비상처까지 순차적으로 ‘환상을 가지고 놀면서 머무는 것’을 수행으로 여긴다는 말이다.
그러나 진정한 선정은 “흩어지거나 어지럽지 않게 (번뇌의) 멈춤을 붙잡는 것(不亂不散攝止)”이다. 즉 사상적으로 혼란하여 이리저리 흩어지지 않고, 멈춤(止)이 ‘감각의 멈춤’이 아니라 ‘번뇌의 멈춤’이 되어야 바르게 안정된다는 뜻이다.
출처 : 고광 스님의 불교 도장 깨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