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 인천교(人天敎)
인간으로서 불보살에게 복을 구하는 단계이다. 불교에 처음 귀의하여 신심을 일으킨 사람들을 위해, 삼세의 업보와 선악의 인과를 말씀하신 교법이다. 인천교는 몸의 근본이 업이며, 인과는 평등하여 사람이나 천상계에 태어나기 위해 선업을 쌓는 수행으로 탐진치(욕심, 성냄, 어리석음)를 끊는다.
제2 소승불교(小乘佛敎)
수행을 통해 스스로 복을 구하고 지혜를 만드는 단계이다. 몸은 사대가 화합한 것이고, 마음은 육근과 경계가 마주하면서 생기는 것이니, 모두 실체가 없다. 실체 없는 몸과 마음에 집착하여 삼독의 업을 짓고, 끝없는 생로병사의 윤회로 고통 받는 삶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므로 고집멸도의 진리에 따라 수행하고, 무아관(無我觀)의 지혜를 닦아 아공진여(我空眞如)를 증득하고, 아라한과를 얻어서, 몸을 버리고 마음을 단절하여 비로소 모든 괴로움을 끊어버려야 한다.
대승에서 진여라는 말을 쓰는데, 소승교를 설하면서 진여를 쓰는 경우는 거의 없으며 부처님의 말씀 '근본은 진여다' 하여 ‘아공진여'라 쓴 것으로 본다. 인천교에서 탐진치가 일어나는 것은 실체가 없는 나에게 집착하기 때문이며 소승교는 무아를 닦는 것이다.
제 4 대승불교(大乘佛敎)
수행으로 얻은 복덕과 지혜를 타인에게로 향하여 가는 단계이다. 기원전 1세기 무렵 인도에는 많은 도시 국가들이 있었고, 그 경제적 번영에 힘입어 여러 종교들이 번성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그릇된 출가중심적 불교 이타행(利他行)이 결여된 소승적(小乘的)인 것과 믿음에 대한 반성으로 일어난 것이 바로 대승불교 운동입니다.
이 운동의 주안점은 계율이나 교법에 얽매여 전통을 고집함으로써 형식화 되어가는 부파 불교의 벽을 깨뜨리고 특정인 즉 출가 수행승 만이 중심이 되는 좁은 생각을 물리치자는 것이었습니다. 중생은 본래 불성을 지니고 있으므로 석존의 자비와 지혜를 믿고 보살의 길인 육바라밀의 완성을 위해 정진한다면 누구나 붓다가 될 수 있으며, 그것이 석존의 참뜻이었고, 석존이 현세에 출현했던 근본목적이라고 주장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운동은 서력 기원전 1세기 무렵부터 시작되었고 2~3세기에 이르러 용수, 제바 등의 뛰어난 사상가에 의해 사상적 체계가 확립되었습니다. 이른바 초기 대승불교시대로서 기나긴 대승불교의 역사를 통해 대승불교의 특징이 가장 두드러졌던 시대라 하겠습니다.
대승불교의 사상적 특징으로는 붓다관을 새롭게 하여 무수한 붓다와 보살을 창조해냈다는 점입니다. 무신론적인 소승에 대해 대승은 유신론적이며, 1불 사상에서 다불(多佛)사상으로 전개되었습니다. 즉 과거불사상(過去佛思想)을 발단으로 해서 미래불사상(미래에 미륵불이 출현해서 석존 대신 중생을 구제한다는 사상)이 일어났으며 아울러 내세불사상(서방정토의 아미타불 또는 동방묘회국의 아촉불)과 시방변만불사상(十方遍萬佛思想 : 이 세상의 사방 어느곳에나 붓다가 가득 차 있다는 사상, 그 대표적인 것이 비로자나불이다 )으로 발전하고 나중에는 내재불사상(內在佛思想 : 붓다는 현재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 존재한다는 사상)으로까지 발전했습니다.
다음 특징으로는 소승이 자기형성에 중점을 둔데 반해 대승은 대중구제에 중점을 두었다는 점입니다. 즉 위로는 깨달음을 구하고 (上求菩提), 아래로는 대중을 교화한다는(下化衆生) 출가주의에서 재가주의로 중점이 바뀐 점입니다.
또 보살이라는 새로운 이상상(理想像)을 만든 점입니다. 보살이라는 말은 원시경전에도 나오지만 원시경전에서는 부처가 되기 전의 석존 즉 <수행자로서 불도에 정진하는 자>라는 뜻이었으나 대승에서는 이를 확대 해석해서 불교도의 이상적인 모습으로 정립하게 되었습니다. 소승에서는 아라한은 될 수 있어도 붓다가 될 수는 없다고 한데 대해 대승에서는 모든 중생 보살도인 육바라밀을 완전히 닦으면 해탈한다고 했습니다. 동시에 붓다가 될 수 있다고 했습니다.
끝으로 소승의 분석적 방법에 대해 대승에서는 직관적 방법을 중시한 점입니다. 불교식 표현으로는 분별(分別)적 방법에서 무분별(無分別)적 방법으로 변한 것입니다. 즉 분별지(分別智)에 대한 무분별지(無分別智 – 般若라고도 함)라는 술어가 생기게 된 것입니다.
석존이 연기설을 설한 것도 그 방법은 분석적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따라서 분별의 가르침 즉 지혜의 도(道)는 범속한 대중으로서는 이해하기가 어렵지만 석존 당시의 제자들이 대부분 교육 받은 귀족 출신의 우수한 지성들이었음을 감안할 때 석존의 이런 분석적인 방법에 수긍이 가는 것입니다.
제 5 일승교(一乘敎)
깨달음에 이르게 하는 오직 하나의 궁극적 부처님 단계이다. 대승경전인『법화경』에 의하면, 인간은 선으로 향하든 악으로 향하든 무한한 가능성을 지니기 때문에, 하나에 집착하는 입장을 고집하여 고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또한 어리석음과 깨달음, 생사와 열반이라는 모순개념은 관념적으로 생각하면 별개이지만, 구체적인 사실로서는 한 가지 것의 양면이다. 이렇기 때문에 번뇌가 바로 보리(菩提)요, 생사가 바로 열반이라는 것이 살아가는 현실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근거가 바로 일승사상(一乘思想)이다.
일승사상이란 단적으로 말하면 성불을 실현하는 유일하고 구극적인 가르침을 표방하는 사상이다. 이 사상은『법화경』을 통해 표출된 것으로 성문, 독각, 보살이라는 세 가지 입장은(제17문 참조) 보살 또는 부처라는 한 가지 입장으로 귀일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불교를 실천하는 데에는 성문승, 독각승, 보살승이라는 3종의 수행방식이 있지만, 구극적으로는 유일한 부처의 입장인 일불승(一佛乘)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설하는 것이다.
그런데 큰 문제라고 생각되지는 않지만, 일승과 삼승의 관계를 해석하는 데에 애매한 면이 있다. 일승이라는 것이 보살승을 가리키는 것이냐, 아니면 부처의 입장인 불승(佛乘)을 가리키느냐 하는 점이다. 물론 종교적 실천에 있어서 보살과 부처를 굳이 구별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그래서인지 일반적으로 일승이란 불승이라 하면서, 삼승 중의 보살승과 일승을 동일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삼승 중의 하나인 보살승과 불승을 구별함으로써 일승을 강조하는 취의가 확대된다. 역으로 말해서 부처의 입장인 불승을 실현하는 데에는 삼승이라는 다양한 입장이 나름대로의 가치를 지니는 것으로 해석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