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경의 진리
숭산스님
금강경은 반야심경 보다는 훨씬 분량이 많다.
원래 반야경 계통의 경전이 여덟 가지나 된다.
그 가운데서 특히 우리에게 가장 많이 알려진 경전이 반야심경과 금강경이다.
금강경은 현재 한국불교의 주류라고 볼 수 있는 조계종.태고종의 근본소의 경전이 되어 있다.
이것은 다 우주 인생의 진리에 어두운 인생을 깨우쳐 주는 좋은 법륜이 될 뿐 아니라 특히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이 많은 한국인에게 적절한 경전이기 때문이다.
금강경의 대의는 크게 서너 구절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는 상을 버리고 여래가 되는 것이니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 비상 즉견여래라" 라는 대목이다.
"모양이 있는 모든 것이 허망하다"고 하는 것은 변화무쌍하기 때문이다.
허망한 것을 허망하지 않다고 잘못 보면 이것은 사견이다.
사견이 없는 사람은 곧 부처님이므로 여래라 한 것이다.
여래란 "진리로부터 온 사람" 이란 뜻이지만 진리로부터 온 사람은 즉시 진리 그 자체이므로 그대로 부처님이란 말이다.
허망한 것을 허망한 것으로 보는 사람은 집착이 없다.
집착이 없으면 걸림없이 자유스럽게 행동하는 사람이므로 그 분은 부처님인 것이다.
교(敎)에서 "즉견여래"를 곧 여래로 본다 해석하지만 선(禪)에서는 보는 사람이 곧 여래이므로 보는 사람이 곧 여래라 해석한다. 왜냐하면 여래를 본다고 하면 보는 자와 보는 것이 따로 떨어져 이중관(二重觀)이 되기 때문이다.
둘째는 "응무소주 이생기심"이다.
응무소주 이생기심이란 "마땅이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쓴다"하는 말이다.
머무른 바 없이 마음을 쓴다는 것은 조건없이 마음을 쓴다는 말이다.
자동차 운전수가 길을 가다가 스톱사인이 있는 곳에 가서 선다든지 아니면 갑자기 사람이 나타나 스톱할 때는 이것을 조건반사라 하지만 불을 때다가 갑자기 뜨거운 김에 손이 데이게 되면 즉시 손을 들고 나오는데 이것은 무조건반사라 한다.
그런데 지금 "응무소주 이생기심"이란 한 것은 무조건반사이다.
이렇게 하여야 되겠다 저렇게 하여야 되겠다 조건을 달아서 하는 것은 유주기심(有住其心)이고 착하나 착하지 않으나 미우나 고우나 일을 당하게 되면 거기에 알맞게 적응하게 되는 것을 무주기심(無住其心)이라 한다.
가령 어떤 사람이 독화살을 맞았다고 치자.
독화살이 몸에 박혀 있는데 그 화살을 뺄 생각은 하지않고 누가 만들었는가?
무엇으로 만들었는가? 길이는 얼마고 넓이는 얼마인가?
이런 것을 낱낱이 따지고 있으면 그 동안에 몸속에 독이 배어 죽고 말 것이다.
이럴 때는 이런저런 생각없이 화살을 쑥 빼어 내던지고 아픈 곳을 먼저 치료하여야 한다.
아무 곳에도 아무 것에도 집착없이 지금 곧 그 자리에 충실하는 것이 응무소주 이생기심이다.
육조 혜능스님은 바로 이 글귀를 듣고 도를 깨쳤다.
나무를 하여 생계를 유지하던 스님이 16세 소년으로 나무를 팔러 어느 여관집에 들렀다가 어느 객스님께서 이 경 외우는 소리를 듣고 마음이 환히 열렸다니 어떻게 훤히 열렸고,깨쳤다니 무엇을 어떻게 깨달았다는 말인가?
나도 여기서 지금 "응무소주 이생기심"이란 말을 두 세번 씩 하고 있는데 여기 듣는 분께서는 육조대사가 없는가?(하하하)
육조대사가 되신 분은 한번 손들어 보아요(대중은 서로 얼굴을 쳐다보며 얼굴을 붉혔다) 내 보니 모두가 육조인데 육조심이 아직 형성되지 않았을 뿐이다.
셋째 "약이색견아 이음성구아 시인행사도 불능견여래이다" 하는 글귀이다.
만일 겉에 나타난 색상을 보고 나라 하거나 나의 소리를 듣고 나라고 한다면 이 사람은 사도를 행하는 사람이라 능히 여래를 보지 못한다란 말이다.
부처님은 겉으로 나타나 있는 분이나 귀에 들리는 소리를 하는 분이 부처님이 아니고 그것을 움직이는 마음이 부처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모든 사람들은 겉모습을 보고 그 속심은 별로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지금 여기서 이런 말을 하더라도 이것은 말이 말이 아니요,소리가 소리가 아니다.
또 숭산행원도 숭산행원이 아니어,속에 들어있는 숭산행원을 보지 못한다면 백번 듣고 보고 하더라도 당신들의 실생활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이다.
다만 내 말과 모양을 통하여 사행(邪行)을 무너뜨리고 정행(正行)을 할 수 있는 길이 열린다면 그것이 오늘 법을 듣는데 얻어지는 보람이다.
그러니 법을 듣는 자는 마땅히 그 소리를 듣고 아는 자신의 부처를 보아야 할 것이다.
넷째는 "일체유위법 여몽환포영 여로역여전 응작여시관이라" 하는 글귀이다.
일체유위법은 꿈, 허깨비, 물거품, 그림자, 이슬, 전기와 같으니 그렇게 보라는 말이다.
조작된 모든 법은 꿈결처럼 변해가고 허깨비처럼 나타났다 없어지고 거품처럼 일어났다 스러지고, 그림자 같이 인과를 따르고 이슬처럼 허망하며,전기처럼 번득거린다.
이렇게 볼 줄 아는 자라야만 몽환의 방편과 포영(泡影)의 기지(機智)와 로전(露電)의 수연행(隨緣行)으로 여래행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금강경은 겉모습에 딸려사는 모든 중생들에게 실속있는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일러주신 반야대전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