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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경

10. <금강경 해설>흔적 없는 마음 - (4상)

작성자향상일로|작성시간24.04.22|조회수83 목록 댓글 0

무수한 중생 제도해도 보살 마음엔 흔적 없어

 

부처님이 수보리에게 이르셨다. 모든 보살과 마하살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無上正等覺, 모든 부처님이 얻은 바른 최고의 깨달음)를 얻고자 마음을 낼 때 마땅히 다음과 같이 마음을 두고 자기 마음의 항복을 받아라. ‘존재하는 모든 중생은, 난생이건, 태생이건, 습생이건, 화생이건, 모양이 있건 없건, 생각이 있건 없건, 생각이 없는 것이건 없는 것도 아니건, 나는 모두 무여열반으로 인도하겠다.’ 하지만, 보살이 이렇게 무수히 많은 중생을 멸도하더라도, 실제로 멸도한 중생은 하나도 없다. 왜냐하면 보살이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이 있으면, 보살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상은 인도인이 가지고 있던

‘나’에 대한 사유이자 큰 오해

‘금강경’은 이에 대한 처방전

불교는 고정불변의 존재 부인

 

이 세상 끝까지 찾아가 무수한 중생을 제도해 놓고도, 왜 보살의 마음에는 흔적이 없을까?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이 없기 때문이다. 일체의 ‘나라는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 사상(四相)은 당시 인도에 있던 네 가지 종류의 ‘나’이다. 인도인들의 ‘나’에 대한 대표적인 사유이다.

 

아상(我相)의 아(我)는 우리 안에 있다는, 모든 육체적·정신적 행위의 주체라는, 불변(不變)의 불생불멸(不生不滅)의 존재이다. 태어나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 영원히 변하지 않는 정체성을 지닌 존재이다. 소위 힌두교의 아트만(atman)이다.

 

인상(人相)의 인(人)은 중음신(中陰身)이다. 이 생에서 저 생으로 넘어가는 사이에 존재하는, 임시적인 존재이다. 이 몸이 죽고 아직 저 몸을 받기 전의 존재이다. 소위 푸드갈라(pudgala)이다. 초기불교에서는 이런 존재를 부인한다. ‘밀린다왕문경(Milindapanha)’에도 나오듯 환생은 ‘즉각적으로’ 일어나기 때문이다. 이 경전은 이를 ‘장사가 굽은 팔을 펴듯’, ‘상이 거울에 맺히듯’ (즉각적)이라고 멋지게 묘사한다. 부처님이 세상을 떠나시고 긴 시간이 흐르자, 불법의 정체성을 뒤흔드는, 사상(四相)이라는 초대형 오해가 생겨난 것이다. ‘금강경’은 그에 대한 처방전이다. 정법이 지속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사례이다.

 

중생상(衆生相)의 중생(衆生)은 부처와 다른 종(種)의 생명체이다. 불교는 ‘생명체를 부처와 중생으로 가르는’ 이분법을 배격한다.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애벌레와 나비는 결코 다른 생명체가 아니다. 둘 사이에 넘을 수 없는 종(種)의 장벽이 있는 것도 아니다. 대승 ‘열반경’은 영원히 성불할 수 없는 일천제(一闡提, icchantika)의 존재를 부인한다. 모든 애벌레는 나비가 된다. 이게 불교의 입장이다. 애벌레가 나비가 되는 걸 막는 장벽을 없애는 법이 불법이다. 물론 이 벽은 마음의 벽이다. 누구나 구구셈을 배울 수 있듯이,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 이생에 안 되면 다음 생에 되면 된다.

 

수자상(壽者相)의 수자(壽者)는 청정무구한 존재이다. 영원히 죽지 않아 수명이 무한하다. 소위 자이나교의 지바(jiva)이다. 이 청정무구(淸淨無垢)한 지바에 업(業 karma)이라는 때가 달라붙어 오염시킨다고 한다. 자이나교에서 업은 비물질이 아니라 미세한 물질이다. 현대적 용어로는 ‘업 소립자(karma particle)’이다. 이것은 너무 미세해서 눈에 안 보인다고 한다. 육안에 안 보이는 건 당연하다. 세상에 소립자를 육안으로 보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순수영혼 지바에 달라붙은 때를 다 떼어내면 열반을 얻는다고 한다.(소위 때밀이 열반이다! 때를 밀고 밀어 마침내 뽀얀 속살이 드러나면 그게 열반이다.) 떼어내는 법은 고행이다. 불교와 가장 가까운 종교가 자이나교이지만, 부처님은 고행을 버렸고 마하비라는 버리지 않았다.

 

자이나교의 수자는 고정불변의 존재이다. 불교는 그런 존재를 부인한다. 십이연기는 변화와 생성의 과정이다. 주역의 수시변통(隨時變通)이다. 무명이 행을, 행이 식을…, 유(有)가 생을, 생이 노사를 형성하는 과정이다. 하지만 사(死)로 끝나는 게 아니라 사가 다시 무명을 형성하는, 과거에서 현재로 현재에서 미래로, 꼬리에 꼬리를 무는 나선형 구조이다. 이미 있는 걸 찾는 데는 고행이 필요하지만, 없는 걸 만들어가는 과정에는 지혜가 필요하다.

 

강병균 포항공대 수학과 교수 bgkang@postech.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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