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리석은 자는 단지 겉모습으로 판단한다.
‘수보리 어의운하 가이신상 견여래부. 불야세존 불가 이신상 득견여래. 하이고 여래소설신상 즉비신상. 불고수보리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부처라면 누구나 32상 갖춰
업은 몸과 입과 마음에 배어
무아론은 동양서 인기 없어
신통력 있는 신들 등장 배경
얼굴은 신분증이다. 모든 사람의 얼굴이 똑같이 생겼다고 상상해 보라. 어떻게 구별할 수 있겠는가? 누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알 수 없을 것이다. 매번 신분증을 확인해야 할 것이다.
비슷한 쌍둥이도 구별하기 힘든데 똑같이 생기면 정말 힘들 것이다. 일반인의 눈에 치타 호랑이 코끼리 고래는 다 똑같이 보인다. 전문가들은 이들을 얼굴 무늬, 귀가 갈라진 형태, 몸통과 지느러미에 붙은 조가비가 만드는 무늬로 구별을 한다. 동물들은 아마 냄새로 구별할 것이다.
수행자들을 어떻게 구분할까? 도가 높고 낮은 것은 신·구·의 삼행으로 구분할 수 있다. 하지만 범인의 눈에는 여전히 어렵다. 천안은 고사하고 혜안·법안·불안도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처는 부처만 알아볼 수 있다'는 말이 있다. 누구나 부처를 알아볼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그게 32상이다. 부처라면 누구나 이걸 갖춘다는 것이다. 물론 역은 성립하지 않는다. 전륜성왕도 32상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들 이외에는 없으므로 32상을 갖춘 자를 보면 ‘아 저분이 부처로구나’ 생각해도 50%는 맞다. 32상은 부처 신분증이다.
사람들은 가지고 태어난 얼굴 바탕에 자신의 삶을 붓으로 삼아 새 얼굴을 만들어 간다. 살아온 삶에 따라, 한 일에 따라, 뱉어온 말에 따라, 행한 사유에 따라, 몸짓·말짓·맘짓에 흔적을 남긴다. 그게 32상이다. 남을 잘 때리는 자는 손 관절에 군살이 배고, 나쁜 짓을 하는 자는 도망 다니느라 종아리에 알이 배고, 아첨을 하는 자는 비열한 웃음을 짓는 특수한 안면근육이 발달해 얼굴에 밴다. 평소 짓는 표정과 몸짓과 마음 씀씀이가 몸 입 마음에 밴다. 제2의 천성이 된다. 저절로 배어나온다.
누구나 윤회와 카르마를 주장할 때 무엇으로 자신의 차별성을 획득할 수 있을까? 도와주는 신이 없을 때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민중이 귀의할 수 있을까? 민중은 기본적으로 정신력이 낮다. 특히 2500년 전에는 훨씬 더했다. 민중은 소나 말 같은 노예상태였고, 보통교육의 부재로 지성이 미약했다. 그래서 무아론은 힘이 약했다.
민중은 천상을 희구하지 않는다. 너무 추상적이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극락이 발명되었다. 누구나 가서 살고 싶은 이상세계를 제시했다. 이는 기독교와 비슷하다. 예수만 믿으면 천당에 가듯이, 아미타불만 부르면 극락에 간다. 유대교에는 천국개념이 없지만 기독교에는 천국개념이 잘 발달했다. 비슷한 시기에 불교에도 극락이 도입되었다.
아시아에 처음 들어온 (초기)불교는 인기가 없었다. 대승불교가 들어오면서 ‘아함경’은 잊혀졌다. ‘아함경’의 부처는 스토아 철학자적이다. 이런 인물은 현세적인 중국인들에게 맞지 않는다. 아소카왕(BC 304~BC 232)이 이집트·그리스·마케도니아까지 불교 전법단을 보냈지만 성공하지 못한 것도 같은 이유이다.
인간의 삶에 무수히 관여하는 다채로운 신들이 있는데, (범인들이 보기에) 무미건조한 짧은 풀만 자라는 (신이 없는) 황무지 같은 불교를 믿을 이유가 없다.
실크로드를 오가는, 기후·도적·독충·사막·전쟁 등 온갖 위험에 노출된, 상인들이 믿은 불교는 지은 업(운명)에 순응하라는 스토아적 불교가 아니다. 신통력을 발휘해 신자들을 보호해주는 신격존재들이 있는 불교이다.
이런 존재는 조잔하게 업만 계산하지 않고, 귀의자가 눈물을 흘리며 간구하면 감동해, 지은 업에 관계없이 풍성한 은혜를 내린다. 돈황석굴 벽화에도 남아있는 우전왕 설화가 이를 증명한다. 벽화에서 부처가 우전왕이 조성한 불상에 무릎을 꿇고 예를 표한다. 이 불상은 실크로드와 중국에 영험하기로 소문이 났다. 그래서 제조자가 불투명하고 의심스러운 복제품들이 나돌았다.(진품 행세를 하기도 했다.)
강병균 포항공대 수학과 교수 bgkang@postech.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