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변의 세계 없기에 연기는 만물을 하나로 묶는다.
‘수보리 어의운하 여래석재연등불소 어법유소득부? 불야세존. 여래석재연등불소 어법실무소득.
법을 얻었다는 생각 있으면
여전히 분별심 남아있는 것
구별해 임의로 이름 붙여도
일체 흐름은 영속적 이어져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가 까마득한 옛날에 연등불 회상에서 얻은 법이 있을까? 아니옵니다. 얻은 법이 없사옵니다.’
법을 얻었다는 생각이 있으면 아상(我相)에 사로잡힌 것이다. 주객(主客)이 공(空)하기 때문이다. 궁극적으로 볼 때, 깨달음은 연기현상(緣起現狀)이다. 일체 배움과 인식도 연기현상인데 하물며 깨달음이랴. 그래서 얻은 바 법이 없는 것이다. 물론 아직 배움의 길에 있는 사람은 얻는 게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다 배운 사람 입장에서는 배운 게 없다. 교학(敎學, 가르치고 배우는 것)은, 제자와 스승과 때와 환경 사이에 일어난 연기현상이기 때문이다. 누가 누구를 가르치고, 누가 누구에게 배운단 말인가? 비가 오듯, 눈이 내리듯, 바람이 불듯, 산불이 나듯, 달빛이 내리듯, 주체(主體)가 없이, 가르침과 배움이라는 현상이 벌어지는 것이다. 작은 법을 즐기는 자에게는 주체가 있고, 큰 법을 즐기는 자에게는 주체가 없다(若樂小法者 卽 我見人見衆生見壽子見).
‘내가 무엇을 얻었다’는 생각은 의식과 아상(我相)이 있으므로 일어난다.
일체는 흐름이다. 연속이다. 시간적으로도 연속이고, 공간적으로도 연속이다. 이 시점 이전은 아이(올챙이)이고, 이 시점 이후는 어른(개구리)인, 그런 시점은 존재하지 않는다. 연속적인 변화가 있을 뿐인데, 사람들은 ‘아이다’ ‘어른이다’ 분별한다. 아이나 어른은 편의상 만들어진 말일 뿐이다.
이 선 밖은 외국(외설악)이고, 이 선 안은 우리나라(내설악)인, 그런 선은 존재하지 않는다. 땅은 모두 연결되어 있어 구분되어 있지 않건만, 사람들이 짐짓 분별하여 이름을 붙인다.
생물도 마찬가지이다. 이 시점 이전 또는 이 표면 밖은 내가 아니고, 이 시점 이후 또는 이 표면 밖은 나인, 그런 시점이나 표면은 존재하지 않는다.
생물의 특성을 결정하는 DNA·유전자도 마찬가지이다. 작게는, 여기까지가 유인원의 DNA·유전자이고 그 다음부터는 인간의 DNA·유전자라는 그런 경계선은 존재하지 않는다. 크게는 식물과 동물의 경계선도 존재하지 않는다.
진화의 역사에서 모든 생물은 연속선상에서 존재한다. 분리되어 떨어진 존재는 없다. 35억 년 지구 생물역사상 존재한, 모든 생물의 DNA 유전자는 거대한 한 그루 나무이다. 의식도 연속이다. 이 시점 이전은 의식이 없고, 이 시점 이후에는 의식이 있는, 그런 시점은 존재하지 않는다. 생물계에는 수많은 의식이 존재한다.
진화의 역사에서 모든 생물은 연속선 위에 존재한다. 분리되어 떨어진 존재는 없다. 35억 년 지구 생물역사상 존재한, 모든 생물의 가지가지 의식은 거대한 한 그루 나무이다.
35억 년 전부터 의식은 점차 연속적으로 변해왔다. 의식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듯한 의식으로부터 물고기·파충류·포유류·영장류·유인원·인간의 의식으로 진화를 해왔다. 이 중 어디서부터를 의식이라 해야 할까? 당신은 나눌 수 있는가? 의식은 연속적으로 이어져 있다. 인간이 짐짓 분리해, 여기서부터 의식이고 그 전은 의식이 아니라고 한다. 분리해 보지 않고 하나로 보면, 즉 끊어진 게 아니라 연속된 것으로 보면, 의식과 자아에 대한 환상과 망상에서 벗어난다. 그러면 신과 아트만의 아귀에서 벗어난다. 진정한 무아(無我)와 연기(緣起)를 깨닫는다.
힌두교와 기원전 5세기경의 그리스 철학자 파르메니데스와 같은 사람은 변화하는 현상계의 존재를 부인하며, 즉 연기법을 부인하며 현상계 배후에 불변의 세계가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아예 변화와 운동을 부인한다. 힌두교는 ‘현상계는 브라흐만의 꿈’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세상이 하나인 것은 변하기 때문이다. 변화를 통해서 서로 상호작용하기 때문이다. 연기(緣起)는 만물을 하나로 묶는다. 이것이 저것이 될 수 있으므로 하나이다.
강병균 포항공대 수학과 교수 bgkang@postech.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