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식 전환으로 얻은 자유, 수행자를 통곡케 해
‘수보리야, 너에게 진실로 묻노니, 만약에 선남자 선녀인이 갠지스 강 모래 수만큼의 우주를 가득 채운 보석으로 보시하면 그 복이 크다고 생각하느냐?’
‘금강경’은 물질세계에서
영적세계로 점프케 하고
35억년 정체성 때려부셔
무한한 자유를 선사한다
물질적 보시와 정신적 보시는 차원을 달리한다. 물질적 세계에 살던 사람에게 정신적 세계의 열림은 거듭남이라고 해야 할 정도로 충격적인 세계이다.
기독교 복음서에서 죽은 육체가 다시 살아나거나, 육체를 지닌 채로 승천하거나, 군사를 일으켜 로마제국을 물리치고 이스라엘을 재건하거나, 천군(天軍)을 거느리고 악의 무리를 물리치고 지상을 신의 왕국인 낙원으로 바꾸는 것은 다 물리적인 일이지만, 요한복음이 예수를 말씀(Logos)이라는 비물질적인 존재로 보는 것은 퀀텀 점프이다. ‘사람이 빵만이 아니라 말씀으로도 산다’는 것은 위대한 영적 세계로 들어선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말이다. ‘주여, 내 영혼이 굶주리나이다’라는 고백은, 당신이 황량한 정신적 사막에서 나에게 열어준 정신의 세계는 영적 하늘에서 내리는 ‘만나’라는 말이다. ‘내가, 주가 없다면, 누구와 더불어 대화를 나누리까’ 탄식한다. 물질적 세계에서 깊은 잠에 빠져있는 사람들 중에서 홀로 깨어 사방을 둘러보는 이의 쓸쓸함이다. 부처도 정각(正覺)을 이룬 후 그런 쓸쓸함을 느꼈다. 스승으로 섬길 이도 더 이상 없었고, 자기가 깨달은 바를 듣고 이해할 이도 없었다. 그래서 열반에 들려고 했다. 여러 날 동안의 망설임 끝에 마음을 돌이켜 위대한 세계를 열어 보이신 부처님께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금강경’은 물질적 세계에서 영적 세계로의 퀀텀 점프 안내서이다. 고누만 둘 줄 아는 이에게 바둑을 가르치는 격이다. 홀로 격리된 독립체로서의 육체적 정체성에 갇혀 있는 사람에게, 이미 무르익어 벗어나려는 사람에게, 정신적 정체성을 부여하는 가르침이다. 그 정체성은 무아연기체(無我緣起體)로서의 정체성이므로, 정체성이되 동시에 정체성이 아니다.
‘금강경’은 35억년 동안의 정체성을 때려 부수는 혁명서적이므로, 그리고 그 결과 무한한 자유를 선사하므로, ‘금강경’이라는 벼락을 보시하는 것은 삼천대천세계를 가득 채운 보석으로 하는 보시보다 더 큰 보시이다.
부처님이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만약 선남자와 선녀인이 이 경에서 사구게(四句偈) 등을 받아 지니고 읽고 송하며 다른 이들을 위해 설하면, 이 복은 앞의 복보다 더 낫다.
에드워드 윌슨에 의하면 생물은 꼭 감정을 가질 필요가 없다. 실제로 지구 생물 대부분이 감정이 없다. 무게 총량이 가장 큰 곤충은 감정이 없다. 뇌도 작고 변연계도 없다. 감정은 고도의 복잡계이다. 외부와 소통을 안 하는 자폐아들이 놀라운 천재성을 발하는 것은 감정이 단순하기 때문이다. 이들은 정상인들이 감정에 쓰는 뇌 용량을, 다른 데 쓰기 때문이다.
윌슨의 이야기를 이어 따라가 보자. 감정은 진화의 과정에서 우연히 생긴 것이다. 따라서 우주 어딘가에는 감정이 없는 고등생물이 있을지 모른다. 이들은 우리보다 지능이 엄청나게 높아서 자연과학은 엄청나게 발전했을 수 있으나, 인간이 이룩한 인문사회학은 없을 수 있다고 한다.
감정은 또 하나의 차원이다. 감정이 있음으로 인하여 시와 노래와 그림이, 음악과 문학과 미술이 가능하다. 차가운 자연과학의 무표정한 얼굴에 따뜻한 피와 눈물이 흐르게 한다. 수보리가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감동해 눈물을 흘리며 흐느껴 울 수 있는 것은 감정이 있기 때문이다. ‘금강경’은 그 장면을 생생하게 중계한다. 결코 다른 종교 경전에서는 볼 수 없는 장면이다. ‘천상의 독재자’인 신으로부터 받은 은혜나 구원에 감격하는 일은 있어도, 이런 일은 없다. 주체적인 해방(해탈)은 없다. 인식의 전환으로부터 얻은 자유는, 수행자로 하여금 저절로 통곡하게 만든다. 그리고 이런 전통은, 지금도, 수많은 이들이 명상 중에 흘리는 눈물로 이어진다. 이 감정은 자비의 근원이고, 자비는 보시의 근원이다.
강병균 포항공대 수학과 교수 bgkang@postech.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