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아상이 물질과 사건에 대한 집착 줄여줘
그때가 언젠지 아무도 모르는 아주 먼 옛날에, 가리왕이 사냥을 나갔다. 따라간 궁녀들이 눈에 보이지 않자 찾아 나선 왕은, 그들이 동굴 속의 선인과 함께 있는 걸 보고 분노하며, 선인의 온몸을 칼로 갈가리 잘랐다. 그런데 선인은 증오가 일어나지 않았다. 이 선인이 전생의 부처님이다. 욕됨을 잘 참아 인욕선인이다. 속된 말로 참기달인이다. 하지만 불자들이 곤경을 당할 때 흔히 스스로 위로하듯이, 전생의 업이기 때문에, 즉 마땅히 받아야 할 일이기에 증오가 일어나지 않은 게 아니다. (금강경은 그렇게 수준이 낮지 않다. 인천교(人天敎)가 아니다. 그렇지 않다면 감히, 그보다 더 높은 경지가 없는, 무상정등각을 논할 수 없다.)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이 없었기 때문이다. 즉, 일체의 ‘나라는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인욕선인은 사지가 잘렸지만
가리왕에 대한 증오 안 생겨
일상의 작은 욕됨 못 참으면
큰 욕됨도 당연히 참지 못해
선정에 들어 육체적인 고통을 차단하는 경우가 있다. 일종의 자가 마취법이다. 한암 스님의 제자 보문 스님의 예가 있다. 그는 선정에 든 상태로 마취제의 도움 없이 수술을 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선정에서 나오면 고통이 되살아난다. 아마 깨어난 뒤 엄청난 고통이 찾아왔을 것이다.
인욕선인은 의식이 살아있었다. 증오심은 의식이 살아있을 때 생긴다. 선정 중에는 생기지 않는다. 인욕선인은 생생한 의식 중에 사지가 잘리는 고통을 당했지만, 가해자 가리왕에게 증오심이 생기지 않았다. 아상이 없었기 때문이다. 무아상(無我相)은 세상에 대한, 즉 일체의 현상에 대한, 즉 물질과 사건에 대한 집착을 줄이고 없애준다. 부처님은 육체적인 고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불경에는 부처님이 요통·두통·이질 등으로 치료받으신 기록이 남아있다.) 살아있는 의식으로 삶을 주체적으로 사는 게 깨인 자의 삶이기 때문이다. 선정의 세계로 도망가는 게 아니다.
그래서 유여열반이다. 마음은 번뇌로부터 해탈하였으나, 몸은 업신(業身)인지라 한서(寒暑, 추위와 더위)와 기아와 질병과 통증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육체적 번뇌에 해당하는 육체적 고통이 남아있기에 유여열반이다. 업은 많은 경우에 육체로 온다. 세상에는 병원이 많지만, 병은 병원을 넘칠 정도로 많다. 몸에 기형도 많다. 예를 들어 손가락이 더 많거나, 짧거나, 굽거나, 몇 개가 서로 붙은 기형이 있다. 수지성형(手脂成形) 전문의 한 명이 일 년에 300회 정도 수술을 할 정도로 많다. 이 업신(業身, 35억 년 진화의 결과로 만들어진 몸)이 마지막 숨을 내쉬면 무여열반이다. 몸과 마음이 모두 해탈에 든 것이다. 이처럼 마음보다는 몸이 우리 맘대로 안 된다. 그리고 사람들의 고통은 대부분 몸으로 온다. 의식주가 바로 그런 것 아닌가? 그래서 몸의 고통마저 벗어난 무여열반이라는 표현이 생긴 것이다.
그리고 생물체는 고통이 없으면 살 수가 없다. 신경계가 바로 고통이기 때문이다. 신경계는 경보체계이다. 경보는 통증으로, 심각성은 통증의 강도로 나타난다(그래서 무통증(無痛症 analgesia) 환자는 위험을 감지하지 못해 잘 다치고 빨리 죽는다). 육체적 신경계는 육체적 고통을 야기하고, 정신적 신경계는 정신적 고통인 번뇌를 야기한다. 신경계가 없어 고통이 없는 무정(無情)에게는 고통으로부터의 해탈도 없고, 무지·무명(無智·無明)으로부터의 깨어남도 없고, 번뇌로부터의 열반도 없다. 그래서 고(苦)와 락(樂)은, 번뇌와 열반은 하나이다.
독실한 기독교인들 중에는 자기가 예수님 생존 시에 유대 땅에 태어났으면 예수의 열두 제자가 되었을 거라며 무척 아쉬워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자기들은 당시 열두 제자들처럼 주님이 수난을 당하던 날에 도망을 가지 않고 주님 곁을 지켰을 거라고 자신한다. 그런데 이들은 일상생활에서의 조그만 괴로움에도 불평을 하고 조금이라도 피해를 당하면 가해자에게 험한 욕을 한다.
일상에서의 작은 욕됨을 참지 못하면 큰 욕됨은 당연히 참지 못한다. 가리왕이 우리 일상에 작은 모습으로 찾아올 때 인욕하면, 우리는 작으나마 인욕선인이 된다.
강병균 포항공대 수학과 교수 bgkang@postech.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