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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경』과 공사상(空思想), 그리고 복전운동(福田運動)

작성자향상일로|작성시간15.11.11|조회수275 목록 댓글 0

『금강경』과 공사상(空思想), 그리고 복전운동(福田運動)

안심정사 법안스님

 『금강반야바라밀경(金剛般若波羅密經)』은 줄여서 『금강경』이라고 한다. 불교의 공사상을 흔히들 가장 많이 오해를 한다. 모든 것을 비우라는 뜻이라고 단순하게 이해하는데서 생기는 오해이다. 적어도 한국에서는 『금강경』을 오늘날까지 그렇게 이해하고 공부하여 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조금만 그런 선입견을 갖지 않고 『금강경』을 읽어본다면 그런 내용이 결코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러나 『금강경』을 접하기 전에 불교에 대한 무지와 선입견이 그것을 알아채지 못하도록 막고 있다.

『금강경』은 중국의 교상판석(敎相判釋)에 의하면 대승시교(大乘始敎)이다. 즉 소승불교에서 대승불교로 전환되는 시작점에 있는 가르침이라는 말씀이다. 그것은『금강경』은 소승의 4향4과중의 마지막 단계인 아라한과를 최종목표로 수행하여 증득한 수보리존자라는 걸출한 제자와 석가세존의 대화 내용이라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는 바이다. 이 대화를 통하여 소승 아라한이 터득한 공성(空性)을 보리심(菩提心)으로 바꾸기 위하여 어떻게 하느냐는 물음에 답하면서 『금강경』은 그렇게 시작되고 또 마무리된다.

 대승불교는 한마디로 말하면 보리심(菩提心)을 바탕으로 하는 복전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보리심과 복전이 둘로 나뉜다는 것은 아니다. 아라한이신 수보리존자께서 이미 계율과 선정을 통하여 일체지를 증득한 아라한이 되었으니 열반에 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하다가 문득 자신과 같이 무한 세월동안 삼악도에서 고통 받아오는 중생들을 돌아보면서, 수보리존자께서 생각을 바꿔먹으면서 금강경은 시작된다. 그것이 「선현기청분(善現起請分)」 또는 「선현계청분(善現啓請分)」이라고 한다. 이 사바세계에서 몸을 머물면서, 열반으로 향했던 그 강력한 염원, 그 마음을 어떻게 항복받을 수 있는지에 대하여 세존께 여쭈면서 『금강경』은 시작된다.

『금강경』은 공성(空性)을 말하는 경전이 아니다. 이미 공성을 체득한 아라한이 아누다라삼먁삼보리심 곧 무상정등정각(無上正等正覺)의 마음을 내는 것에 대하여 묻는다. 무상정등정각이 무엇인가를 물어야 한다. 무상정등정각이란 바로 육바라밀, 즉 복전운동이 시작되는 것이다. 여기서 무상정등정각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한다. 금강경에서 말하는 무상정등정각은 육바라밀의 초기적 실천, 즉 보시바라밀을 중점적으로 말씀하신다. 초기적 실천이란 것은 아직 궁극의 육바라밀 모두의 실천에 들어가지 못한 것을 말하는 것이다. 보시바라밀이 바로 반야바라밀이라는 의미의 가르침이다. 궁극적 실천이란 그 보살사상의 심화(深化)인 대승종교(大乘終敎)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이나 대승돈교(大乘頓敎)인 『지장보살본원경』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금강경은 대승시교에 들어가는 것이다. 굳이 따지자면 무상정등정각의 궁극이 대승종교(大乘終敎)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이나 대승돈교(大乘頓敎)인 『지장보살본원경』이고, 그 핵심은 육바라밀 수행이라는 의미이다. 육바라밀을 수행하는 이를 보살이라고 하고, 보살이 가진 마음을 보리심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렇게 이해하면 아주 쉬운 것이다.

보리심, 즉 깨달음의 마음이란 바로 육바라밀을 실천하는 마음이요, 자리이타(自利利他)를 실천하여 가는 과정이다.

첫 번째 단계는 자신이 먼저 자신의 앞가림을 해 나아가는 것이다.

자신이 행복하고 성공적 인생을 살아가라는 것이다. 그렇게 하여 자신의 행복과 성공을 이웃과 나눌 수 있는 충분한 준비가 되어지면 그것이 바로 둘째 단계로 올라가는 것이다.

두 번째 단계는 자신과 이웃이 함께 이롭게 하는 것이다.

나눈다는 뜻이다. 자신의 행복과 성공을 사회가 공유하도록 재물로 나누고, 지식으로 나누고 가진 것도 없고, 배운 것도 없다면 육체적 노동으로 나누고, 그것도 안되면 무재칠시(無財七施)와 남이 지은 공덕을 함께 기뻐하는 수희공덕(隨喜功德)을 짓는 것으로 나누라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복을 지을 수 없는 사람은 없다고 하신 것이다.

세 번째 단계는 오직 보살도를 실천하는 것이다.

  금강경에서 말씀하신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이다. 마땅히 색성향미촉법에 머물지 말고, 청정심을 내라는 것이다. 색성향미촉법은 우리의 눈,귀,코,혀,몸, 의지에 상응하는 대상이니 환경을 말하는 것이고, 보살은 환경에 얽매이지 말고 즉 응무소주하고 그러면서 이생기심, 즉 청정심을 내라는 것이다. 청정심은 탐심, 분노, 우치, 교만, 의심, 악견을 이른 말씀이다. 일체를 아는 아라한도 보살도를 실천하면서 중생과 여민동락하면서 빠질 수 있는 함정들을 말씀하여 주시는 것이다. 오직 법화경의 대표격이신 관세음보살이 되고, 지장경의 지장보살 역할을 하라는 말씀이다. 이것은 오직 보살마하살들이 하시는 일이지만 우리 불자들이 닮아가려고 노력함은 당연하다. 물론 당장 눈앞에서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실망할 필요는 없다.

 대승불교는 복전운동이요, 그 시작이 금강경이니 금강경을 읽으면서 육바라밀을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를 고민하여야 진정으로 금강경의 핵심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비우라든가 놓으라든가 하는 것은 단순한 선입견 내지 무지일 뿐이고, 금강경의 내용, 즉 여하시불법적적대의(如何是佛法的的大義-무엇이 부처님께서 진정으로 하시려는 말씀)과는 아무런 인연이 없음이며, 석가세존과 수보리존자의 대화를 오해하는 일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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