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 :‘남을 위하는 길이 왜 자신을 위한 길인가?.
▶법륜 스님
몇 가지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꽃을 보고 "야, 예쁘다!" 하면 꽃이 좋아요 내가 좋아요? (제가 좋지요.)
꽃을 보고 예쁘다고 칭찬해 주면, 꽃이 좋아야 할 텐데 왜 내가 좋을까?
"에이, 꽃이 뭐 이렇게 생겼어?" 하면 꽃이 나쁜가 내가 나쁜가? (제가요.)
그러니까 남을 좋게 잘 봐 주면, 칭찬하는 말을 해 주면 누구한테 이익이라고? (저한테요)
"그 인간, 뭐 그런 인간이 다 있어~!" 하면 자기 마음이 불편한 거예요.
남을 사랑하면 그 사람이 좋기 이전에 나 자신이 좋습니다.
그런데 사랑에 괴로움이 따르는 것은 내가 사랑해서가 아니라 사랑 받으려는 마음 때문입니다.
'내가 너를 사랑하니까 너도 나를 사랑해라' 이런 마음인데, 그렇게 안 해 주니까 괴로운 겁니다.
여러분 남편이 미운 것은, 남편이 사랑 안 해 줘서 그래요 내가 사랑 안 해서 그래요?
내가 사랑하지 않아서 그런 거예요. 물론 이유야 다 있겠지만 어쨌든 심리작용에 사랑하는
그 마음에는 아무런 부작용이 없어요.
사랑 받으려는 마음이 있을 때 괴로움이 생기고 미움이 생기고, 그러는 겁니다.
여러분이 꽃이나 산, 바다를 좋아할 때는 '내가 좋아하니 너도 좋아해라.' 하는
대가성이 없어서 아무리 좋아해도 부작용이 없지만,
사람을 좋아할 때는 '내가 좋아하니 너도 나를 좋아해야 되지 않느냐?'
이렇게 거래를 하는 마음이 생기는데 상대방이 그렇게 안 해 주니까 미운 겁니다.
이해가 되지요? (네)
그런데 여러분은 사랑 하려고 그래요 받으려고 그래요? (받는 게 좋죠)
그러니까 괴로운 거예요. 그래서 뭐든지 베풀려는 마음을 내면 부작용이 없어요.
베풀지도 않고 받으려고 하는 사람은 법부중생은 이치에 맞지 않으니까 괴로울 수밖에 없고,
베풀고 이자 붙여서 받으려고 하는 사람은 안 됐을 때 부작용은 더 큽니다.
그리고 성인은 베풀되 받으려는 생각이 없다. 사랑하되 받으려는 생각이 없다.
이것은 아무 부작용이 없습니다. 그래서 성인은 괴로움이 없다. 이 말입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사랑을 한다' 하면서도 사실은 거래관계, 장사속이에요.
그래서 내가 '결혼관계도 사실은 그런 관계이다.' 해서 결혼을 '사랑'이라면
장사 속으로 계산하지 말고, '장사'라면 밑지는 것을 각오해라.
얼굴을 보고 결혼했는데, 인물에 투자했는데, 나중에 보니까 뭐 습관이 문제다,
성격이 안 맞는다, 도움이 안 되면 실망하고 싸우고 그러는데 아예 애시 당초
생활습관과 성격을 더 살펴보고 했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친구들하고 놀러 가는데
짐을 들어주고 하는지 고기를 구울 때 구워서 잘라 주는지 이런 걸 잘 봐야 합니다.
그래야 나중에 결혼하면 부엌일을 도와줄지 안 도와줄지 그래도 짐작이라도 할 수
있지 않겠어요?
결혼을 장사 속으로 할 때 하더라도 장사를 똑바로 해야 하는데 '장사'라면, 투자를
잘못했으니까 책임은 본인이 져야 합니다. 상대를 미워할 필요가 없어요. 같이 살든
안 살든 미워하지는 마라. 미워하는 것은 자신의 인생에 대해서 책임을 안 지려는 자세다.
장사라면 '장사'로 똑바로 계산해라. 그래서 내가 책을 쓰면서 '사랑 좋아하시네!' 이렇게
붙였더니 출판사에서 제목이 너무 세다고 해서 바꾼 게 '스님의 주례사'입니다.
내용을 요약하면 뭐라고요? “사랑 좋아 하시네!.”
장사를 하더라도 다른 사람한테 약간 이득을 줘야 그 사람이 좋아하겠죠?
그러면 장기적으로 나한테 이로운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이로운 것이 나중에도 이로우냐? 아닌 경우가 많습니다.
당장 눈앞의 이익만 보고 행동하면 결국 손실을 볼 위험이 높아요.
그래서 '남을 위하는 마음을 내라'는 것은 무슨 윤리도덕적인 말만이 아니고
투자로 말하면 단기투자 말고 장기투자를 해라. 이 말입니다.
현명한 사람이라면 그렇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