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우리나라와 인연이 되어 나라를 구한 이들

작성자향상일로|작성시간24.11.25|조회수26 목록 댓글 0

허황옥. 보주태후라고도 불린다. 가락국의 초대 왕인 김수로왕과 결혼하여 아들 10명을 두었다. 아들 중에는 수로왕의 성을 딴 김씨와 왕비의 성을 딴 허씨가 있다. 김해 김씨와 김해 허씨는 뿌리가 같아 서로 결혼을 하지 않았다.

 

가락국 시조에 대한 삼국유사를 토대로 한 이야기다. 삼국유사의 기사가 정확하다면 김해를 본관으로 하는 나는 더 설명이 필요 없는 혼혈인의 후손이다.

김충선

김충선을 시조로 하는 김해 김씨도 있다. 김충선은 임진왜란 때 가토 기요마사의 선봉에선 사야가라는 일본인이다. 침략 직후 자신을 따르는 부하를 이끌고 조선에 투항했다. 조선의 예의와 중화 문물을 흠모하던 그에게 임란은 명분 없는 전쟁이었다. 조선군에 합류한 뒤 전투에서 많은 공적을 올리고 임금으로부터 김충선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임금에게 받은 성이라고 해서 사성 김해 김씨라 부른다. 김충선처럼 포로가 아니라 스스로 투항한 일본 군사를 항왜라 한다. 선조실록에는 항왜가 약 1만 명에 이르렀다는 기록이 있다. 일본으로 끌려간 10만의 조선인 포로들이 서러운 이국에서 뿌리를 내렸듯이 이름 없는 항왜들도 이 땅의 민초가 되었을 것이다.

 

임진왜란은 명나라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조선을 돕느라 힘을 소진한 명나라는 몰락의 길을 걸었다. 선조가 명나라에 구원을 청했을 때 조선 파병을 강력하게 주장했던 이가 명나라 병부상서 석성이다. 전쟁 후 석성은 막대한 군비소모의 책임자로 몰려 옥에 갇혔다가 생을 마감했다. 옥사하기 전 석성은 가족들에게 조선으로 망명하라는 유언을 남긴다. 그 뒤 두 아들과 아내가 조선으로 넘어왔다. 선조는 그들에게 해주 땅을 주어 정착하게 했다. 해주 석씨의 출발이다.

 

용병으로 왔다 한반도에 눌러 앉아 우리 성씨의 뿌리가 된 장수들도 있다. 절강 시씨, 절강 팽씨, 절강 편씨, 소주 가씨, 상곡 마씨 등이다. 우리나라에서 벌어진 전쟁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 일어난 전쟁이나 내란도 귀화인을 만들어냈다. 특히 대륙이 요동칠 때마다 수많은 유민들이 한반도로 흘러들어왔다.

 

화산 이씨는 베트남 왕족인 이용상을 시조로 한다. 베트남에서 벌어진 정변을 피해 머나먼 우리 땅에 정착했다. 13세기 고려 고종 때의 일이니 오래된 인연이다.

 

우리나라와 베트남과의 교류는 베트남 전쟁으로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던 한국군은 8년 동안 32만여 명에 이른다. 어린 시절, 베트남전에 참전했던 동네 형들에게서 한국군의 용맹성을 귀가 따갑도록 들었다. 전쟁에서 용맹은 당사자들에게 씻기 힘든 희생과 상처를 뜻한다.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우리나라 성씨는 280여개. 전문가들은 그 중 45% 이상이 귀화 성씨라고 추정한다. 한때 귀화인이었지만 역사의 수레바퀴를 함께 밀고 온, 이제는 우리의 다정한 이웃들이다. 반만 년이 넘는 역사에서 조금 일찍 공동체의 일원이 되었다고 뒤에 오는 구성원을 차별한다는 것은 우스운 일이다. 몇 백 년 앞서거니 뒤서거니 한 차이일 뿐이다.

 

글 : 김종훈 울산초등학교 교장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