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의 활불(活佛) 백성욱 박사 일생

작성자향상일로|작성시간24.11.29|조회수41 목록 댓글 0

백성욱(白性郁, 1897~1981)은 1897년 백윤기의 장남으로 한성부(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연지동)에서 태어났다. 6세 때 당시 사립 초등학교인 호동(壺東)학교를 나오고 7세 때부터 글방(書塾)에서 12세 때까지 6년간 한학을 공부했다.

 

부모님 두 분을 일찍 여의고 1910년 13세에 정릉 봉국사(奉國寺)에서 최하옹(崔荷翁) 선사를 은사로 출가해 경성중앙학림을 졸업했다. 법명은 일곤(壹壼)이다. 졸업 다음 해부터 해인사, 통도사, 범어사 등 전국사찰의 유명 강원을 무려 6년 이상 돌면서 경전 공부에 몰두했다.

 

3.1운동에 가담한 사실이 드러나자 수배령을 피해 중국으로 건너가 상하이에서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이어 유럽으로 가서 프랑스 파리 보배(Beauvais)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독일 뷔르츠부르크(Würzburg) 대학교에 유학해 아비달마(Abhidharma)를 연구해 <불교순전철학>이라는 주제로 1925년 철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뷔르츠부르크(Würzburg) 대학교

 

1926년 귀국 후 29세에 드디어 모교인 불교 중앙학림의 교수로 부임했다. 1928년 이 때가 백 박사의 나이 31세로, 모든 세상일을 놓고 오대산 적멸보궁에서 100일 기도를 마친 후 얻은 바가 있어, 금강산에 입산, 장안사 소속 안양암에서 <대방광불화엄경>을 염하며 실상염불(實相念佛)에 몰입해 정진에 들어가, 철저한 성불의 길을 걸었다.

 

​1910년에 이미 그는 출가했었으나 상하이에 가서 독립운동을 하고, 유럽 유학을 하는 통해 사실상 환속한 상태였다. 따라서 1928년 오대산을 거쳐 금강산에 입산한 것은 재출가라 할 수 있다. 그리하여 재출가 직전인 1928년에 잠시 시인 김일엽(金一葉)의 연인이기도 했다. 그러나 백성욱도 입산하고, 후에 김일엽도 출가를 하게 된다.

 

어떻든 백성욱 박사의 금강산에서 <화엄경> 염불은 독특했다. 그래서 당시 불자들의 관심을 크게 사 안양암으로 많은 수행 신도들이 모여들었다고 한다. 백 박사를 따라 수행을 같이하기 위해서였다. 이러한 일 때문에 백 박사는 3년 만에 안양암에서 지장암(地藏庵)으로 수행도량을 옮겼다. 그리고 여럿이 같이 하는 회중<會中> 수도에 다시 들어갔다. 지장암에서의 이 회중 수도는 무려 7년에 달했다. 안양암 시절과 합치면 10년의 세월이다.

 

<대방광불화엄경> 전념 수행의 결과로서 백 박사는 어느 날 하루 천지 삼라만상이 소소역역昭昭歷歷(밝고 뚜렷함)하게 환연(奐然-빛남)히 나타나는 해인삼매(海印三昧)의 부사의 해탈경계를 증득했다. 이와 같은 경계에 도달한 백 박사는 그 옛날의 백 박사가 아니라 천양지판(天壤之判)으로 달라진 백 박사였다. 신상(身上)은 예와 다름없을지라도 정신은 대각(大覺)의 세계에 들었던 것이다.

 

백성욱 박사가 10년 동안의 <대방광불화엄경> 염불로 화엄의 ‘해인삼매’에 들어 부사의한 해탈경계를 이루고 불지(佛智)에 들었다는 의미다. 백 박사는 원만하고 위엄을 갖춘 덕상의 얼굴에 이마 양미간 정중앙에 둥글고 적당한 크기의 예쁘게 생긴 백호(白毫)가 돋아나 있었다(20대 독일 유학 시절의 백 박사 사진에는 백호가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성년 이후 그의 얼굴 모습은 흡사 살아 있는 부처를 보는 것과 같았다. 더욱이 금강산 ‘해인삼매’ 이후에는 신광(身光)까지 발하여 불자(佛子)들은 백성욱 박사를 보고 ‘생불(生佛)’이라 칭하기도 했다.

 

1938년 일본 경찰의 압력으로 하산했다. 이 때 백 박사 나이 41세 때 일이다. 1948년 8.15 광복 후 이듬해 1949년 동국대학교 교수로 임용되었다. 1950년 6.25가 나던 그해 2월부터 7월까지 내무부장관을 지냈다. 1952년 제2대 대통령 선거에서 무소속 대한민국 부통령 후보로 출마했으나 무소속 함태영 후보에 밀려 낙선했다. 1953년 동국대학교 총장으로 취임해 우수한 인재 배출을 위한 세계적인 종합대학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기 위해 혼신의 힘을 쏟았다.

 

1906년 원흥사의 명진학교로부터 1945년 혜화전문학교까지 동국대학교의 전신들은 39년 동안 창신동과 혜화-명륜동에서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런데 남산 자락에 1954년 동국대학교를 대표하는 석조 건물인 '명진관'이 시작됐다. 이 부지는 정확히 말해 남산 동국대학교 자리는 일제시대에 일본 정토진종(淨土眞宗) 서본원사(西本願寺) 경성별원(京城別院)이 있었던 곳이다. 이 절터는 해방 후 국유화 되어 46년 조계종에서 정부로부터 이양 받은 것이다.

 

지금 대학본부와 명진관이 있는 캠퍼스 중심에 서면 청와대가 정면으로 마주 보이면서 서울 시내가 한눈에 들어온다. 밤에 보면 서울의 야경이 더욱 장관이다. 시내 대학들 중에 이런 명당을 차지한 대학이 어디 또 있겠는가! 그런 명당이기는 하나 이승만 대통령이 빤히 보이는 남산 자락에 공사판이 벌어진 것을 보고, 불호령이 떨어졌다고 한다. 그런 것을 백성욱 박사가 대학건물을 짓고 있다고 하자, 이 대통령도 노기를 거두고 오히려 격려를 했다고 한다. 그만큼 평소 백 박사가 이 대통령의 신임을 받고 있었던 것이다.

동국대학교 명진관

 

​1958년에 완공한 석조관(현 명진관)이 2015년에 서울시 문화재로 등록되었다. 3층의 이 석조 건물은 건축학적으로 1950, 60년대를 대표하는 작품일 뿐만 아니라 우리가 육안으로 보기에도 한국에도 이런 건축물이 있나! 하고 놀라울 정도로 아름답기 한량없다. 동국대학 캠퍼스 건립은 전적으로 배성욱 박사의 집념과 노력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백성욱 박사는 총장 재임시에도 동국대 대학원에서 여러 해 동안 원효의 <금강삼매경론> 승조(僧肇)의 <조론(肇論)> 혜심(고려승 慧諶)의 <선문염송禪門拈頌> 승조의 <보장론(寶藏論)> 그리고 <화엄경> 등을 강의해, 많은 불교학자들을 길러냈다. 1956년 제3대 대통령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부통령 후보로 출마했으나 민주당 장면 후보에 밀려 낙선했다. 1957년 고려대장경 보존회 회장으로 취임해, 이때부터 동국대에서 고려대장경 영인본 간행이 시작했다.

 

1961년 백성욱 총장은 미리 5·16 군사 정변을 알았던 것처럼 정변이 일어나기 전에 경기도 소사로 내려갔다. 1961년 7월에 대학총장직을 퇴임하고, 다시 세상일을 놓고 경기도 부천시 소사의 한 야트막한 산을 개간, 백성농장을 경영하며 인연 있는 중생 및 후학들을 지도했다. 정계 은퇴 후에는 수행공동체 운영과 후학 양성에 전념했다. 이때 제자들에게 가르친 수행법은 <금강경>을 독송하고, 타인의 성불과 복 짓기를 축원해주며, 올라오는 번뇌를 미륵불에게 바치라는(공양 올리라는) 선 수행으로 요약된다.

 

그리고 1981년 출생한 바로 그날에 입적했다. 백성욱 박사에겐 따라 붙는 명칭이 많다. 승려, 독립운동가, 불교학자, 시인, 교육가(교수, 대학 총장), 기업가(대한광업진흥공사사장), 정치가(내무부장관, 1952, 1956년 부통령 출마) 도인, 활불, 생불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그의 본분은 역시 불(佛)이다. 그러므로 그를 ‘살아있는 부처’같다 해서 사람들은 ‘활불’이라 칭했던 것이다. 시대의 활불(活佛)로 불린 인물이다.

 

백 박사가 수도도 많이 했지만 여러 직책을 맡아 일을 수행하면서 한 번도 큰 실수나 잘못을 범하지 않았던 것은 심체가 불(佛)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가 하는 모든 일은 전술한대로 이 심체 불의 용(用)이니 무슨 오류가 있었겠는가. 이와 같았으나 그는 승려는 아니었다. 그에게 따라 붙는 명칭이 많았듯이 그는 승속을 넘나들었다. 백성욱 박사는 말했다. “한 생각이 부처님을 향해 있으면 모두가 출가자”라고 했다. 하지만 그래도 그의 생애를 두고 승려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백성욱 박사의 ‘금강산 수도 10년‘은 승려다운 승려생활이었고, 일심으로 정진해서 득도한 것은 사실이다.

 

그 당시 국내외 사정으로는 나이도 어린데, 감히 프랑스에 가서 유학을 하고, 독일로 가서는 불문을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았다는 것은 예사 일이 아니었다. 참으로 놀라운 과(果)를 이룬 것이라 아니 할 수 없다. 그런 집념이 있었기에 10년이라는 기간 모든 것을 손 놓고, 오로지 부처님을 향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가 남긴 말을 들어보자, 참으로 선지식이 아니면 할 수 없는 명언이다.

 

​『미륵존 여래불(彌勒尊如來佛)을 마음으로 읽어서 귀로 듣도록 하면서 당신의 생각은 무엇이든지 부처님께 바치는 마음을 연습하십시오. 궁리를 가지면 병이 되고 참으면 폭발합니다. 이것이 닦는 사람의 항복기심(降伏其心)이라고 합니다.

 

아침저녁으로 <금강경>을 읽으시되 직접 부처님 앞에서 마음 닦는 법을, 강의 듣는 마음으로 믿으시고, 실행하여 습관이 되도록 하십시오. 그리고 육체는 규칙적으로 일하시고, 정신은 절대로 가만 두십시오. 이와 같이 100일을 일기로 하여, 대략 10회 가량 되풀이 하시면 몸뚱이로 인연한 모든 근심걱정이 사라지고 장차 어떻게 사느냐 하는 문제가 해결됩니다. 이것은 아상(我相)이 없어진 연고입니다. 이것을 초심불교의 행상(行相)이라고 할까요.

 

주의하실 일은, 공부하겠다면 탐심이요, 공부가 왜 안 되냐 하면 진심이요, 공부가 잘 된다하면 치심이니, 이 세 가지 아니하는 것이 수도일진댄 꾸준히만 하시되 안하지만 말면 됨이라. 고인(古人)은 사가이면면 불가이근근(斯可以綿綿 不可以勤勤)이라 했지요.』

 

※행상(行相, 산스크리트어: ākāra)-마음 혹은 마음작용에 나타난 형상(形相)을 말한다. 인식대상에 대해 마음 또는 마음작용이 가지는 그 인식대상에 대한 이미지를 말한다. 즉, 마치 거울에 사물이 비추이듯이 가지게 되는 이미지, ― 마음 또는 마음작용이 가지는 영상(影像)을 말한다.

 

사가이면면 불가이근근(斯可以綿綿 不可以勤勤)이라, 이 일(마음공부)은 마치 실이 이어지듯 꾸준히 해야 하며, 너무 욕심을 부리면 안 된다는 의미로, 자칫하면 거문고 줄이 터져 버린다. 부처님께서 소나(Sona)에게 한 경책이시다. 소나는 이와 같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이날부터 거문고 줄을 고르듯이 정진하여 마침내 아라한과를 증득했다. 물론 부지런히 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하지만 마음공부는 지나치게 부지런을 떤다든지, 마치 수능공부 하듯 기간을 정해놓고 한방에 터뜨리듯 하는 공부여서는 안 된다.마음을 한데 모아 꾸준히 정진하라는 말이다.

 

글: 아미산(이덕호)

※이 글을 작성함에 많은 분들의 글을 참조하고 인용했음을 밝혀둡니다. 고맙습니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