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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법 수행의 길

[스크랩] 기도, 이제는 진화해야 한다

작성자향상일로|작성시간18.10.16|조회수109 목록 댓글 0

 

기도, 이제는 진화해야 한다

 

현재의 한국불교를 지탱하고 있는 힘은 기복신앙이라고 할 수 있다. 기복신앙의 문제점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지적한 바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불교는 여전히 기복신앙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어떤 사람은 종교에서 기복을 제외해 버리면 아무 것도 남는 것이 없다고 주장한다. 모든 종교는 기복적인 요소를 어느 정도는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불교는 다른 종교에 비해 매우 합리적이고 이지적인 특징을 갖고 있다. 특히 초기불교에서는 불합리한 미신적 요소를 완전히 배제하고 있다. 또한 초기불교의 수행방법도 단계적인 순서를 좇아 합리적으로 조직되어 있다. 다른 종교에서는 찾아볼 수가 없을 만큼 합리적이고 논리적이다.

 

붓다 당시의 풍습에서는 별의 운행 등에 의해 일시의 길흉을 정하고, 방위의 선악을 말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그와 같은 일시나 방위의 길흉을 인정하지 않았다. 또한 당시에는 먹을 것 마실 것에 대해서도 먹기에 좋은 것과 나쁜 것이 미신적으로 정해져 있었다. 그러나 붓다는 이러한 미신적 생활방식이 잘못된 것이라고 지적했다.

 

또한 당시에는 일반적으로 질병도 악마나 귀신의 소행이라고 여겼다. 그래서 그들은 기도나 주술로써 질병을 치료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붓다는 육체적 질병은 그 병상이나 원인에 따라 올바른 약물치료를 시행하라고 가르쳤다. 율장에 규정되어 있는 질병의 치료법은 당시로서는 가장 앞선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요법이었다.

 

그러나 아직도 한국불교에서는 과거의 미신적인 신앙형태를 버리지 못하고 있다.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제는 불교도들도 기복신앙에서 벗어나야 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만일 오늘날의 젊은이들에게 기복적인 신앙을 강요한다면 오히려 역효과만 낳을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요즘의 젊은이들은 종교에 관심이 없으며, 종교의 중요성이나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기복신앙은 개인적인 욕망의 기도에서부터 시작된다. 기도란 자신이 바라는 바를 이루게 해달라고 어떤 절대자에게 비는 행위를 말한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절대자를 상정하지 않기 때문에 기도라는 말이 성립되지 않는다. 유신론적 용어인 기도라는 말을 불교도들이 무비판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올바른 것이 아니다.

 

예로부터 대승불교에서는 기도라는 용어 대신 발원(發願)이나 서원(誓願)이라는 단어를 사용해 왔다. 대승불교는 보살의 서원에서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보살의 서원은 위로는 깨달음을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구제하겠다.”는 것이다. 이러한 보살의 총원이 바로 사홍서원(四弘誓願)이다. 이른바 중생을 다 건지오리다. 번뇌를 다 끊으오리다. 법문을 다 배우오리다. 불도를 다 이루오리다.”라는 것이다. 이 같은 큰 원을 세운 보살이 개인적 소망이 성취되기를 바란다는 것은 너무나 보잘 것 없다.

 

기도는 절대자에게 자신의 소원을 비는 것이지만, 발원은 자기 스스로 그 원을 성취하겠다고 다짐하는 것이다. 기도는 탐욕에 바탕을 둔 타력신앙이지만, 발원은 원력에 토대를 둔 자력신앙이다. 기도는 이기적인 욕망에서 나온 것이지만, 발원은 이타적인 원력에서 나온 것이다. 이처럼 보살의 발원과 개인의 기도는 차원이 다르다.

 

또한 사람들이 기원(祈願)이라는 단어를 즐겨 사용한다. 기원이란 바라는 일이 이루어지기를 빎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그러나 이때의 은 자신의 소원을 비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소망이 이루어지기를 빈다는 의미가 강하다. 따라서 기원이라는 단어는 보살의 이타행과 일치하기 때문에 불교의 교리에 어긋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불교도들은 가급적 기도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사찰에 가보면 ‘100일 입시기도를 실시한다는 현수막이 걸려있다. 전형적인 비불교적 기복신앙이다. 그러나 이것을 ‘100일 발원정진으로 바꾸면, 이 기간에 원()을 세워 열심히 정진한다는 불교 본래의 의미를 되살릴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인간이 바라는 것은 크게 다르지 않는다. 이를테면 건강과 재산, 합격과 승리 등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기도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건강은 잘못된 생활습관을 바꾸고 규칙적인 운동과 음식의 조절을 통해 자신의 건강을 지켜야만 한다.

 

어떤 사람들은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면 복을 받아 부자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땀 흘려 열심히 일하지 않으면 재화를 획득할 수가 없다. 부자가 되고자 한다면 기도할 것이 아니라 경제활동에 종사해야 한다. 일하지 않고 불로소득을 바라는 것은 붓다의 가르침에 위배되는 투도계(偸盜戒)에 해당된다.

 

열심히 공부하지 않고 좋은 대학에 들어가겠다고 하는 것도 잘못된 생각이다. 만일 열심히 공부하지 않았는데 좋은 대학에 들어간다면, 붓다의 가르침이 잘못된 것이 되고 만다. 붓다가 발견한 연기법(緣起法)은 세속의 인과법칙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봄에 씨앗을 뿌리지 않고 어떻게 가을에 결실을 거둘 수 있겠는가. 이 세상에서 노력하지 않고 공짜로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이 단순한 이치만 안다면 맹목적인 기복신앙에 매달리지 않게 될 것이다.

 

인간의 삶에 있어서 복()은 큰 비중을 차지한다. 많은 사람들이 복 얻기를 바란다. 그러나 복은 지어야 하는 것이지, 빈다고 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기도를 통해 복을 얻을 수 있다고 믿고 있다. 이러한 생각은 잘못된 것이다. 깨달음을 증득한 붓다도 입멸할 때까지 복을 짓고자 노력하였다.

 

한때 붓다는 아누룻다 존자에게 세상에서 복을 구하는 사람으로 나보다 더한 사람은 없다. 왜냐하면 나는 여섯 가지 법에 만족할 줄 모르기 때문이다. 첫째는 보시하는 것이요, 둘째는 도덕적인 삶을 사는 것이요, 셋째는 참는 것이요, 넷째는 법을 설명하는 것이요, 다섯째는 중생들을 보호하는 것이요, 여섯째는 위없는 바른 도를 구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붓다는 중생들을 위해 더 많은 복을 쌓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 복의 원어는 무엇인가? 산스크리트로는 뿐야(pu?ya)이고, 빨리어로는 뿐냐(pu??a)라고 한다. 이것을 한역에서는 선(), 공덕(功德), 복덕(福德) 등으로 옮겼다. 불교에서 말하는 은 원인에 따른 결과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좋은 과보를 가져다주는 원인으로서의 현재 선행 자체도 이라고 보고 있다. 즉 미래에 복과를 가져다주는 행위로서의 복인(福因)이나 복행(福行) 또한 이다. 왜냐하면 현재의 선행 자체도 과거의 선행이 바탕이 되지 않으면 지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현재에 짓는 복행(福行)은 복인이면서 동시에 복과(福果)인 것이다. 이것은 열매는 곧 씨앗이 될 수 있고 씨앗은 곧 열매를 맺게 하는 이치와 같다.

 

그러므로 모름지기 불교도라면 기도보다는 끊임없이 복을 지어야만 할 것이다. 복이 없는 자가 이 세상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다. 붓다는 을 지으려면 보시·지계·인욕을 실천하라고 가르쳤다. 특히 붓다는 지계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왜냐하면 모든 허물은 계율을 지키지 않기 때문에 생기고, 모든 선업과 복덕은 계율을 잘 지킴으로써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최상의 행복 혹은 위없는 행복, 즉 열반으로 가는 지름길은 계율을 지키는 것이다. 계율을 지키지 않고 최상의 행복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크게 잘못된 것이다. 행복해지고자 한다면 무엇보다도 먼저 계율을 지켜야만 한다.

이 글은佛敎20149월호, pp.16-20에 게재되었다.

2014. 9. 3.

마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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