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견은 우리가 어떤 사물을 볼 때, 한 면만 보는 거요.
만약에 어떤 네모진 통이 있다 그러면 앞면만 보면 직사각형으로 보이겠죠.
윗면만 보면 어때요? 정사각형으로 보이겠죠.
그런데 우리는 그 한 면만 보고 이거다, 저거다라고 얘기하는 거요.
제가 잘못 본 게 아니라 보기는 사실대로 봤는데 제한되게 봤다.
그리고 그걸 가지고 물체의 모양 전체라고 내가 단정 짓는 거요. 이걸 편견 또는 착각이라고 그래요.
그래서 그걸 가지고 문제를 삼는데 저와의 대화는 앞만 보고 있는 분에게
”뒷면은 어때요?“하고 뒤를 보게 하고
윗면만 보고 얘기하는 사람에게
”아랫면은 어때요?“하고 아랫면을 보게 하고
왼쪽 측면만 보고 있는 사람에게
“오른쪽 측면은 어때요?”하고 오른쪽 측면을 보게 하면
즉 위도 보고 아래도 보고, 앞도 보고 뒤도 보고, 왼쪽도 보고 오른쪽도 본다는 것은
이 물체나 현상의 전모, 전체를 본다. 이 얘기에요.
“전체를 본다.” 이걸 뭐라고 그러냐?
“통찰력”이라고 그래요. 통찰력.
이 통찰력을 또 다른 말로 뭐라 고르냐?
지혜(智慧)라고 그래요, 한 면만 보고 이렇다고 단정한 것을 편견이라고 그러고
전체를 보고 “아, 이렇구나.” 하는 것을 통찰력, 또는 지혜라고 그래요.
그러면 이 한 면만 보고 단정을 해서 편견을 가진 것은
자기는 사실인 것 같은데 실제는 사실이 아니에요.
이것이 오류요, 오류.
그런데 전체를 다 보면, 통창력이 생기면 지혜가 생기면
이 편견이 사라지게 되죠.
그러면 편견을 가질 때는 괴롭다가
통찰력을 가지게 되면 괴로움이 사라져요.
이렇게 우리가 어떤 무지를
그 무지라는 것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만 무지가 아니에요.
잘못 알고 있는 것도 무지에요.
모르는 것도 무지,
잘못 알고 있는 것도 무지라는 거다.
이런 무지(無知: 어리석음)의 상태에서 깨어나게 되면결과가 어떻게 되느냐?
괴로움이 없어져 버린다.
이런 원리라는 거요.
그러니까 누구를 꼭 고칠 필요가 없는 거요.
그 사람이 잘못해서 내가 괴로움이 생긴 게 아니라는 거요.
그 사람이 잘못한 것처럼 내가 생각이 든 거요.
우리가 일상에 살아가보면
이런 일이 계속 벌어지는 거요.
그래서 제가 이런 실례를 하나하나 드는 거는
깨달음이 뭐냐 하는 거를 말씀드리려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가 깨달음을 너무 추상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많은 오해가 발생한다.
우리 일상에서의 심리적인 불안, 또는 미움,
이런 것들이 다 이런 무지로부터 일어나는 거요.
그래서 부처님은
이런 무지를 깨우치게 되면
이런 심리적인 부정적 작용으로부터 벗어나서 편안해진다.
그러면 어떤 심리변화로 문제가 해결된다는 것은 아니에요.
수행자는
이런 일이 일어나든 저런 일이 일이나든
그건 세상에 있는 일이고
심리의 안정을 유지하면서
그 문제는 내가 최선을 다해서 하는 만큼 해서 해결을 하는 거요.
내가 할 수 있는 건 하고
남의 도움이 필요하면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도움을 요청하고
또 협력을 하고
그렇게 해서 해결 될 수도 있고, 또 안 될 수도 있고,
안되면 또 포기해야 하겠죠.
이렇게 우리에게 주어진 문제를 해결해 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