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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봉 스님 법문과 글

불멸의 사장(師匠) - 효봉 스님

작성자향상일로|작성시간24.10.11|조회수45 목록 댓글 0

‘인간이 인간을 벌할 수 있는가. 범부인 내가 무슨 권리로 사람을 죽게 만들 수 있나. 어떻게 사는 것이 참된 인간의 길인가.’ 평양 복심법원(현재의 고등법원) 판사 이찬형(李燦亨ㆍ효봉의 속명)은 3일간 식음을 전폐하고 고뇌했다.

 

한국인 최초의 판사로 법의를 입은 지 10년, 그의 고통은 처음 내린 사형선고에서 비롯됐다. 그 것도 동포를 상대로. 그렇지 않아도 법관생활은 번민의 연속이었다.

이민족의 압제에 맞서 독립투쟁을 벌인 동포 사상범을 다뤄야 하는 그에게 법의는 출세와 영광의 상징이 아니었다. 양심을 옥죄는 번뇌의 쇠 그물 이었다. ‘이 세상은 내가 살 곳이 아니다. 내가 갈 길은 따로 있을 것이다.’ 드디어 이 같은 결론에 도달한다. 암흑의 긴 터널에서 벗어날 한 줄기 빛을 발견한 것이다. 효봉의 위대한 버림은 이렇게 시작됐다.

 

“어디서 왔는가.”

“유점사에서 왔습니다.”

“몇 걸음에 왔는고.”

“(벌떡 일어나 방을 한 바퀴 빙 돌고 앉으면서) 이렇게 왔습니다.”

 

금강산 도인 석두(石頭)는 고개만 끄덕거렸다. 다만 곁의 노장이 “십년 공부한 수좌(首座)보다 낫네”라며 껄껄 웃었다. 그 스승에 그 제자라 했다. 스승을 찾아 헤매던 나그네와 제자를 기다리던 스승은 이심전심을 주고받은 것이다.

 

효봉이 먼저 간 절은 유점사였다. 거기서 신계사 보운암의 석두화상을 찾으라는 말을 들은 것이다. 집을 떠난 지 3년째 되던 해였다. 머리를 깎고 원명(元明) 이란 법명을 받았다.

 

음력 칠월 초 여드레, 서른 여덟의 나이였다. 효봉은 이날만 되면 옷을 갈아 입었다. 시자들이 까닭을 물으면 “오늘이 내 생일이야”라고 빙그레 웃곤했다.

 

바다 밑 제비집에 사슴이 알을 품고(海底燕巢鹿抱卵ㆍ해저연소녹포란)

타는 불속 거미집에선 물고기가 차를 달이네(火中蛛室魚煎茶ㆍ화중주실어전다)

이 집안 소식을 뉘라서 알랴(此家消息誰能識ㆍ차가소식수능식)

흰 구름은 서쪽으로 달은 동쪽으로(白雲西飛月東走ㆍ백운서비월동주)

 

법기암 토굴에서 다시 태어난 효봉의 사자후다. 감동과 환희의 진폭이 여느 선사보다 큰 오도송이다. 세속의 잣대로는 해체가 원초적으로 불가능한 관념과 비논리의 세계다. 논리의 세계는 분별에 의해 이뤄진다.

 

거기서는 명료하지 않은 것은 존재하기 어렵다. 있는 그대로의 세계, 즉 불교적 절대진리의 세계에서는 온갖 논리를 뛰어넘는다. 그래서 겨울에 덥고 여름에 춥다는 비논리적 표현의 수용이 가능한 것이다. 투명한 지혜만이 반짝인다.

 

‘엿장수 중’ ‘절구통 수좌’ ‘판사중’ , 효봉의 별명들이다. 그의 수행과 삶의 과정을 그대로 반영한다. 엿장수 중은 3년간 엿장수를 했기 때문이다. 절구통 수좌의 별명에는 치열한 구도행이 투영돼 있다.

 

스승은 효봉에게 조주(趙州)의 무(無)자 화두를 내렸다. 효봉은 엉덩이가 진물러 터져 방석이 달라붙어도 모를 정도로 피눈물 나는 수행을 멈추지 않았다. 그래서 붙은 별명이 절구통수좌다.

 

효봉은 백척간두에서 몸을 던져야 할 필요성을 절감한다. 법기암 뒷산에 한 칸 남짓한 토굴을 팠다. 밖에서 흙벽을 치도록 했다. 앞뒤로 공양그릇이 들고 날 수 있는 입구와 용변을 처리할 구멍만 냈다. 이제 나올 문은 없다. 일생일대의 싸움은 무려 1년6개월이나 계속됐다. 마침내 부처와 조사들이 간 길을 찾게 된다.

 

“세상에는 도처가 지옥이요 극락입니다. 마음을 바로 써서 좋은 일을 많이 하면 그 세상이 극락이요, 마음을 나쁘게 먹고 나쁜 짓을 많이 하면 그 세상이 바로 지옥이지요.”

 

“평생 나쁜 짓을 많이 한 사람도 부처님만 믿고 불공을 드리면 극락에 갈 수 있사옵니까.”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어요. ‘저 연못에 돌을 던져놓고 떠올라라 떠올라라, 하고 불공을 올린들 그 무거운 돌이 떠오르겠느냐. 저 흙 속에 잡초씨앗을 뿌려놓고 쌀이 되어라 쌀이 되어라, 하고 불공을 드린들 잡초씨앗에서 벼 이삭이 나올 수 있겠느냐’고.”

 

“그렇다면 왜 부처님을 믿어야 하는지요.”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면 집안이 바로 극락이 되고 마을이 극락이 되고 온 세상이 극락이 되는 것이니, 우리 모두 극락을 만들어 극락에서 살자는 것이지요.” 효봉은 송광사 삼일암으로 찾아온 불자에게 자상한 법문을 들여주었다. 효봉은 결코 승속을 가리지 않았다. 중생을 낮추면 부처를 낮추는 일이라고 하심(下心)을 강조했다.

 

법정스님은 효봉의 일대기에서 “스승은 시물(施物)과 시은(施恩)을 무섭게 생각했다. 우물가에 어쩌다 밥알 하나만 흘려도 평소 그토록 자비하신 분이 화를 내곤 하였다. 초 심지가 다 타서 내려앉기 전에 새 초를 갈아 끼지 못하게 하였다. 수행자는 가난하게 사는 게 곧 부자살림이라고 말씀하였다”고 회고한다.

 

효봉의 운수행각이 전남 순천 조계산 송광사로 향한 데에는 이유가 있다. 유점사에서 과거 판사의 신분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효봉은 부인은 물론 어린 세 자녀도 모르게 집을 나왔다. 그런데 평양 복심법원에서 함께 근무한 일본인 판사 와타나베가 유점사에 놀러왔다가 효봉, 아니 이찬형의 모습을 알아본 것이다.

 

와타나베는 효봉의 신분을 주지에게 알렸다. 효봉의 간곡한 요청에 따라 가족에게는 말하지 않았다. 효봉은 일단 선방 여여원으로 거처를 옮겼다. 효봉은 여기서 큰 아들 영발 내외의 모습을 보고 방향을 바꿔 돌아앉는다. 한번 가부좌를 틀고 앉으면 미동도 않던 절구통수좌가 갑자기 돌아 앉았으니 다른 수좌들의 궁금증은 컸다.

 

효봉은 1937년 금강산과 작별을 고한다. 발길이 머문 곳은 송광사였다. 처음 찾아간 절인데도 아주 편안한 느낌이 들었다. 법정스님은 “스승은 삼일암 조실로 십년을 머물면서 수많은 후학의 눈을 띄워주고 길을 열어 보이셨다.

 

그리고 여기서 정혜쌍수(定慧雙修)의 구도관이 설정되었다”며 “이어 해인사 가야총림 방장화상으로 추대 받아 알찬 인재를 길러냈다. 가야총림은 현재 한국고승의 온상이었고 뒷날 교단 정화운동의 역군들도 이곳에서 수행한 인재들이었다”고 밝힌다.

 

내가 말한 모든 법은(吾說一切法ㆍ오설일체법)

그거 다 군더더기(都是早騈拇ㆍ도시조병무)

오늘 일을 묻는가 (若問今日事ㆍ약문금일사)

달이 천강에 비치니리(月印於千江ㆍ월인어천강)

 

입적 며칠 전 시봉들의 청을 받고 남긴 열반송이다. “생불생(生不生) 사불사(死不死)라, 살아도 산 것이 아니오 죽어도 죽은 것이 아니거늘 이 늙은 중에게 무슨 생일이 따로 있겠소이까.” 생일을 묻는 이승만 대통령에게 이런 대답을 했던 효봉은 66년 10월15일 새벽 3시 예불을 올릴 즈음에 “나 오늘 갈란다” 고 말했다. 오전 10시 굴리던 호도알이 문득 멈추었다. 법정스님은 스승의 열반을 장엄한 낙조라고 애도했다.

 

<불교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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