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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 스님 법문과 글

온화한 얼굴 상냥한 말씨

작성자향상일로|작성시간24.07.08|조회수43 목록 댓글 0

비 개이자 개울물소리가 한층 여물어졌다.

밤낮으로 쉬지 않고 흐르는 개울물소리에 귀를 모으고 있으면 내 안에 묻은 먼지와 때까지도 말끔히 씻기는 것 같다.

개울가에 산 목련이 잔뜩 꽃망울을 부풀리고 있다.

한 가지 꺾어다 식탁 위에 놓을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갓 피어나려고 하는 꽃에게 차마 못할 일 같아서다.

철 따라 꽃이 피어나는 이 일이 얼마나 놀라운 질서인가.

그것은 생명의 신비이다.

꽃이 피어나는 것은 누구를 위해서가 아니다.

꽃의 정기를 머금고 있는 나무가 스스로의 충만한 삶을 안으로, 안으로 다스리다가

더 견딜 수 없어 마침내 밖으로 터뜨리는 것이다.

 

자연계에서는 보면 꽃은 향기로운 미소이다.

칙칙한 수목들만 있고 꽃을 피우는 나무나 풀이 없다면, 숲은 미소를 잃은 얼굴처럼 삭막하고 딱딱할 것이다.

'미소를 잃은 얼굴'은 살아있는 삶의 얼굴이 아니다.

남 앞에서 그럴 만한 분위기도 아닌데 헤프게 웃는 것은 오히려 천박해지기 쉽다.

그러나 사람을 대했을 때 미소가 없는 굳은 얼굴은 맞은편에서 긴장감을 불러일으켜 말문을 열기 어렵게 한다.

 

지난겨울 한 여행지에서 나는 이 굳은 얼굴을 보고 스스로 크게 뉘우친 적이 있다.

캘리포니아의 주도(州都)가 있는 새크라멘토를 일부러 찾아간 것은, 그 근교에 광활한 농경지가 있어서였다.

미국이 우리에게 쌀시장을 개방하라고 기회 있을 때마다 압력을 가해 오는 것을 보고 도대체 그들의 쌀농사가 어떤 규모로 지어지기에 그토록 극성인가 싶어서였다. 지평선으로 끝이 가물가물한 들녘에 섰을 때, 풍부한 수자원을 끼고 있는 그 광활한 대지와 마주했을 때,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아, 이 땅은 어느 특정인이나 한 나라의 소유가 아니라 인류 공유의 농경지로구나 싶었다. 거의 버려진 땅을 기름진 농경지로 일군, 흙을 사랑하는 농부들의 그 근면성에 경의를 표하고 싶었다. 그 농경지를 찾아가는 도중 일행을 따라 우리 교민의 한 가정에 들르게 되었다.

 

일행과는 친분이 두터운 사이라서 우리가 집 근처에 와 있음을 전화로 알리자 안주인이 차를 가지고 나와 반겼다.

물론 나와는 초면이었는데도 태연스레 반겨주었다.

식탁에 둘러앉아 차를 마시고 있을 때 그 집주인이 직장에서 퇴근하여 돌아왔다.

일행들과 반갑게 인사를 나눈 것을 보고 나도 주인에게 인사를 드렸다.

50대로 보인 그 집주인은 낯선 나그네의 인사를 거의 무시한 채 떫은 감이라도 깨문 듯한 표정이었다.

나는 무안하고 조금은 불쾌했다.

자기 집에 친지를 따라 찾아온 손님에게 이럴 수 있을까 싶어서였다.

 

이때 나는 보았다.

무표정한 주인의 얼굴에서 바로 나 자신의 얼굴을 보았던 것이다.

무안하고 불쾌한 생각은 씻은 듯 사라지고 내 굳은 얼굴 앞에서 크게 자책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불일암에 살면서 나는 수많은 사람들을 대하게 되었다.

혼자서 지냈기 때문에 싫으나 좋으나 오는 사람마다 직접 대면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게 일이 없어 마음이 한가로울 때는 찾아오는 사람들을 태연스레 대하면서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를 나누지만,

할 일이 쌓여 시간에 쫓길 때나 혹은 무례한 사람들한테는 인정사정없이 쫓아버리는 것이 내 전래의 가풍으로 여겨왔었다.

바로 이런 때의 내 얼굴이 떫은 감이라도 깨문 듯 잔뜩 굳어 쌀쌀맞았을 것이다.

그래서 들려오는 소리에 따르면, 아무개 중한테서는 찬바람이 씽씽 돌더라는 것이다.

 

무슨 인연에서여건 간에 사람과 사람이 마주 대하는 일은 결코 작은 일도 시시한 일도 아니다.

어떤 사람과는 그 눈빛만 보고도 커다란 위로와 평안과 구원을 얻을 수 있다.

다른 한편 두 번 다시 마주치고 싶지 않은 그런 사람도 얼마든지 있다.

이것은 보이지 않는 오랜 세월에서 익히고 길들여진 데서 온 현상일 듯싶다.

사람 사이에 연대가 맞네 안 맞네 하는 것도 이런 현상을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무량수경無量壽經>에 보면 온화한 얼굴 상냥한 말씨 호안애언(和顔愛語0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그 어떤 종파를 물을 것 없이 바른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항상 온화한 얼굴과 상냥한 말씨를 지녀야 한다. 아니 그와 같이 지니려고 일부러 노력할 것도 없이 저절로 안에서 배어 나와야 할 것이다.그 사람의 표정과 말씨는 바로 그 사람의 내면을 드러내는 소식이기 때문이다. 이 풍진 세상을 살아오는 동안 우리들 기억의 바다에는 수많은 얼굴과 목소리들이 떠오르게 마련이다.

 

그러나 대부분은 한때 스치고 지나간 얼굴이요 목소리일 뿐, 단 한 사람의 얼굴과 목소리가 우리들의 삶에 생기를 불어넣어주고 맑고 투명하게 자신을 일깨워준다면 그 얼굴과 목소리는 그 사람에게 있어서 수호천사(守護天使)의 그것일 것이다. 수호천사는 밖에서 찾지 말 것이다. 우리들 자신은 과연 그 얼굴과 그 목소리로 이웃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고 있는지 스스로 물어봐야 한다.

 

우리가 나그네가 되어 여행을 떠나는 것은 새삼스레 구경거리를 찾아 나서는 것은 아니다.

관광과 여행은 본질적으로 다르다.

관광은 흥청거리는 소비이지만, 여행은 삶의 탐구다.

일상의 굴레에서 훨훨 떨치고 벗어남으로써, 온갖 소유로부터 해방됨으로써 아무것도 걸치지 않는 자신의 참모습 앞에 마주 서는 것이다. 둘레의 사물은 곧 나 자신의 비추는 거울, 그 거울 앞에서 내 얼굴과 말씨가 어떤 것인지 스스로 되돌아볼 수 있다면 여행은 탐구의 길이다.

 

그때 그 굳은 얼굴이 나를 끝없이 되돌아보게 한다.

그게 바로 나를 일깨워준 선지식의 얼굴이었음을 뒤늦게 알아차렸다.

온화한 얼굴과 상냥한 말씨가 이웃을 구원한다.

 

출처 : 법정스님-버리고 떠나기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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