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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왕계(花王戒) - 설총(薛聰)

작성자향상일로|작성시간25.03.22|조회수160 목록 댓글 0

때는 임금인 신문왕이 무더운 여름날, 높직하고 화사한 방에서 설총을 돌아보고 말했다.

 

"오늘은 장마도 개고 훈훈한 바람이 좀은 시원하구나. 맛있는 음식도 구성진 음악도 있긴 하지만, 그것보다는 유익한 얘기나 재미있는 우스갯소리로 울적한 마음을 푸는 것이 좋겠소. 그대는 반드시 기이한 얘기도 들은 것이 있을 터이니 나를 위해 말해보오."

설총이 대답했다.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제가 옛날 화왕(花王:모란꽃)이 처음 올 때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모란을 향기로운 동산에 심어놓고 푸른 장막으로 둘러 가꾸었더니 봄이 되자 화사하게 꽃이 피어나서 다른 모든 꽃들을 누르고 홀로 뛰어났습니다. 이에 먼 곳이나 가까운 곳에 있는 애틋이 고운 꽃이며 가녀린 어여쁜 꽃들이 다투어 달려와서 뵈오려 하고 혹 빠질까 두려워하는 것이었습니다. 홀연 한 아름다운 미인이 있어 발그레한 얼굴, 구슬 같은 이, 게다가 곱게 단장하고 맵시있는 차림으로 오더니 사뿐히 다가와서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눈같이 흰 모래를 밟고 거울처럼 맑은 바다를 보며 봄비에 목욕해서 몸을 깨끗이 하고 맑은 바람을 시원하게 쐬며 한가로이 지내는 터이 온 데, 이름은 장미라 하옵니다. 임금님의 어진 덕을 듣고 향기로운 장막에서 모실까 하와 왔습니다마는 임금님께서는 저를 받아주실는지요?"

 

그런데 또 한 장부(丈夫)가 있어 베옷에 가죽 띠를 둘렀고 허옇게 센 머리에 지팡이를 짚고 있었다. 휘청휘청 걸어 구부정한 모습으로 와서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서울 교외 큰길가에 살고 있습니다. 아래로는 넓은 들 경치를 대하고 위로는 아스라한 산빛을 바라보옵니다. 이름은 백두옹(白頭翁:할미꽃)이라 하옵니다. 생각건대 좌우에서 받드는 것이 비록 흡족해서 고량진미로써 배를 채우고 차와 술로써 정신을 맑게 합니다. 일용물품이 많이 쌓여 있다 하더라도 모름지기 좋은 약이 있어 기운을 돋워야 하며, 모난 돌로 온갓 독을 제거해야 되옵니다. 그래서 말하기를 비록 귀한 것이 있다 하더라도 천한 것을 버리지 말라 하였으며 세상의 모든 군자도 꼭 그 사람이기보다 아쉬워 대신하는 것이라 하였사옵니다. 알지 못하겠습니다만 임금님께서는 의향이 계시온지요?"

 

옆에 있던 자가 말했습니다.

"둘이 왔으니 누구를 취하고 누구를 버리겠습니까?"

화왕이 대답했습니다.

"장부의 말에 또한 도리가 있는데 미인도 얻기 어려운 것이니 장차 이를 어찌할 것인가."

그러자 장부가 앞으로 나와 말하였습니다.

 

"저는 임금님께서 총명하시고 사리를 잘 아시는 줄 알고 왔사온데 지금 뵈오니 그렇지 못하옵니다. 무릇 임금님 중에는 간사하고 아첨하는 자를 멀리 하고 올바르고 곧은 자를 가까이 하지 않는 분이 많습니다. 그래서 맹가(孟軻)는 불우하게 일생을 마쳤고 빙당랑(憑唐郞: 한나라 사람) 빙당(憑唐, 중랑서장을 지냈음)도 초야에 묻혀 늙었습니다. 예로부터 이와 같거늘 낸들 어찌하겠습니까."

화왕이 말하였습니다.

"내가 잘못했다. 내가 잘못했다."

 

이야기를 다 듣고 난 왕은 서글픈 기색으로 말했다. “그대의 우화는 참으로 뜻이 깊구려. 이 이야기를 기록하여 임금이 된 자의 경계로 삼게 하오.” 마침내 설총을 뽑아서 높은 벼슬을 주었다.

 

神文大王以仲夏之月, 處高明之室, 顧謂聰曰, 今日宿雨初歇, 薰風微涼. 雖有珍饌哀音, 不如高談善謔以舒伊鬱. 吾子必有異聞, 蓋爲我陳之. 聰曰, 唯. 臣聞, 昔花王之始來也, 植之以香園, 護之以翠幕. 當三春而發艶, 凌百花而獨出. 於是自邇及遐, 艶艶之靈, 夭夭之英, 無不奔走上謁, 唯恐不及. 忽有一佳人, 朱顔玉齒, 鮮粧靚服. 伶俜而來, 綽約而前. 曰, 妾履雪白之沙汀, 對鏡淸之海, 而沐春雨以去垢, 快淸風而自適, 其名曰薔薇. 聞王之令德, 期薦枕於香帷. 王其容我乎. 又有一丈夫, 布衣韋帶, 戴白持杖, 龍鍾而步, 傴僂而來. 曰, 僕在京城之外, 居大道之旁. 下臨蒼茫之野景, 上倚嵯峨之山色, 其名曰白頭翁. 竊謂, 左右供給雖足, 膏粱以充腸, 茶酒以淸神, 巾衍儲藏, 須有良藥以補氣, 惡石以蠲毒. 故曰, 雖有絲麻, 無棄管蒯. 凡百君子, 無不代匱. 不識王亦有意乎. 或曰, 二者之來, 何取何捨. 花王曰, 丈夫之言, 亦有道理, 而佳人難得. 將如之何. 丈夫進而言曰, 吾謂王聰明識理矣, 故來焉耳. 今則非也. 凡爲君者, 鮮不親近邪侫, 疏遠正直. 是以孟軻不遇以終身, 馮唐郎潛而皓首. 自古如此. 吾其奈何. 花王曰, 吾過矣, 吾過矣. 於是王愁然作色曰, 子之寓言誠有深志. 請書之以爲謂者之戒. 遂擢聰以高秩.

- 김부식(金富軾, 1075~1151), 「설총전(薛聰傳)」, 『삼국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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