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해 한용운 스님
해월스님(원효사)
1910년 한일 강제 합병 이후 우리민족이 당하였다고 알려진 고통과 수탈 및 그 모진 일제의 무단정치 압제와 폭력 속에서도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치고 국민을 계몽하고 다니며 나라 안팎에서 독립운동을 하신 선열들께 머리 숙여 감사드립니다.
‘불행은 올 때 연이어 온다’는 말이 있지만, 해방의 기쁨도 잠시이고 다시 조국분단의 비극이 생겨 동족상잔의 아픔이 3천리 강토를 휩쓸고 간 후에 그 얼마나 큰 혼란과 격동기의 시기가 지나갔는지는 감히 미루어 짐작할 뿐 헤아리기 어려운 일입니다.
오늘은 비록 광복을 보지 못하고 돌아가셨으나, 우리 민족의 독립운동사에서 불교인을 대표해 만해 한용운스님을 빼놓고는 말할 수 없으니 다들 아시는 이야기일지는 몰라도 만해스님의 행적을 조금 더듬어보는 시간을 갖고자 합니다.
한용운스님은 본관이 청주(淸州)로 호는 ‘만해(萬海)’입니다. 1879년 8월 29일 충청남도 홍성(洪城)에서 출생하였으며, 서당에서 한학을 배우다가 동학농민운동에 가담했으나, 들불처럼 일어나던 동학운동이 결국은 실패로 돌아가자 1896년에 설악산 오세암(五歲庵)으로 들어가십니다.
그 뒤 1905년에 인제의 백담사(百潭寺)에 가서 연곡(連谷)스님을 스승으로 승려가 되고,
만화(萬化)스님에게서 법을 전해 받았습니다.
1908년 전국 사찰대표자 52인의 한 사람으로 원흥사(元興寺)에서 원종종무원(圓宗宗務院)을 설립한 뒤,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의 문물을 시찰하십니다.
1910년 강제로 한일합병이 되어 나라를 뺏기자 중국에 가서 독립군 군관학교를 방문,
이들을 격려하고 만주·시베리아 등지를 돌아보다가 일제의 앞잡이로 오해를 받고 총에 맞아 죽을 고비를 넘기고, 1913년 귀국하여 1910년에 지은 불교유신론을 발표하고 불교학원에서 교편을 잡으며 후학을 양성하였습니다.
같은 해에 부산 범어사에 들어가 불교의 핵심경구를 모은 불교대전(佛敎大典)을 저술하고,
대승불교의 반야사상(般若思想)에 입각하여 은둔적인 불교를 개혁한 불교의 현실참여를 주장하였습니다.
1916년 서울 계동(桂洞)에서 월간지 유심(唯心)을 발간하고, 1919년 3.1운동 때는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공약삼장을 짓는 등 노력하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3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합니다.
재판과정에서도 일본 법정의 판사를 간담이 서늘하게 할 정도로 민족과 국가의 자주독립을 외치셨던 스님은 형기를 마치고 나와서 1926년 시집 ‘님의 침묵(沈默)’을 출간하여 국민계도에 앞장섰고, 이듬해 독립운동 단체인 신간회(新幹會)에 가입하고, 다시 중앙집행위원이 되어 경성지회장(京城支會長)의 일을 맡습니다.
1931년 조선불교청년회를 조선불교청년동맹으로 개칭하고, 불교를 통한 청년운동을 강화하는 동시에 독립사상을 고취, 월간지 불교(佛敎)를 인수한 후, 많은 논문과 글을 발표하여 불교의 대중화와 새로운 자각을 통한 국민정신을 계도하고자 힘썼습니다.
1935년 첫 장편소설 흑풍(黑風)을 조선일보에 연재하였고, 1937년 불교관계 항일단체인 만당사건(卍黨事件)의 배후자로 검거되어 다시 옥고를 치르기도 하셨습니다.
그 후에도 불교의 혁신과 작품 활동을 계속하다가 아쉽게도 1944년 6월 29일 대한의 독립을 한해 앞두고 서울 성북동(城北洞) 북향으로 지은 집 심우장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스님은 조선 오백여년 동안 억불숭유 정책으로 그 역할이 미미하던 시기에 ‘불교의 대중화에 앞장서서 새로운 변화를 추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불교 유신론을 짓고,
일제의 강요와 회유에 의해 변절자가 되어버린 33인 가운데 최남선이나 이광수 등을 거리에서 만나면 모르는 체 지나치고, 그들이 먼저 아는 체를 해오면 초상집에서처럼 대성통곡을 하며 “육당과 춘원은 이미 죽은지가 오래인데 자네들은 그들의 귀신이 아니냐?” 하며 독립정신이 죽어버린 옛 동지들에 대하여 안타까워했다고 합니다.
시에 있어 불교적인 ‘님’을 조국과 민족으로 형상화했으며, 고도의 은유법을 구사하여 일제에 저항하는 동시에 민족정신을 고취시키고 불교에 의한 중생제도(衆生濟度)를 노래했습니다.
어느 때 강연을 하는 자리에 일제순사들이 곳곳에 진을 치고 있으니
만해는 “오늘은 마침 때가 봄인지라 그런지 ‘개나리’가 만발하였습니다.”하고 소리를 치니 만장의 대중들은 “와~~”하고 박수를 치고 환호하고, 그 자리에 있던 순사 나리들은 졸지에 개 같은 나리가 되게 할 만큼 촌철살인하는 언변과 기지로 대중을 이끌고 희망을 불어넣었습니다.
스님께는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大韓民國章)이 추서되었습니다. 스님의 작품으로는 흑풍(黑風)과 장편소설인 박명(薄命)이 있고, 저서로는 시집 님의 침묵을 비롯하여 조선불교유신론(朝鮮佛敎維新論) 십현담주해(十玄談註解) 불교대전 불교와 고려제왕(高麗諸王) 등이 있습니다.
스님은 대둔산 안심사에 있던 원각경언해본과 법화경언해본등 목판을 가지고 불경을 인출해 내는 등 불교의 문화 사업에도 크나큰 기여를 하신 분입니다.
스님의 대비수고로 인출된 경전은 지금도 남아있으나, 당시의 목판은 안타깝게도 6.25때 모두 불타버리고 없으니 어려웠던 시절의 만해스님 노력이 더욱 빛나는 것입니다.
일세의 종교가요, 사상가이자, 철학자요 시인이었던 만해스님의 유지는 지금도 님의 침묵 등 애송하는 시가 되어 사람들 마음에 남아있습니다.
다음은 스님이 지으신 조선독립의 이유서 일부입니다.
'자유는 만유의 생명이요, 평화는 인생의 행복이다. 그러므로 자유가 없는 사람은 죽은 시체와 같고, 평화를 잃은 자는 가장 고통을 겪는 사람이다.
압박을 당하는 사람의 주위는 무덤으로 바뀌는 것이며 쟁탈을 일삼는 자의 주위는 지옥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생명을 터럭처럼 여기고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는 희생을 달게 받는 것이다. 이것은 인생의 권리인 동시에 또한 의무이기도 하다.
그러나 참된 자유는 남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음을 한계로 삼는 것으로써 약탈적 자유는 평화를 깨뜨리는 야만적 자유가 되는 것이다.
또한 평화의 정신은 평등에 있으므로 평등은 자유의 상대가 된다. 따라서 위압적인 평화는 굴욕이 될 뿐이니 참된 자유는 반듯이 평화를 동반하고, 참된 평화는 반듯이 자유를 함께 해야 한다. 실로 자유와 평화는 전 인류의 요구라 할 것이다.
광복 70여년 진정으로 외세에 의존하지 않는 평화 통일된 대한민국의 위상을 정립해 나가는데 온 국민의 열망과 노력을 기울여야 할 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