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용운의 사상은 불교에서 나왔다. 부처의 가르침에 대한 깊은 사색 속에서 그의 철학은 형성되었다. 그것은 신채호가 말한 것처럼 ‘석가의 조선이 아니라 조선의 석가’를 형성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의 철학은 불교에 머무르지 않았다. ‘산 속에서 길거리로’ 나왔듯이, 그의 철학은 민족의 현실에 맞서 싸우는 무기가 되었다. 자아의 발견이 중요하다고 했다. 그러나 식민지 시대, 나라의 자아는 죽었다. 침묵이 강요되었고, 개인의 자아도 살아남을 수 없었다. 이것은 ‘불평등한’ 현실이었다. 이런 불평등을 마치 진리인 양 받아들이는 것은 거짓된 현상에 매몰되는 것일 뿐이었다. 참된 진리를 찾아야 했다. 그래야 죽은 자아를 되살릴 수 있다. 한용운은 ‘님’을 노래했다. 그는 님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님’만이 님이 아니라 그리운 것은 다 님이다. 중생이 석가의 님이라면 철학은 칸트의 님이다. 장미꽃의 님은 봄비라면, 마치니의 님은 이탈리아이다. 님은 내가 사랑할 뿐 아니라 나를 사랑하느니라. 연애가 자유라면 님도 자유일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이름 좋은 자유에 알뜰한 구속을 받지 않더냐? 너에게도 님은 있더냐? 있다면 님이 아니라 너의 그림자니라. 나는 해 저문 들판에서 돌아가는 길을 잃고 헤매는 어린 양이 그리워서 이 시를 쓴다. – <군말> 어느 날 문득 연인이 "왜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어오면 뭐라 말할 수 있을까. 누추한 도시 가로수에 번개처럼 꽂힌 단풍을 세듯 사랑을 셈해본다. 세월아, 이젠 사랑에 까닭 같은 건 없어도 좋으련만, 만해 한용운(1879~1944)은 사십 중후반에 사랑의 까닭을 노래한다. 너 벌써 늙었냐고 나를 타박한다. 제목을 붙여놓고 사랑의 이기성과 맹목을 솔직하게 이야기한다. 그렇다. 아무리 내 사랑이 크다 해도 상대가 내 사랑을 원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그러니 당신의 죽음까지도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보다, 당신이 내 '백발'과 '죽음'까지도 사랑하므로 당신을 미치도록 사랑한다고 말하는 편이 차라리 정직하다. 사랑은 만능이 아니지만 모든 처음과 끝이 일어나고 번지는 인간의 붉은, 영원한 샘 아니던가. 독립운동가이자 수도승이었고 사상가였던 만해 한용운은 뛰어난 사랑의 시인이기도 했다. 1926년 나온 그의 시집 《님의 침묵》은 지금 다시 읽어도 아름다운 연애시집이다. 지금 사랑의 열병을 앓는 이라면,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님의 침묵〉)라며 님의 떠남을 슬퍼한 시도, '만일 당신이 아니 오시면 나는 바람을 쐬고 눈비를 맞으며 밤에서 낮까지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나룻배와 행인〉)라며 사랑의 완성을 갈망한 시도 모두 예사롭지 않은 감흥으로 다가올 것이다. 설악의 품속에서 만해가 홀연 '님(당신)'을 전면에 세운 시편들을 쓰기 시작했을 때, 만해의 곁에도 실은 사랑이 있었다. 그가 온몸으로 껴안고 살던 아픈 조국과 부처는 물론이려니와 사랑하지만 가까이할 수 없는 여인이 있었다. 서여연화라고 했다. 너무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자리에서 그녀가 그를 간절히 지켰고, 그의 노래를 받았다. 만해는 자신의 이력과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절정의 연애시로 독립지사와 승려에게 요구되는 세상의 고정관념을 부드럽고도 강력하게 전복시킨다. 선언서로도 경전의 글귀로도 이룰 수 없었던 사랑의 혁명. 아니, 혁명인 사랑을. 혁명인 사랑은 통째다. '나의 죽음도 사랑하는' 당신이기에 나는 당신을 통째로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사랑하지 않으면 당신은 죽을 것이다. 나는 당신을 사랑한다. 통째로! 통째인 사랑은 그렇게 서로를 사랑의 주체로 세운다. 가을 들판에 핀 꽃들은 다 어디로 가는가. 사랑은 다 어디로 가는가. 《님의 침묵》 서문 격인 〈군말〉에서 쓰는 바, '님만 님이 아니라, 기룬 것은 다 님'인 세계가 비로소 화엄의 뜰에 연화장처럼 펼쳐진다. '기룹다'는 말은 얼마나 어여쁜가. 그리움, 기특함, 안쓰러움, 기다림, 사랑…. 이 모든 말들이 '기룹다'에 스며 있다. 그러니 생각건대, "나는 해 저문 벌판에서 돌아가는 길을 잃고 헤매는 어린 양이 기루어서 이 시를 쓴다"고 말하는 이는 만해인가 만해가 사랑한 님인가. (긴선우, 시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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