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의 길(Trail of Tears) : 체로키 인디언 등 강제 이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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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의 길(Trail of Tears)은 1830년 미국에서 제정된 《인디언 이주법》에 의해 미국 내의 아메리카 원주민 부족들이 겪었던 일련의 강제 이주를 말한다. 체로키 족, 머스코지 족, 세미놀 족, 치카소 족, 촉토 족이 조상 대대로 살아오던 미국 남동부의 고향 지역을 떠나 인디언 준주로 지정된 미시시피 강 서부 지역으로 이주해야 했다. 기존 지역에 남아 동화되는 길을 택한 일부 원주민들에게는 그들이 속한 주에서 미국 시민이 되는 것이 허락되었다. “눈물의 길”이라는 말은 1831년 촉토 족의 강제 이주에 대한 설명으로부터 유래되었다.
■ 인명 피해
1830년에서 1850년까지, 치카소 족, 촉토 족, 머스코지 족, 크릭 족, 세미놀 족 그리고 체로키 족(그들과 함께 살고 있었던 유럽 이민자들과 아프리카 흑인 자유민 및 노예 포함)이 그들이 전통적으로 살아 왔던 땅에서 서쪽 지역으로 강제로 이주 당했다. 원주민들은 이주 과정에서 추위와 질병, 배고픔으로 고통 받았으며 많은 숫자가 목적지에 도착하기 전에 사망하였다. 1838년 체로키 족의 강제 이주(미시시피 강 동부 지역에서 이루어진 마지막 강제 이주)는 조지아 골드 러시의 시초가 되었던 1829년 조지아주 덜라너가 근방의 금맥 발견으로 인해 초래된 결과였다. 체로키 족은 13개 집단으로 나뉘어 있었으며, 밴 뷰런 정부와 부족의 이주를 협상했던 존 로스가 이들을 이끌고 있었다. 총 16,543명의 이주민 중 약 2,000~6,000명이 이동 과정에서 목숨을 잃었다.
■ 개요
체로키 족의 "눈물의 길"은 1830년 《인디언 이주법》의 규정에 따라 서명한 《뉴에코타 협약》의 집행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조약의 내용은 동부의 인디언 토지와 미시시피 강 서쪽의 토지를 교환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인디언이 선출한 지도자들도, 체로키 족의 대다수의 사람들도 법안을 찬성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약 후 미국 7대 대통령 앤드루 잭슨(민주당, 1829~ 1837)에 의해 강제로 집행되었다. 서쪽으로 출발하기 전에 미국 군대가 17,000명의 체로키 인디언을 숙영지에 집결시켰다. 사망자의 대부분은 이 숙영지에서 질병으로 쓰러졌다. 첫 번째 집결 후 합중국군의 역할은 줄어들었으며, 체로키 족이 이동 과정의 대부분을 감독했다.
체로키 족의 언어로, 이 사건은 nvnadaulatsvyi, "우리가 울었던 길"로 불리고 있다. 체로키 족은 미국 인디언 이주 정책의 결과로 이주한 유일한 부족은 아니었다. "눈물의 길"이라는 단어처럼 이주시킨 다른 종족, 특히 "문명화된 다섯 부족"(Five Civilized Tribes)이 경험했을 때도 사용되었다. 원래 이 단어는 처음에 문명화 다섯 부족 중 하나인 촉토 족을 강제로 이주시키는 과정에서 생겨난 용어이다.
■ 체로키 부족
뉴에코타 조약에 대한 대대적인 항의가 이어졌다. 1838년 봄, 로스 추장은 15,000명 이상의 체로키 족의 서명을 모아, 미국 의회에 조약을 해제하라는 청원서를 제출했다. 많은 미국 백인도 조약의 애매모호한 합법성에 분노하며 의회에 체로키 족의 강제이주를 집행하지 말 것을 촉구했다. 예를 들면, 1838년 4월 23일, 랄프 왈도 에머슨은 잭슨의 후계자인 마틴 밴 뷰런에게 편지를 써서 "체로키 족에 대한 엄청난 침범 행위"를 행사하지 말 것을 호소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발적인 이주 기한인 1838년 5월 23일에 가까워지면서 밴 뷰런 대통령은 윈필드 스콧 장군에게 강제 이주 작전을 지휘하게 했다. 스콧은 약 7,000명의 병사를 이끌고 5월 17일 뉴에코타에 도착했다. 부대는 5월 26일에 체로키 인디언을 조지아 주에 집결시켰고, 10일 후, 전략은 테네시, 노스캐롤라이나주와 앨라배마주에도 확대되었다.
약 17,000명의 체로키 인디언과 부유한 체로키 족이 소유하고 있던 약 2,000명의 흑인 노예들은 살던 집에서 끌려나와 총구에 위협을 당하며, 3주간에 걸쳐 이동을 하며, 캠프에 집결하였다. 대부분은 짐도 제대로 챙겨오지 못했다. 이어 출발지점으로 지정된 테네시 강을 따라 로스즈 랜딩(테네시주 채터누가)과 건터즈 랜딩(앨라배마주 건터즈빌) 및 하이와시 강(테네시주 찰스톤)을 따라 체로키족 국가 주변의 목적지, 테네시 주찰스턴으로 이동하였다. 그 지점에서 인디언 거류지까지 대부분이 걸어서 이동을 했고, 때로는 말과 마차, 보트를 갈아타고 약 1,900km의 거리를 세 갈래 길로 나눠서 진행했다.
첫 숙영지에서 이질 등의 전염병으로 많은 사람이 죽었다. 세 갈래 길로 출발한 후 한 체로키 부족 무리가 스콧 장군에게 날이 시원해져 이동이 쉬워질 때까지 기다려 줄 것을 탄원했다. 이것이 인정되어, 이 때 패배를 인정하고 있었던 로스 추장이 나머지 행정도 체로키 위원회의 감독으로 진행할 수 있도록 진언했다. 이렇게 할 때는 비용이 늘어나서 미국 정부에서는 반대의 목소리가 높았지만, 스콧 장군은 나머지 11,000명의 체로키 족을 로스 추장에게 맡기고 이동시키도록 약속했다. 체로키 족의 관리에 의한 이동은 8월 28일 시작되었고, 평균 1,000명씩 13개의 무리로 진행되었다. 이 배려는 모든 사람에게 최선의 방법이었지만, 질병으로 인해 많은 목숨이 죽었다.
눈물의 길에서 사망한 사람의 숫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추측이 있다. 미국인 의사이자 선교사였던 엘리자 버틀러는 한 무리와 같이 갔던 사람이었는데 집결지에서 2,000명, 도중에 2,000명이 죽었다고 추정했다. 그래서 총 4,000명이라는 숫자가 자주 인용되게 되었다. 1973년 학자들의 인구통계 조사에서는 총 2,000명이 죽었다고 주장했다. 또 1984년 다른 조사에서는 총 8,000명이 죽었다고 주장했다.
여행 도중에 사람들은 《어메이징 그레이스》를 노래하면서 사기를 높였다고 전해진다. 이 전통적인 기독교 찬송가는 훨씬 이전에 선교사 사무엘 우스터와 체로키 족 일라이어스 부디놋트의 도움으로 이미 체로키어로 번역되었었다. 이후 이 노래는 체로키 인디언에게 일종의 국가가 되었다.
■ 현재의 체로키 부족 상황
이주시킨 체로키 족은 원래 오클라호마 타레카 근처에 정착했다. 뉴에코타 조약과 눈물의 길에 의한 정치적 혼란 속에, 조약 체결의 당사자였던 메이저 릿지, 존 릿지 및 일라이어스 부디놋은 암살되었다. 릿지당의 지도자 중 유일하게 스탠드 와티만 암살을 모면했다.
체로키 족의 인구는 결국 원래대로 회복하였고, 오늘날 미국에서 가장 큰 미국 인디언 집단이 되었다. 이 이주에도 예외는 있었다. 약 1,000명의 체로키 부족이 미국 군인의 눈을 피해 조지아 주와 다른 주에 옮겨 살았다. 종족 공동으로 소유하고 있던 토지 이외에 개인적으로 토지를 소유하고 있던 체로키 족은 이주 대상이 되지 않았다. 노스캐롤라이나주 윌리엄 홀랜드 토마스는 백인(어릴 때 체로키 족의 양자가 되었다)이 소유하는 그레이트 스모키 마운틴에 있는 토지에 살고 있던 약 400명의 체로키 족은 이주 대상이 되지 않았다. 이 노스캐롤라이나의 체로키 부족은 동부 체로키 부족의 한 계파가 되었다.
눈물의 길은 미국 역사상 가장 끔찍한 이야기 사건 중 하나로 이다. 이 사건을 기념하기 위해 미국 의회는 1987년에 "눈물의 길 국립 역사의 길"을 지정했다. 이 도로는 9개의 주에 걸쳐 있으며, 길이는 3,540km이다.
2004년, 캔자스주 상원 의원인 공화당의 샘 브라운 백이, 과거의 "인디언 부족에 대한 미국 정부의 잘못된 정책"에 대해 "미국을 위해 원주민에게 사죄한다"라는 공동 결의안을 제안했다. (상원 협력 결의안 37). 그러나 상원은 아직 이에 대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2009년말 연방 상하원은 이를 통과시켰고,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2009년 12월에 이 결의안에 서명했다.
2010년 5월 20일 미국 정부는 과거 아메리칸 원주민인 인디언에 대한 폭력행위와 잘못된 정책들에 대해 공식 사과했다. 샘 브라운백 캔자스 공화당 상원의원은 이날 워싱턴 DC의 의회묘지에서 인디언 부족 대표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한 행사에 참석, 과거 인디언들에 대한 미국 정부의 잘못된 정책 및 폭력행위 등에 대해 사과하는 내용의 결의안을 낭독했다. 이 행사에는 체로키족, 촉토족, 무스코기 족, 포니 족, 시스턴 와페톤 오야테족 다섯 부족 대표들이 참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