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샘에게!
명산대찰의 순례길 떠나신다구요? 한국의 아름다운 금수강산에는 절이 있고 물이 있고 바위가 있고 무성한 숲이 있고 꽃구름이 있고 푸른 하늘이 있지 않습니까? 같은 업으로 이 세계에 태어나기는 했지만 한국에 태어나게 된 것이 얼마나 행복한가를 비로소 알게 되리라 믿습니다. 이 넓은 세계 가운데 우리나라만큼 부처님과 인연이 깊은 나라는 없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산봉우리마다 부처님 모양이며 돌 하나 바위 한 덩어리까지 모두가 보살의 상호이며 신화와 전설의 역사, 이 모든 것이 불교에 젖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로 깊은 사연이 얽혀 있지 않습니까?
그러면 이어서 반야심경을 이야기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사리자,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 수상행식 역부여시.
舍利子, 色不異空 空不異色 色卽是空 空卽是色 受想行識亦復如是.
사리자여, 물질이 공과 다르지 않고 공이 물질과 다르지 않아서 물질이 곧 공이고 공이 곧 물질이며, 감각, 지각, 경험, 인식도 그러하니라.
‘사리자’란 말은 사람의 이름입니다. 부처님 제자 가운데 가장 훌륭한 특색있는 열 사람을 십대 제자라 하는데 그 중에서 지혜가 두드러지게 뛰어난 것으로 특징이 되어 있는 사리불을 일러서 사리자라 하는 것입니다. 반야심경은 지혜의 밝은 이치를 드러내 보이는 것으로 종지(宗旨)가 되어 있기 때문에 십대제자 중에서 사리불을 대표로 불러 설법을 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사리불은 본래 인도 바라문교의 사람이었으나 어느날 ‘왕사성’의 거리를 걷고 있을 때 우연히 부처님 제자 ‘아설시’라는 스님을 만났습니다. 그때 ‘아설시’에게 놀라운 말을 들었습니다.
“일체의 모든 법은 인연으로부터 생긴다. 그 인연에 대한 법을 부처님께서 설하시고 계신다.”라는 말을 듣고 종교적인 논쟁을 하고 싶어졌습니다. 사리자가 부처님 앞에 섰을 때 부처님은 웃었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사리자여, 그대는 참으로 많은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대는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있다. 사리자여, 그대가 참으로 많은 지식을 알고 있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그러나 그대는 아무 것도 알지 못한다. 사리자여, 나와 논쟁을 벌이려는가? 정말로 나와 논쟁을 벌이고 싶거든 일 년 정도는 기다려야 한다.”
사리자는 말합니다.
“일 년 동안의 장구한 시간을 기다리라고요? 무엇 때문에 일 년이란 기간을 기다려야 한단 말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사리자여, 그대는 침묵 속에서 일년 동안 기다리지 않으면 안된다. 그래야만 나와의 논쟁이 가능하다. 내가 말하는 것은 저 침묵의 순수공간(空)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대도 저 침묵의 순수공간을 약간은 경험해야 할 필요가 있지 않겠는가.
사리자여, 그대는 전혀 침묵에 대한 경험이 없는 것 같다. 그대는 지식으로 가득 차 있다. 그대의 머리는 지극히 무겁다.
사리자여, 나는 그대에게 연민의 정을 느낀다. 그대는 이 세상에서 브라흐만이었을 뿐아니라, 저 먼 세상에서도 브라흐만이었을 뿐이다. 그것이 그대의 삶의 방식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대에게서 하나의 가능성을 발견했다. 그대의 영혼은 ‘베다’의 지식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러나 아직도 거기 빈공간이 남아있다. 사리자여, 일년 동안 이 침묵 속에 있어 다오. 거기 그대와 내가 만나서 이야기할 공간이 있을 것이다.
자, 내 곁에 앉거라. 앉아서 일년 동안 기다려라.”
이상한 일이었습니다. 사리자는 인도전역을 순례하면서 많은 사람과 논쟁을 벌였습니다. 이는 그 당시 인도의 사회 풍토였습니다. 진리의 길을 추구하는 사람은 끊임없이 보다 나은 적수를 찾아 다니며 종교적 논쟁을 벌였습니다. 논쟁을 통해서 영혼이 깨어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어떤 자가 상대를 물리칠 경우 그는 인도전역에서 제일가는 승리자로 추앙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참으로 에고(ego)의 극치일 수 밖에 없습니다. 승자가 된 그의 권위는 왕보다 높고 황제보다 더 막강했습니다. 억만장자보다 훨씬 부러운 존재였습니다. 사리자도 그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백만장자보다도 황제보다도 더 막강해지기 위하여 적수를 찾아 인도 전역을 순례하던 많은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때 사리자는 이렇게 했습니다.
“부처님을 꺾지 못한다면 나는 승자가 될 수 없다. 그러므로 나는 여기 부처님 곁에서 일년 동안 기다리지 않으면 안된다.” 사리자는 일년 동안 부처님 곁에 앉아 있었습니다. 숨소리조차 섞일 수 없는 그 침묵 가운데서 일년이 지나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부처님께서 그에게 물었습니다.
“사리자여, 이제 그대는 나와 논쟁을 벌일 수 있다. 그대와 논쟁을 한다는 것이 나에게는 더없는 즐거움이다.”
사리자는 빙긋 웃었으며 부처님의 발에 절을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말했습니다.
“저를 당신의 제자로 받아주십시오. 일년 동안의 침묵 속에서 저는 당신의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제 영혼 속에는 순간적인 섬광이 스쳐 지나갔습니다. 그리고 때때로 당신은 내 영혼 깊숙이 꿰뚫고 지나갔습니다. 당신은 저의 영혼을 연주했습니다. 부처님이시여, 당신은 저를 이겼습니다. 단 한마디 논쟁도 없이 저를 꺾었습니다.”
사리자는 이렇게 하여 부처님의 제자가 되었으며 그 뒤 제자들은 스승인 사리자를 따라 부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인연이라는 한마디의 말을 듣고 귀의한 사리불은 열심히 공부하여 심대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으며 지혜가 가장 뛰어난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지혜가 우수한 사리불을 상대자로 불러놓고 반야심경뿐만 아니라 불교에서도 제일 핵심이 되는 진리를 말씀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색(色)은 공(空)과 다르지 않고 공(空)은 색(色)과 다르지 않느니라. 색이 곧 공이며 공이 곧 색인 것이다. 그리고 색뿐 아니라 오온 가운데 수(受), 상(想), 행(行), 식(識)도 마찬가지니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색과 공은 어떤 관계에 있는가.
공이란 일종의 마음입니다. 색은 마음과 다르지 않다고 설명했습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나무가 있고 색깔이 있는 것이 있다고 하더라도 마음이 없다면 이것이 나무인지, 꽃인지, 사람인지 구분할 수가 없습니다. 결국 모든 것은 마음에 의해 구분되므로, 색은 마음에 의해 인식되어지며 마음 또한 색 없이는 나타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사람이 화를 내면 얼굴이 붉어지듯이 마음 또한 색을 통해 나타난다 이 말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미국의 식물학자가 외국에 나갔다가 사막의 선인장 꽃이 하도 예뻐 가져왔는데 특히, 작은 선인장에 애정을 가지고 키웠답니다. 그 학자는 선인장을 키우면서 “선인장에 가시가 없다면 얼마나 좋을까?”하고 10년 가까이 그런 말을 하면서 정성스레 키웠습니다. 그러자 어느날 선인장의 가시가 하나 둘 없어졌다고 합니다. 이것이 ‘식물에도 마음이 있다’는 유명한 논문입니다.
우리는 모두 제각기 자기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마음이 제각기 다르고 특색이 있기 때문에 붉은 꽃도 피고 파란 꽃도 피고 각각 색깔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개구리도 맑은 물 속에 살면 그 물 색이 되고 산에 와서 푸른 나무에서 살면 푸른 색을 띱니다. 또 돌 뜸에서 살면 돌과 같은 색으로 변합니다. 이와 같이 색과 마음은 둘이 아니며 사람의 모습이 어떻게 생겼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 마음을 구분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가능하면 마음을 원만하게 써야 원만상호를 갖출 수 있는 것입니다. 위에서 말씀을 했습니다만 불교에서는 물질 전부를 색이라 하였습니다.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공의 배경이 되고 공의 근본이 되며 공의 내용으로 되어 있는 ‘인연’이라는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인연을 알게 되면 자연히 공의 뜻을 파악하게 되는 것입니다. 인연을 알게 되면 불교를 알게 되는 것이라고 옛 사람도 말씀하고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실로 이 인연의 원리를 체득하였으며 연기(緣起)의 진리를 깨달아 마침내 부처님이 되신 것입니다. 보리수 밑에서 깨치신 성도(成道)란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이 인연의 원리가 정반왕의 아들 ‘싯달태자’를 부처님이 되시도록 만든 것입니다. 마치 ‘뉴톤’이 만유인력을 발견했듯이 부처님께서는 만물은 인연에서 생긴다고 하는 이 영원한 진리를 처음으로 발견하신 것입니다.
인연의 원리란 부처님께서 새롭게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그것을 발견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인연의 법칙을 말씀하신 것이 바로 불교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천오백여년 전에 부처님은 법계로 돌아가셨지만 인연이라고 하는 원리 그 법칙은 법신(法身)의 상(想)에 있어 영원불변 하는 불교의 진리로, 아니 우주의 진리로 오늘날까지 엄연히 빛나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뿐 아니라 미래 영겁을 두고 언제까지나 영원한 진리로 빛나게 될 것입니다.
인연을 좀더 자세히 말하자면 인연은 인(因)과 연(緣)과 과(果)의 관계를 말한 것으로 이것은 또한 연기(緣起)라고도 말하는 것입니다. 곧 인은 원인을 말하는 것으로 결과에 대한 직접적인 힘이라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연은 인을 보조해서 결과를 생기게 하는 간접의 힘인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여기 한 알의 보리가 있다고 할 때 이것은 곧 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보리를 책상 위에 얹어 놓기만 해서는 한 알의 보리밖에는 아무 것도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흙 속에 뿌려서 거기에 비와 이슬과 햇빛과 비료 같은 여러 가지의 연의 힘이 보태어지면 한 알의 보리는 마침내 푸르른 보리이삭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인’, ’연’, ’과’의 관계가 되는 것입니다. 꽃이 피고 열매를 맺는다는 결과는 반드시 ‘인’과 ‘연’의 화합에 의하여 비로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흔히 모든 사물을 다만 원인과 결과만의 관계를 가지고 말하려 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이 복잡미묘한 일체의 사물을 간단하게 원인과 결과의 형식만으로 해석하려는 것은 참으로 불완전하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이 ‘인연’에 의하여 만들어지고 ‘인연’에 의하여 생겨난 모든 사물은 도대체 어떠한 뜻이 있으며 어떠한 성질을 가지고 있는가 할 때 그것은 실로 위로도 아래로도 사방으로도 시간적으로도 공간적으로도 전부가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밀접한 관계가 얽혀져 있는 것입니다.
언뜻 볼 때는 아무런 인연도 관계도 없는 것 같이 보이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어느 것이나 모두가 깊은 인연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한 포기의 풀이 발끝에 채이는 것도 인연이며 오다 가다 옷자락이 스치는 것도 전세의 인연이라 하는 말이 결코 하나의 이론만이 아닌 것입니다. 생각하니 이렇다. 불교적으로 말하니까 그렇다 하는 것이 아닙니다. 불교적이고 불교적이 아니고가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이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진실입니다. 사실과 진실이 그대로 웅변하는 것입니다.
여기 시계가 하나 있다고 합시다. 표면은 긴 바늘과 짧은 바늘이 움직이고 있을 뿐입니다만 속을 열어 본다면 말할 수 없이 세밀하고 복잡한 기계가 서로 결합해서 그 표면의 바늘을 움직이도록 하는 것입니다. 나는 지금 설악산 속에 있는 조그만 절에 살고 있습니다. 이것은 지극히 간단한 사실입니다. 그러나 설악산이라는 이곳이 어디에 있는가를 생각하고 나와 나의 고향을 생각하고 점점 깊고 넓게 생각해 갈 때 마지막에는 ‘나’라고 하는 하나의 존재가 온 대한민국뿐 아니라 온 세계 모든 것과 관계되지 않은 것이 없는 것입니다.
다만 우리들이 그것을 깊이 생각지 않고 있을 뿐입니다. 사실에 있어서는 알고 모르고 간에 일체의 모든 것은 서로가 무한한 관계에 얽혀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시간적으로 보더라도 오늘이란 것은 어제가 없이는 있을 수 없는 것이며 또한 내일을 끊어 버리고 오늘이 있을 수도 없는 것입니다. 어제를 업고 내일을 안고 있는 것이 오늘 인 것입니다.
우리들이 살고 있는 세상 일체의 사물은 모두가 고립해서 홀로 있는 것이 아니라 위로 아래로 옆으로 끝없는 상대적 관계 속에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곧 무진의 연기적(緣起的)관계에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현재 ‘나’라는 것은 무한한 공간과 영원의 시간과의 교차점에 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인연이란 이것으로 인하여 일체의 모든 사물(곧 오온의 집합)은 물체와 정신의 화합으로 성립되어 있는 세계라는 것입니다. 어느 것 하나라도 그대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항상 변화(變化)유전(流轉)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부처님께서는 제행무상(諸行無常)이라 하였습니다. 모든 것은 한결같이 변해가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 진리는 부정의 여지가 없는 것이며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입니다.
이 세계에서 영원불변이란 절대로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가령 현실에 존재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잠시이며 일시적인 존재이기에 가유(假有)라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일시적인 존재를 유(有)라 합니다. 영원한 존재로서 상유(常有)는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인연에서 생겨지는 일체의 법은 모두가 공(空)입니다. 그리고 공(空)의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옛날에 어떤 산적이 한 선사에게 물었습니다.
“불법은 도대체 무엇이며, 그 불법이라는 것은 어디에 있느냐?”
그래 선사가 대답하기를
“불법은 내 마음 속에 있느니라.”
하였습니다. 그러자 산적은
“그 마음은 어디에 있느냐?”
“내 가슴 속에 있느니라.”
그래서 산적은 시퍼런 칼을 꺼내 가지고
“그 불법이 어떻게 생겼는지 한번 보자.”
하면서 막 찌르려고 덤벼들었습니다.
그 때 그 선사는 게송 하나를 읊었습니다.
“해마다 꽃 피우는 저 나무”
쪼개 본들 꽃이 있을 소냐.”
꽃나무를 쪼개 보아도 꽃은 없습니다.
이것이 색즉시공(色卽是空)이며 공즉시색(空卽是色)의 원리입니다. 언제까지나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물론 틀린 생각이겠지만 또 언제까지나 아무 것도 없다고 생각하는 것도 틀린 것입니다. 없는 듯하면서도 있고, 있는 듯 하면서도 없는 이것이 실상(實相)입니다.
유(有)는 공(空)을 내포하지 않은 ‘유’가 없으며 ‘공’은 ‘유’를 내포하지 않은 ‘공’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공’이란 결코 무(無)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유’와 다르지 않은 ‘공’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공’과 다르지 않은 ‘유’라는 뜻입니다. 살면서 죽고 죽으면서 살고 있는 이것이 인생의 상(想)인 것입니다. 우리 범부들은 ‘유’라고 할 때 ‘유’에 집착하고 ‘공’이라 할 때 ‘공’에 집착하기 때문에 이것을 떨어버리기 위해 ‘공’이 곧 색이며 ‘색’이 곧 ‘공’이라고 경계하신 것입니다. 색뿐 아니라 오온 가운데 남아 있는 수(受), 상(想), 행(行), 식(識)도 모두 같으니라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훌륭하고도 묘한 표현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기에 있어 우리들은 한편만 보고 한편은 등한시 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것을 주의하지 않으면 안될 것입니다. 어떤 물체의 앞만 보고 뒤에 숨어 있는 참모습을 보지 못하는 것을 피상적인 견(見)이라 하는데 이것은 참된 진리를 모르는 사람인 것입니다.
요즈음 사회는 물질만능주의가 팽배하여 돈만 있으면 무엇이라도 해결할 수 있다고 하여 돈이란 것을 제일의 위치에 두는 사람들이 많습니다만 그러나 돈을 가지고도 해결할 수 없는 일이 많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결제능력을 가지고 사람의 인격까지도 판단하려는 인간들이 있으나 과연 인격이 금전 이하일 수가 있겠는가 말입니다. 결국 사람이 물질이란 것에만 치중하는 커다란 착각인 것입니다.
유물론적 견지에서 보는 방법도 물론 있기는 하겠으나 다만 보는 방법에 그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은 괜찮으나 결코 전체적인 올바른 방법이라고는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바늘 구멍 같은 창 구멍으로 하늘을 보더라도 그것이 하늘은 하늘입니다만 어디까지나 그것은 한쪽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일체는 마음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정신만으로 사회가 움직인다고 생각할 수도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불교는 물질과 정신의 합일체(合一體)로 이 두 가지를 하나의 내용으로 보려고 하는 ‘인연법’, 그리고 ‘연기법’에 의한 가르침인 것입니다. 물질의 가치는 마음에서 결정되는 것이며 마음의 가치는 물질에 의하여 입증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올바른 견해를 가져야 할 것입니다. 어느 한쪽에 편중되어 그것이 전체인 줄 착각하는 어리석은 생활을 지양해야겠다는 말입니다. 물질적으로는 부자이면서 가난하게 살 것인가. 물질적으로는 가난하지만 부장의 마음으로 살 것인가. 이것은 그 사람의 마음 갖기에 달린 것입니다.
‘인연의 원리’, ‘연기의 철학’을 옳게 알아 가난할지라도 부(富)한 생활을 해야 할 것입니다. ‘인연의 원리’를 밝게 알아 반야의 공(空)을 깨치고 반야의 진리에 의하여 바른 생활을 영위하는 것이 진실로 행복한 생활인 것이며 관세음보살은 이러한 생활을 하고 있는 그 속에서 탄생하고 시현(示顯)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창 틈으로 새어드는 풀벌레 소리에 밤도 어지간히 깊었나 봅니다. 펜을 놓으며 달샘의 고운 마음을 생각해 보니 달샘이 바로 관세음보살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면 다음에 또 계속하기로 하고 오늘은 이것으로 그칩니다.
9월 7일
운호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