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2025년은 『진달래꽃』(매문사, 1925) 출간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이 시집에 수록된 많은 시들은 오래도록 한국인들의 사랑을 받았다. “나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말없이 고이 보내드리우리다.”로 시작하는 「진달래꽃」을 비롯해서, “엄마야 누나야 강변살자”가 반복되는 「엄마야 누나야」나, “접동 접동 아우래비 접동”으로 시작하는 「접동새」 등 한국 시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도 누구나 한 소절쯤 읊어볼 수 있는 작품이 소월의 시이다. 그런 측면에서 김소월은 민족 시인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아니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김소월에 관한 대중적인 정보는 잘못된 것이 너무 많아서 놀라울 정도다. 대표적으로는 김소월의 죽음에 관한 사실이다. 대중적으로 소월은 음독 자살로 생을 마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무엇을 먹었는가에 대해서는 엇갈리긴 하지만, 어떤 알 수 없는 약이라든가 심지어는 아편으로 단정하는 경우도 있다. 정순한 정서를 단정한 스타일로 노래한 「진달래꽃」의 시인과 아편은 서로 이질적이지만, 한 개인이 감당할 수 없는 절망에 빠져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이야기의 구조 자체는 일종의 대중적 매력을 가진다. 민족 시인의 비극적 생애를 어떤 극적인 결말로 완성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김소월은 어떤 방식으로든 스스로 생을 마감하지는 않았다는 사실이다.
1902년에 태어난 김소월은 1934년 12월 24일에 타계했다. 『정본 소월 전집』의 편집자 김종욱은 12월 27일자 『조선일보』 기사를 근거로 김소월의 사인이 뇌출혈이라고 확인했다. 소월이 마지막까지 서신을 주고받았던 안서 김억은 죽음의 원인을 저다병이라고 적었다가, 이후에 뇌일혈로 수정했다. 소월은 말년에 고향 평북 정주로 돌아가 조선일보 지국을 경영하며 중앙 문단과는 거리를 두고 지냈다. 경영에는 재주가 없어 경제적인 곤란함을 겪었지만, 이런 점조차 문단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았던 것 같다. 그래서 소월이 타계한 후 죽음에 대한 의사의 소견이나 경찰의 조사 결과 등 건조하고 객관적인 기사가 몇 개 났을 뿐 그에 대한 문단적 반향은 별로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상황이 바뀐 것은 1959년에 소월의 삼남 김정호 씨가 언론에 등장하면서이다. 그는 아버지가 음독자살을 했다고 했으며, 소설가 김광식은 소월의 처제 홍지인 여사와 김정호 씨가 구술한 죽음의 과정을 상세하게 전하고 있다. 이들과 더불어 소월의 아내인 홍실단 여사, 숙모인 계희영 여사 등 가족들이 소월의 생애와 그의 죽음에 관해 구술한 내용은 언론을 통해 지속적으로 보도되어 점점 많이 알려지게 되었다. 문제는 이들의 구술 내용이 동일하지는 않다는 것이다. 약을 먹었다는 사실 자체는 대부분 동일하지만, 약을 먹은 과정이나 약의 종류는 통일되어 있지 않다. 홍실단 여사는 부부가 동반으로 약을 먹었다고 했고, 김정호 씨는 소월이 ‘은단이라는 독약’을 자기 입에도 넣어주었다고 했다. 숙모 계희영은 이 약을 소월이 전날 장터에서 사온 것이라 했고, 홍지인 여사는 집에 상비해두고 있었던 약이라고 했다. 대체로 1960년대 내내 간헐적으로 이어진 가족들의 ‘회고담’이나 ‘회고록’에서 소월은 스스로 생애를 끊은 것으로 알려진 것이다. 이는 다시 문인들의 산문에서 언급되면서 마침내 하나의 확정적 사실이 되었다.
김소월(1902. 9. 7 ~ 1934. 12. 24.)
학계에서는 대체로 이러한 가족들의 회고를 크게 신뢰하지 않는데, 사실과 다른 부분이 많기도 하거니와 대체로 회고록이란 회고하는 자의 욕망을 배제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특히 김소월의 유년 시절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알려져 있는 숙모 계희영의 역할은 대부분 그가 1960년대에 출간한 『내가 기른 소월』(장문각, 1969)에 근거하고 있는 것이다. 소월은 자신의 신변잡기에 관한 산문을 거의 쓰지 않았기 때문에, 계희영의 회고를 완전히 부정할 수도 완전히 믿을 수도 없는 형편이기는 하다. 소월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했다는 부분까지는 사실 판단을 들이대기 어려우나, 소월의 문학적 성취에 자신의 한 역할을 지나치게 과대 평가하고 있다는 점은 확실해 보인다.
문제는 회고 자체는 아닐 터이다. 다만 그것이 회고자를 중심으로 사후적으로 변형된 사실이라는 점은 중요하다. 회고자가 거짓말을 한다는 것은 아니다. 과거의 경험은 세월이 흐른 뒤에 자기중심적으로 기억될 수밖에 없고, 회고는 그 변형된 기억을 사실로 믿을 터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러한 잘못된 정보들이 인터넷을 비롯해서, 대중서적들, 미디어를 통해 확실한 사실로 둔갑되어 퍼져나간다는 사실이다. 학계에서 아무리 이를 바로 잡고자 해도 한번 각인된 오류는 쉽게 제거되지 않는다. 나는 김소월에 대한 김억의 애도 작업에 관한 글을 쓰면서, 이는 김소월을 비극적으로 신화화하고자 하는 심리가 대중에게 있었기 때문이라고 썼다. 자살 설을 제기하는 쪽이나 받아들이는 쪽이나 한결같이 그 죽음의 원인을 일본 경찰의 핍박이나 민족 현실에 대한 울분에서 찾는 것은 그 때문이다. 한 시인이 자신과 민족의 불행에 깊은 한을 품은 채 스스로 목숨을 마감했다는 이야기는 이제 하나의 신화가 되었다.
시인의 ‘사실’을 재구성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소월처럼 옛 사람인데다 스스로 자신에 대해서 말이 없었던 시인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그러므로 가족이나 지인 등의 ‘회고’는 시인의 생애적 사실을 재구성하는 데 가장 중요한 참고점이 될 수 있다. 문제는 이 회고를 전적으로 신뢰하다보면, 함정에 빠지기 쉽다는 것이다. 2025년 현재에도 김소월의 죽음을 검색하면, 아편 음독 자살이 거의 확정적인 사실로 게시되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시인의 ‘사실’이 시를 이해하는 데 중요할까? 그렇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중요한 사실이 잘못 퍼져있다면 바로잡아야 할 것이다. 소월이 민족 시인이므로 더더욱 그렇다. 시를 이해한다는 것은 물론 시인의 생애를 완전히 사실적으로 재구성해야만 가능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잘못된, 어쩌면 구술자에 의해 왜곡되고 대중에 의해 변형된 그 ‘사실’을 기반으로 해서야 어떻게 시인에 대한 이해를 올바르게 할 수 있겠는가.
【참고 】
• 김종욱 편, 『정본 소월 전집』(명상, 2005)
• 박슬기, 「애도의 시학과 공동체-김억과 김소월의 우정」(『상허학보』 47집, 2016)
출처 : 대학지성 In&Ou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