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청난 인파를 두려워하여 명절, 크리스마스, 연휴 등에는 멀리 나가는 것을 피하고 집 근처에서 놀던 우리 가족이 이번에는 큰 결심을 했다. 새해 일출을 보러 가기로 한 것. 충남 당진군 왜목 마을은 전국에서 유일하게 일출, 일몰, 월출 광경을 한 곳에서 볼 수 있는 곳으로 잘 알려져 있다.
원래는 1월1일 새벽에 출발하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12월 30일 저녁 먹으면서부터 떠나자 성화를 부리던 남편 덕에 12월 31일 오후에 준비 없이 출발한 길, 서울에서 당진까지 가는 길은 그다지 막히지 않았다. 서해 대교 앞에서 잠시 서행했을 뿐, 정작 서해대교를 건너고 나니 다시 쭉쭉 뻗은 큰 길을 쌩쌩 달릴 수 있었다. 시간이 시간이었던 지라 서해대교를 건너면서는 일몰도 볼 수 있었는데 붉게 빛나는 태양이 하늘 가득 크게 자리하지는 않았지만 보석처럼 붉게 바다 위로 떨어지는 모습이 곱기만 했다.
(필경사 - 시집 <그날이 오면>의 시들 중 ‘필경’이란 시에서 이름을 따왔다 함 -)
서해대교를 건너 왜목 마을로 향하는 국도를 타다보니 좌측으로 필경사 이정표가 보였다. 계몽 소설가로 잘 알려진 심훈 선생의 <상록수>가 집필되던 그의 집이라는데 그냥 지나칠 수가 있는가. 구불구불 시골길을 따라 얼마간 들어가다 보니 그가 직접 설계하였다는 바로 그 집이 고즈넉이 앉아 있었다. 초가를 얹은 그의 집은 신발을 벗고 집안을 두루 둘러볼 수 있도록까지 배려되어 있었는데 그 안, 그 책상 앞에 앉아 고심하며 원고지를 채워나갔을 선생의 모습을 생각하니 가슴이 뭉클했다.
필경사를 돌고나오니 바로 어두워졌다. 다시 큰 도로를 타고 씽씽 달리다가 우측으로 성구미 포구라고 씌여진 이정표를 따라가 보았다. 횟집, 회센타, 선착장의 배들 가득한 포구를 잠시 들러보고는 다시 왜목 마을로 향했다. 이미 시꺼먼 어둠이 내려 앉은 시각. 그 많던 차들이 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목적지 다 와서는 차가 꼼짝을 못할 지경이었다. 입구에 들어서서는 엄청난 인파와 차량에 입이 딱 벌어질 지경이었다. 마을 입구에 있는 주유소는 기름 넣으러 들어오는 차보다 주차하기 위해 들어서는 차가 더 많았고 그 외 온 마을 도로도 주차장으로 전락했으며 호텔, 여관은 커녕 민박도 구할 수 없어 대부분 차에서 자야 한다는 소리들을 하는데 이제 좀 쉬어볼까, 했던 눈앞이 막막해질 지경이었다.
그래도 불야성의 해변가에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쉬지 않고 여기저기서 폭죽이 터졌고 곳곳에 피워져 있는 모닥불 가에 옹기종기 모인 사람들은 가는 해에 대한 아쉬움보다 오는 해를 기다리는 설레임에 잔뜩 즐거워 보였다. 물론 그 많은 횟집에 발 디딜 틈이 있을 리 만무했다. 할 수 없이 근처 포장마차에서 국밥과 술 안주로 푸짐히 저녁을 먹고 해변가를 돌았다. 남편은 밀레니엄을 맞이하던 12월 31일 밤을 떠올리며 나의 순수함을 칭찬했고 아이는 뻘이 드러난 바닷가를 돌며 큰 소리로 웃었다. 따뜻한 밤이었다.
(진이 뒤로 물이 빠져 나간 갯벌에 모닥불을 피운채 밤을 지새는 이들의 모습이 가득하다)
카운트 다운을 셀 때가 되어 공연이 벌어지는 축제장으로 부랴부랴 달려갔다. 개그맨 김대희의 진행에 따라 모두가 입을 모아 “10, 9, 8, 7, 6......” 하고 카운트 다운을 세고 있자니 가슴이 벅차올랐다. 바로 머리 위에서 멋진 불꽃 놀이가 펼쳐져 몇 번이고 우리를 향해 쏟아지는데 그 아름다움과 흥분에 탄성 또한 절로 났다. 드디어 2006년이 가고 2007년이 된 것이다. 얼마나 흥분했는지 불꽃 놀이가 벌어진 그 몇 분 사이에 뒤집어 쓰고 있던 담요를 잃어버렸는데도 알지 못했다.
여전히 흥겨운 거리를 걷다가 동지에도 못 먹어본 팥죽을 한 그릇 사 먹고 차 안에 들었다. 물론 잠이 올 리 만무했다. 낮부터 줄기차게 울려대던 남편과 내 핸드폰, 모두가 신년 축하 문자 메시지였는데 새벽녘까지 줄창 이어지더니 그예 밧데리를 다 잡아 먹어 새벽녘에는 두 사람의 것 모두 꺼져 버리고 말았다.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어려운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새해에 대한 희망만은 잃지 않았구나, 하는 생각에 훈훈했다.
잠을 못 청하던 남편, 먹을 것으로라도 시간을 채우려는 듯 떡볶이와 오뎅을 사 와 나를 돼지처럼 먹였다. 그렇게 씩씩댈 정도로 배가 불러서야 한 시간 정도 눈을 붙일 수 있었다.
어느덧 하늘이 푸르스름하니 밝아왔다. 7시 30분이 되어 남편과 진이를 깨워 고대하던 일출을 보러 나갔다. 지난 밤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해변가를 가득 메웠다. 밤에 밀려들었던 물이 빠져 나가 다시 뻘이 드러난 바닷가에 선 많은 사람들이 한껏 기대에 찬 낯으로 한 하늘만 향했다. 다행히 바람도 많지 않고 생각만큼 춥지 않았다. 위치도 좋았다. 해만 뜨면 되었다.
(등 뒤로 희미한 일출이 보일둥 말둥)
해만....... 해만......
그러나 ......해는......태양은.......일출은...... 볼 수 없었다. 구름에 가린 어두운 하늘 탓에 8시가 다 되어 가도록 해는 모습을 드러내지 못했다. 웃음이 다 나왔다. 수십 만 인파가 바로 이 순간만을 위해 밤을 새워가며 기다렸는데 그 순간이 오지 않다니...... 그런데 일출 보기를 포기하고 사람들이 밀물처럼 빠져나가고 있는 바로 그 순간, 누군가의 고함 소리가 들렸다.
“태양이다! 해가 나왔다!”
해변가를 빠져 나가던 사람들이 일제히 돌아섰다. 저 멀리 바닷가에서 정말 붉은 기운이 떠 오르는 게 보였다. 기대했던 장엄함 따위는 아니었다. 하늘을 빈틈없이 가득 메운 짙은 구름에 가려 작고 둥근 붉은 기운만을 겨우 알아볼 수 있을 정도였다. 그래도 그나마 다행이라고 모두의 흐린 낯에 웃음이 감도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떠오르는 순간은 모두 놓쳤지만 뜨긴 떴다, 그치?^^
해를 보고나자 수 십만 인파가 또 다시 한꺼번에 움직였다. 주차장을 빠져 나오는 데에만 한 시간이 걸렸다. 왜목 마을과 실치회로 유명한 장구항을 벗어나고 나니 포구를 끼고 도는 도로가 다시 한산해졌다. 그 많은 인파가 또 어디로 사라졌을까?
새해 아침이니 떡국을 먹어야 한다고 우기는 남편과 진이 때문에 식당이란 식당은 다 뒤지고 다녔는데 참으로 어처구니없게도 어느 식당에서도 떡국은 팔지 않았다. 할 수 없이 12시가 다 되어서야 고픈 배를 달래기 위해 설렁탕집으로 기어 들어야 했다.
(퇴역한 실제 군함을 이용한 관광지-삽교호 함상공원)
밥을 먹고나니 다시 한 번 기운이 불끈, 이번에는 삽교호 함상 공원으로 향했다. 동양 최초의 군함 테마파크라는데 실제 군함과 탱크, 경비행기 등을 전시해 놓고 그 안을 전시용으로 개방한 덕에 신기한 구경이 되었다. 바로 옆에 놀이 공원와 대규모 회센터도 있어 아이들을 동반한 가족들이 한 나절 놀고 먹고 즐기기에 안성맞춤인 곳이었다.
그래도 뭐니뭐니해도 그 지역 특산물을 먹어야 하지 않겠느냐. 남편의 말이었다. 여느 회는 어디서건 먹을 수 있지만 간재미 회나 실치회는 이 곳뿐이라지 않느냐. 이 또한 남편의 주장이었다. 할 수 없이 우리는 이름도 생소한 실치회(알고보니 뱅어포 만드는 뱅어란다.)를 먹기 위해 온 길을 되돌아 장고항으로 향했다. 아직 개발 중인 듯 한산한 장고항 끄트머리 횟집이 ‘실치회’ 명판을 걸고 바닷가에 면해 있었다. 그 운치가 좋아 들어갔는데 이번에도 허무.... 실치는 4월, 5월에만 나온단다. 할 수 없이 지난 밤에 들렀던 성구미 포구로 다시 갔다. 그곳에서 어른 손바닥보다 큰 대하를 원 없이 먹는 것으로 아쉬움을 달랬다. 그리고 서울행. 예상대로 엄청나게 막혔다.
그래도 흔치 않은 경험을 많이 한 뜻 깊은 시간들이었다. 생전 다니지 않던 새해 해돋이 구경을 한답시고 차에서 자며 기다리던 고생도, 장시간 차가 밀리는 지루함조차도, 수십만 인파로 불야성을 이루던 해변가의 흥분을 떠올리면 아무런 고생도 아니라 여겨졌다. 다만, 화장실이 좀 버거웠다. 그 많은 사람들을 수용하기에 턱없이 부족한 시설 덕에 화장실 앞에서 30여분씩 기다리는 것은 보통, 만삭의 임산부가 버티기엔 너무나도 큰 고충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도 절대 후회스럽지 않은 경험이었기에 1년 후에도 또 다른 해돋이를 보러 떠나자는 남편의 말에 행복한 미소를 지어 보았다. 내년엔 새로 태어날 둘째까지 네 식구가 함께 해돋이를 보게 되겠지.^^
(2007. 1.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