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을 돌보는 마음 챙김과 성체를 모신 그리스도인의 길은 다른 길인가?’
요즘 저는 틱낫한 스님의 가르침과 가톨릭 신앙의 통섭적 묵상을 해봅니다 .
그 과정을 쉬운 말로 정리하여 삼가 이웃들과 나누고자 이 글을 싣습니다
1.
베트남의 선승 틱 낫한(Thích Nhất Hạnh, 틱낫한) 스님은 전쟁과 고난의 시대를 살면서도 인간의 마음 안에 있는 평화의 가능성을 끝까지 믿었습니다.
그의 대표적 가르침을 전하는 플럼빌리지(Plum Village) 전통과 그의 책 『마음 챙김의 기적』(The Miracle of Mindfulness) 은 우리에게 아주 단순하지만 깊은 진리를 일깨워 줍니다. 그의 가르침은 모든 현대인에게 깊은 감동을 안겨 주고 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행복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닙니다.
행복은 조건이 완벽하게 갖추어진 뒤에야 찾아오는 보상이 아닙니다.
행복은 지금 내가 숨 쉬고 있다는 사실, 한 걸음 걸을 수 있다는 사실, 차 한 잔을 마실 수 있다는 사실, 누군가의 미소를 바라볼 수 있다는 사실 안에 이미 씨앗처럼 숨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먼저 해야 할 일은 세상을 바꾸는 일이 아니라, 내 ‘마음을 알아차리는 일’입니다.
내 안의 고통을 부정하지 않고, 내 안의 슬픔을 외면하지 않고, 내 안의 분노와 두려움을 억지로 몰아내지 않고, 조용히 바라보는 것입니다.
자신을 돌본다는 것은 이기적인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다른 사람을 해치지 않기 위한 가장 첫 번째 사랑입니다.
자기 안의 상처를 돌보지 못하는 사람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 상처를 말과 행동으로 다른 사람에게 옮깁니다.
자기 마음을 살피지 못하는 사람은, 세상을 바로잡겠다고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자기 안의 혼란을 공동체 안에 퍼뜨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틱낫한 스님의 마음 챙김은 단순한 명상법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이 자기 마음 앞에 정직하게 서는 일입니다.
내 안에서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알아차리는 일입니다.
내가 지금 분노하고 있는지, 두려워하고 있는지, 인정받고 싶어 하는지, 버림받았다고 느끼는지, 사랑받지 못했다고 느끼는지를 조용히 바라보는 일입니다.
그 알아차림에서 비로소 치유가 시작됩니다.
2.
그러나 자기 감정을 도저히 관찰할 수 없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질문이 생깁니다.
정말 모든 사람이 자기 감정을 관찰할 수 있을까요?
마음이 너무 어지럽고, 번뇌와 열등감과 패배.의식과 소외감으로 뒤엉켜 버린 사람에게도 그것이 가능할까요?
어떤 사람은 자신을 아주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스스로는 착한 사람이고, 정의로운 사람이고, 억울한 사람이라고 여깁니다.
다른 사람에게도 그렇게 보이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마음 깊은 곳에는 오래된 상처가 있습니다.
인정받지 못한 아픔이 있습니다.
비교당한 기억이 있습니다.
실패의 수치심이 있습니다.
사랑받지 못했다는 외로움이 있습니다.
이런 상처가 치유되지 않으면, 사람은 자기 안의 고통을 자기 것으로 보지 못합니다.
그 고통의 원인을 모두 타자에게 돌립니다.
“내가 불행한 것은 저 사람 때문이다.”
“내가 상처받은 것은 저 공동체 때문이다.”
“내가 무너진 것은 세상이 나를 알아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마음은 왜곡되기 시작합니다.
자기 성찰은 사라지고, 원망이 자리를 차지합니다.
대화는 끊어지고, 비난이 시작됩니다.
공동체를 살리는 말보다 공동체를 갈라놓는 말이 많아집니다.
뒷말과 의심과 공격이 관계를 무너뜨립니다.
종교 심리학적으로 보면, 이런 사람은 자기 안의 상처를 제대로 직면하지 못하고 그것을 밖으로 투사합니다.
자기 안의 불안, 열등감, 분노, 수치심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기 어렵기 때문에,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던져 버립니다.
그래서 자신은 피해자라고 느끼지만, 실제로는 주변 사람들을 아프게 합니다.
자신은 진실을 말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상처 입은 마음이 만든 왜곡된 해석을 말하고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런 상태에서는 마음김이 쉽지 않습니다. 어쩌면 블가능 할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마음 챙김은 자기 감정을 남 탓으로 돌리기 전에, 먼저 “지금 내 안에서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가”를 보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상처가 깊은 사람은 바로 그 질문을 견디기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틱낫한 스님의 가르침은 이런 사람에게도 필요하지만, 동시에 매우 어려운 길입니다.
마음 챙김은 달콤한 위로가 아니라, 자기 마음의 진실 앞에 서는 용기입니다.
남을 향해 들고 있던 손가락을 잠시 거두고, 자기 마음의 어두운 방을 조용히 들여다보는 일입니다.
그때 비로소 사람은 알게 됩니다.
내가 미워한 사람보다 더 깊이 다친 사람은 어쩌면 나 자신이었다는 것을.
내가 공격한 공동체보다 먼저 무너진 것은 내 마음의 평화였다는 것을.
내가 타자를 비난하며 지키려 했던 것은 진리가 아니라, 상처 입은 자존심이었을 수도 있다는 것을.
3.
틱낫한 스님은 자기 안에 평화가 있어야 다른 사람에게도 평화를 전할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이 말은 매우 단순하지만, 종교 심리학적으로도 깊은 진실을 담고 있습니다.
불안한 사람은 불안을 퍼뜨립니다.
분노에 사로잡힌 사람은 분노의 언어를 사용합니다.
열등감에 묶인 사람은 타인의 기쁨을 견디지 못합니다.
자기 안의 수치심을 돌보지 못한 사람은 다른 사람을 수치스럽게 만들어 자기 마음을 방어하려 합니다.
반대로 자기 안에 평화를 지닌 사람은 말투부터 다릅니다.
그는 쉽게 단정하지 않습니다.
쉽게 공격하지 않습니다.
상대의 허물을 보아도 그 사람 전체를 무너뜨리지 않습니다.
고통을 보아도 그것을 이용하지 않습니다.
침묵할 줄 알고, 기다릴 줄 알고, 상대가 회복될 자리를 남겨 둡니다.
이것이 마음 챙김의 윤리입니다.
마음 챙김은 단순히 내 마음이 편해지는 기술이 아닙니다.
그것은 내가 다른 사람에게 어떤 존재로 다가가는지를 결정하는 영적 태도입니다.
내 마음이 돌봄을 받으면, 내 말도 부드러워집니다.
내 마음이 정화되면, 내 시선도 맑아집니다.
내 마음이 평화를 배우면, 내 존재 자체가 누군가에게 쉴 자리가 됩니다.
그러므로 자기 돌봄은 자기중심주의가 아닙니다.
오히려 공동체를 위한 책임입니다.
내가 나를 돌보지 않으면, 내 안의 혼란이 언젠가 가족에게, 이웃에게, 교회에, 공동체에 흘러나갑니다.
그러나 내가 내 마음을 하느님 앞에서 돌보기 시작하면, 내 존재는 조금씩 화해의 공간이 됩니다.
4.
이제 저는 이 가르침을 가톨릭 신앙 안에서 다시 바라볼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가톨릭 신자에게 마음 챙김은 단순히 자기 마음을 관찰하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자기 마음을 바라보되, 혼자 바라보지 않습니다.
우리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함께 자기 마음을 바라봅니다.
특히 성체를 모시는 가톨릭 신자는 자기 안에 단순한 기억이나 상징만을 모시는 것이 아닙니다.
성체성사 안에서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모십니다.
그분의 생명을 모시고, 그분의 사랑을 모시고, 그분의 용서를 모십니다.
그렇다면 성체를 모신 사람의 마음 챙김은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주님, 지금 제 안에 분노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분노를 남에게 던지기 전에, 먼저 당신 앞에 가져옵니다.
주님, 지금 제 안에 열등감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열등감으로 누군가를 깎아내리기 전에, 먼저 당신의 사랑 안에서 저 자신을 바라보게 하소서.
주님, 지금 제 안에 원망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원망이 공동체를 해치기 전에, 먼저 제 상처의 뿌리를 보게 하소서.”
이것이 가톨릭적 마음 챙김입니다.
그것은 마음을 비우는 것만이 아니라, 마음을 그리스도의 현존 앞에 가져가는 것입니다.
내 감정을 억누르는 것이 아니라, 내 감정을 주님의 빛 안에서 식별하는 것입니다.
이 분별력은 정말로 신앙인의 은혜입니다.
내 고통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고통을 십자가와 부활의 신비 안에서 다시 바라보는 것입니다.
틱낫한 스님이 “지금 이 순간”을 강조했다면, 가톨릭 신앙은 그 순간 안에 엠마누엘 하느님, 곧 “우리와 내 곁에 지금 나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이 현존하신다는 진실의 고백입니다.
숨을 쉴 때, 주님이 함께 계십니다.
걸을 때, 주님이 함께 걸으십니다.
식탁에 앉을 때, 주님이 함께하십니다.
누군가를 용서하기 어려울 때도, 주님은 그 마음의 가장 깊은 곳에 함께 계십니다.
성체를 모신 신자는 성당 안에서만 그리스도인인 것이 아닙니다.
미사가 끝난 뒤에도 그는 성체를 모신 사람으로 살아갑니다.
그는 언제나 하느님과 함께 있습니다.그의 일상은 성체 후의 삶입니다.
그의 말은 성체를 모신 입에서 나오는 말이어야 하고, 그의 손길은 성체를 모신 몸의 손길이어야 하며, 그의 시선은 부활하신 주님의 자비를 닮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체를 모시는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마음 챙김은 이것입니다.
“나는 지금 그리스도를 모신 사람답게 생각하고 있는가?
나는 지금 그리스도를 모신 사람답게 말하고 있는가?
나는 지금 그리스도를 모신 사람답게 이 사람을 대하고 있는가?”
이 질문이야말로 가톨릭 신자의 깊은 마음 챙김입니다.
5.
그렇습니다.
틱낫한 스님의 마음 챙김은 우리에게 지금 이 순간을 놓치지 말라고 말합니다.
숨 하나, 걸음 하나, 차 한 잔, 한 사람의 미소 속에 이미 기쁨의 씨앗이 있다고 말합니다.
감정을 억누르지 말고, 그 뿌리를 조용히 관찰하라고 말합니다.
가톨릭 신앙은 여기에 더 깊은 고백을 더합니다.
그 순간은 단순한 현재가 아닙니다.
그 순간은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는 자리입니다.
그 숨은 단순한 호흡이 아니라, 창조주께서 허락하신 생명의 숨입니다.
그 걸음은 단순한 이동이 아니라,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걷는 순례입니다.
그 식사는 단순한 음식이 아니라, 성체성사의 신비를 일상 안에서 확장하는 감사의 자리입니다.
그러므로 성체를 모신 가톨릭 신자에게 마음 챙김은 자기 수련을 넘어섭니다.
그것은 성체적 존재 방식입니다.
내 안에 오신 그리스도를 기억하며, 내 감정과 말과 행동을 그분 앞에서 살피는 일입니다.
내 안의 고통을 남에게 떠넘기지 않고, 주님 앞에서 돌보는 일입니다.
내 안의 분노를 공동체에 퍼뜨리지 않고, 십자가 앞에서 정화하는 일입니다.
내 안의 상처를 변명으로 삼지 않고, 부활의 빛 안에서 다시 살아나는 일입니다.
결국 마음챙김과 성체성사는 서로 다른 종교의 언어를 지니고 있지만, 한 지점에서 깊이 만납니다.
깨어 있으라.
지금 이 순간을 살아라.
네 안의 고통을 외면하지 말라.
네 안의 평화를 먼저 회복하라.
그리고 그 평화로 세상에 나아가라.
틱낫한 스님은 이것을 마음 챙김의 언어로 말했습니다.
가톨릭 신앙은 이것을 성체와 엠마누엘의 언어로 고백합니다.
성체를 모신 사람은 혼자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부활하신 주님을 모시고 사는 사람입니다.
그는 난처한 양심의 갈등을 부추기는 부정한 장소에서도
부끄러운 죄 가운데서도 어쩔 수 없는 자신의 나약함과
그 절망하는 인간의 한계 앞에서도
그는 하느님을 피해 도망 칠 수 가 없습니다.
어미가 그 자식을 잊을 수 없듯이
꿈에도 잊을수 없듯이
이것은 엠마누엘 하느님의 집요한 사랑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하루는 이렇게 기도하며 시작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주님, 오늘 제 숨 안에 함께 계시옵소서.
제 걸음 안에 함께 계시옵소서.
제 말 안에 함께 계시옵소서.
제 상처를 당신 앞에서 보게 하시고,
제 분노를 사랑으로 변화시켜 주소서.
제가 성체를 모신 사람답게,
오늘 누군가에게 평화가 되게 하소서.”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마음 챙김입니다.
이것이 성체를 모신 사람의 일상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 해 봅니다.
이것이 우리와 함께 계시는 엠마누엘 하느님 안에서, 지금 여기서 시작되는 부활의 삶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