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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신약)

베풀면서 호구가 되지 않으려면(마태 17,2:전삼용 신부)

작성자엠마오|작성시간26.06.23|조회수14 목록 댓글 0

 베풀면서 호구가 되지 않으려면(마태 17,2:전삼용 신부) 

 

 

 

오늘 복음은 세상도 익히 아는 위대한 법칙, 이른바 황금률을 담고 있습니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마태 7,12)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이어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당부하십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꼭 물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똑같이 베푸는데, 어떤 베풂은 사람을 살리고 어떤 베풂은 사람을 망칩니다. 어떤 어머니의 사랑은 자식을 성인으로 키우고, 어떤 어머니의 사랑은 자식을 폭군으로 키웁니다. 그 둘을 가르는 경계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오늘 저는 이 한 가지를 나누고 싶습니다. 무엇을 주느냐가 아니라, 어떤 마음으로 주느냐가 모든 것을 결정합니다.

 

먼저 우리의 민낯을 봅시다. 우리는 사랑이라는 말을 무조건적인 허용과 타협으로 곧잘 착각합니다. "신부님, 무조건 퍼주고 다 이해해 줘야 참사랑 아닙니까. 자식이 엇나가도, 이웃이 무례해도 십자가 지는 마음으로 참아야지요." 듣기엔 거룩한 희생 같습니다. 그러나 속을 들여다보면 다를 때가 많습니다. 미움받을 용기가 없어서, 갈등을 감당하기 싫어서 질서를 뭉개 버린 비겁함입니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선악의 경계를 허물고 스스로 영적 호구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황금률을 말씀하시기 바로 직전에 무서운 경고를 박아 두셨습니다.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지 말고, 너희의 진주를 돼지들 앞에 던지지 마라. 그것들이 발로 짓밟고 돌아서서 너희를 물어뜯을지도 모른다."(마태 7,6) 무턱대고 내어 주는 가짜 사랑이 어떤 파국을 부르는지 미리 일러 두신 것입니다.

 

여기서 핵심을 분명히 하겠습니다. 진주가 짓밟히는 까닭은 진주를 주었기 때문이 아니라, 두려워하며 주었기 때문입니다. 주는 행위가 문제가 아니라 주는 마음이 문제입니다. 두려워서 주거나 어쩔 수 없이 주는 것은, 사실은 주는 것이 아니라 빼앗기는 것입니다. 강요당해 내놓는 것입니다. 그리고 강요당해 내놓은 것은 상대를 결코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도리어 "내가 으르렁대면 저 사람은 내놓는구나" 하는 것을 가르쳐, 상대의 교만과 탐욕만 키웁니다.

 

............중략...............

 

이 어긋난 사랑이 한 집안을 어떻게 무너뜨리는지, 구약의 엘리 사제가 똑똑히 증언합니다. 그의 두 아들 홉니와 피느하스는 주님께 바치는 거룩한 제물을 가로채고 성소에서 온갖 악행을 저질렀습니다. 대사제이자 아버지인 엘리는 마땅히 하느님의 율법으로 이들을 엄히 다스려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식을 향한 눈먼 정 때문에 "얘들아, 그러지 마라."(1사무 2,24 참조) 하는 솜방망이로 그치고 맙니다. 거룩한 제물을 두 돼지에게 계속 던져 준 것입니다. 마침내 하느님께서 진노하며 물으십니다. "너는 어찌하여 나보다 네 자식들을 더 존중하느냐?"(1사무 2,29 참조) 결국 두 아들은 전쟁터에서 비참히 죽고, 하느님의 궤는 빼앗기며, 그 소식을 들은 엘리는 의자에서 넘어져 목이 부러져 죽습니다. 율법의 선을 지우고 맹목적 정에 휘둘린 그 거짓 사랑이, 결국 온 집안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것입니다. 엘리는 자식을 사랑한 것이 아닙니다. 자식과 부딪치기를 두려워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똑같이 자식을 목숨처럼 사랑하고도, 정반대의 열매를 거둔 어머니가 있습니다. 눈물의 어머니 성녀 모니카입니다. 젊은 아우구스티누스가 마니교라는 이단에 빠져 집에 돌아왔을 때, 모니카는 "그래도 내 자식이니 품어야지" 하며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이단에 빠진 아들을 향해 단호히 집 문을 걸어 잠그고, 한 상에서 밥 먹는 것조차 거부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결정적인 차이를 보십시오. 모니카가 문을 닫은 것은 아들이 미워서도, 아들이 두려워서도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닫힌 문 뒤에서 평생을 눈물로 기도했습니다. 그녀의 단호함은 분노가 아니라 사랑이었고, 그 사랑은 두려움이 아니라 하느님께 대한 신뢰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엘리는 자식이 두려워 진주를 던져 주었고, 모니카는 자식을 사랑하여 진주를 거두어들였습니다. 그 차이가 한 집안은 멸문으로, 한 아들은 교회의 가장 위대한 성인으로 갈라놓았습니다.

 

그렇다면 호구가 되지 않으면서도 사람을 변화시키는 참된 사랑은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기쁘게 주는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께서는 이렇게 권고하십니다. "저마다 마음에 정한 대로 해야지, 아까워하면서 하거나 마지못해 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기쁘게 주는 사람을 사랑하십니다."(2코린 9,7)

 

두려워서 주는 것도, 마지못해 주는 것도 하느님의 줌이 아닙니다. 강요당한 줌이기 때문입니다. 오직 기쁘게, 자유로이 주는 것만이 참된 사랑이며, 그런 줌만이 받는 이를 변화시킵니다. 두려움의 냄새를 풍기며 주면 상대의 탐욕을 키우지만, 기쁨의 향기를 풍기며 주면 상대의 마음을 녹입니다.

 

이것을 가장 완전하게 보여 주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그분께서는 협박당해 십자가에 오르신 것이 아닙니다. 어쩔 수 없이 목숨을 빼앗기신 것이 아닙니다.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아무도 나에게서 목숨을 빼앗지 못한다. 내가 스스로 그것을 내놓는 것이다."(요한 10,18 참조) 그분께서는 두려움 없이, 기쁘게, 당신을 내어 주셨습니다. 강요당해 빼앗긴 줌이 아니라 자유로이 바친 줌이었기에, 그 줌은 온 인류를 죽음에서 생명으로 변화시킬 수 있었습니다. 두려워서 빼앗기는 줌은 폭군을 키우고, 기뻐서 바치는 줌은 세상을 구원합니다.

 

베풀면서도 호구가 되지 않으려면 두려움과 자기 연민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내 상처를 메우려고, 혹은 미움받기 싫어서 마지못해서 주지 마십시오. 그런 줌은 사랑이 아니라 강요당한 헌납이며, 상대의 교만만 살찌울 뿐입니다.

 

상대를 교만하게 하는 내어줌은 가장 안 좋은 내어줌입니다. 겸손하게 만드는 내어줌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줄 때는 기쁘게 주고, 거두어야 할 때는 사랑으로 단호히 거두십시오. 내가 먼저 하느님의 사랑 안에 굳건히 서서 두려움의 냄새를 지울 때, 비로소 우리의 줌은 기쁨의 향기를 풍기며 사람을 좁은 문으로 이끄는 보람된 사랑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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