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가정(家庭)

영조임금) 금등지사金縢之事

작성자엠마오|작성시간26.06.12|조회수27 목록 댓글 0

금등지사金縢之事

 

유래

영조 임금이 사도세자의 죽음에 얽힌 진실과 정조를 보호하려는 의지를 담아 남긴 문서는 금등(金縢)문서 또는 금등지사(金縢之詞)라고 부른다. 금등은 '금띠나 쇠줄로 꽁꽁 묶어 비밀로 봉한 궤짝'을 뜻한다. ‘지사之事’를 합하면, ‘오해가 없도록 고이 보관된 문서’라는 의미로 사용된다. 주나라 성왕이 숙부 주공에 대한 의심을 푸는 데 한 장의 문건이 큰 역할을 했다는 ‘서경(書經)’의 고사에서 비롯됐다.

 

금등 문서의 핵심 내용과 배경:

영조는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둬 죽인 뒤(임오화변) 후회하였다. 또한 어린 정조가 훗날 보위에 올랐을 때 '죄인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정치적 위협을 받거나 공격당하는 것을 막고자 했다. 다른 한편 무리한 정치보복으로 군주의 실책을 범하지 않도록 한 것이다. 영조는 사도세자의 죽음은 부득이한 선택이었으며, 정조는 자신의 뒤를 이을 정통 후계자임을 밝히는 내용을 담아 이 문서를 작성했다.

 

보관 장소: 당시 도승지였던 채제공이 영조의 명을 받아 이 문서를 정성왕후(영조의 첫 번째 부인)의 신주 아래 비밀리에 숨겼다.

 

문서의 공개:

1793년(정조 17년), 정조가 기득권 신하들의 반대 속에서 왕위에 올라 이 금등문서를 직접 꺼내 읽었다. 정조 17년(1793년) 5월 28일, 남인 출신의 영의정 채제공은 사도세자의 죽음을 재조사하고 책임자를 처단해야 한다는 상소를 올렸다. 이는 ‘사도세자의 죽음에 의문을 제기하는 자는 역적’이라는 영조의 공식 입장과 반대되는 것이었으므로 조정은 발칵 뒤집혔다. 채제공을 처벌하라는 여론이 들끓었고, 정조는 8월 8일 조정 백관을 모아놓고 공식 해명을 했다.

 

영조가 적시한 ‘사도세자의 죽음에 의문을 제기하는 자는 역적’이라는 문구는 이해에 따라 두 가지로 해석된다. 정조에게는 영조가 사도세자를 처형한 것이 정당하니 연루자에를 보복하지 말라는 뜻이며, 정조를 반대한 벽파의 권력자에게는 사도세자의 일로 손자인 정조의 왕권을 손대지 말라는 뜻이지 않았을까? 솔로몬이 울고 갈 기막힌 문구라고 보인다.

 

채제공을 처벌하라는 여론이 들끓었고, 정조는 8월 8일 조정 백관을 모아놓고 공식 해명을 했다.내용인즉 채제공은 선왕 영조로부터 밀지를 받아 몰래 보관해 왔으며, 그 밀지는 영조의 후회와 함께 ‘사도세자의 죽음에 책임 있는 자들이 누구인지’를 적시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정조는 조정의 의심을 풀기 위해 ‘피 묻은 적삼이여 피 묻은 적삼이여, 동(桐)이여 동이여, 누가 영원토록 금등으로 간수하겠는가. 나의 품으로 돌아오기를 바라고 바란다(血衫血衫, 桐兮桐兮, 誰是金藏千秋, 予懷歸來望思)’는 금등지사의 한 대목을 이 자리에서 공개하기도 했다.

 

정조의 리더쉽

그러나 정조는 이 금등지사로 정치 보복으 피바람을 일으키지 않았다. 대신 ‘지나간 일을 다시 거론할 생각이 없으니 대신 국정에 협조하라’며 반대파를 설득하는 데 이용했다. 이렇게 얻어낸 협조는 각종 민생 안정책을 실현시키는 데 사용됐다. 대동법과 균역법 등은 영조를 거쳐 정조 시대에 와서 빛을 발했다. 그는 새로운 정책의 효과가 드러나지 않으면 ‘고민하다 날이 새는 줄 몰랐다(靜夜思惟 自不覺其明發也)’고 털어놓을 정도로 정성을 다했다.

정조가 위대한 군주로 기억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출처:AI/송원섭;중앙일보; 20101106(상당 부분 이 기사를 복사함)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