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시찰 임무를 맡은 12명의 국내 암행어사는 일본으로 떠나기 위해서 이 곳 동래에 모여들었습니다.
이들 중 1명을 제외하고는 11명 모두 초행길이었습니다. 이들은 떠나기 전 바다 용왕님께 무사귀환 비는 제사
를 지내고 바로 다음날인 1881년 4월 9일 일본 기선에 몸을 실었습니다. 조사시찰단을 실은 배는 대마도를 들
렸다가 이틀뒤엔 나가사키에 도착합니다. 나가사키에서는 하루를 머문 뒤 다시 배를 타고 고베로 향합니다. 고배에서 기차를 타고 오사카로 가고 오사카에서 3일을 머뭅니다. 다시 교토까지 들어가서 4일을 머뭅니다. 총 7일간 이들 지역에서 머물면서 근대화된 시설들을 일부 시찰합니다. 그리고 다시 기차로 고베로 나온 뒤 요코하마까지 배로 나옵니다.
아이치현의 명치촌입니다. 일찍 서구 문물을 받아 들여서 근대화를 시작한 일본 근대 문물들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곳입니다. 이곳에는 명치시대에 있었던 근대 문물과 시설들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습니다. 동행의 암행어사들은 이렇게 완전히 서구화 되어있던 근대화 되었있던 일본의 시설들을 어떻게 받아들였을 까요?
당시의 기차들은 아직도 관광용으로 운행되고 있습니다. 가마나 말을 주로 이용하던 조선의 시찰단에게 기차는 아주 획기적인 것이었습니다.
떠날때 기적소리를 내더니 곧 철로를 따라 움직였다. 길을 평평하고 곧은데 쇠를 깔아놓았으며 불기운에 따라 번개처럼 달렸다. 수레위에 판옥이 있고, 옥 속에 의자와 탁자를 놓았으며 사이사이로 창거울을 달았다.
- 이헌영 일기 -
기차 이외의 당시 시찰단의 일기에 인상적으로 묘사된 도시문물 중에 인력거가 있습니다. 시내에서 움직일 때 주로 인력거를 이용했던 시찰단은 바퀴가 두개 달린 것이 무척 빠르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뱃길을 안내하는 등대와 가스등도 당시 조사시찰단이 봤던 신문물입니다
가로의 양 옆에는 철줄을 줄지어 세우고 그 위에 유리병을 달아 밤이 되면 불을 켜는 데 그 모양이 구슬을 꿴 듯 하다. 도로는 마치 숯돌같이 평평하고 곧으며 매우 정결해 띠끌하나 없다.
심상학 일기
조사실찰단은 각종 산업시설들도 시찰했습니다. 당시 시찰했던 방적소입니다.
방적소를 갔더니 남녀가 함께 모여있고, 증기를 이용해 솜에서 실로 뽑아내는데 어찌나 빠른지 형언하기 힘들다.
-이헌영 일기-
명치시대 우편국도 명치촌에 보존되어 있다. 당시 일본은 전국적으로 우편제도를 시행하고 있었으며 만국우편연합 조약에도 가입하여 근대적인 우편제도를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그때를 묘사한 그림과 우편관련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우편제도와 함께 조사시찰단에게 인상적이었던 것은 전신이었습니다.
전신이라는 것은 대개 철사줄이 수천리 바깥까지 엮어서 서로 통할일이 있을 때 서양글자로 기계 두들기기만 해도 천리밖에서도 통할 있다.
-이헌영일기-
이 밖에도 근대화된 병원이나 교육시설을 시찰했는데, 이들 시찰단은 근대화된 문물들의 편리함에 대해서는 감탄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당시 일본은 근대 문물 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입법 사법 행정이라는 서구식 정치제도를 마련하고 있었습니다. 조사시찰단은 각 성을 시찰하며 이러한 일본의 서구화된 제도들을 조사하였습니다. 조사들은 자신들이 맡은 성을 방문해서 관계자들을 만난 뒤 관련 법규나 운영안에 대한 강의를 듣거나 대담을 나누기도 합니다. 특히 많은 조사가 파견되었던 군 관련기관의 시찰내용을 보면 군대를 직접방문해 훈련과정을 시찰하기도 하고 서구식 무기와 제조법을 꼼꼼히 살피기도 했습니다.
세관을 담당했던 조사들도 꼼꼼히 일본의 세관업무를 살폈는데 이헌영일기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당시 이헌영의 일기입니다. 5월 24일~ 28일까지 요코하마 세관을 시찰한 기록이 상세하게 남아 있습니다.
바쁜 일정중에 시찰단은 일본인들의 의식주 변화에 대해서도 눈여겨 보았습니다. 당시 일본은 단발령을 내려 천황까지도 머리를 잘랐습니다. 그래서 이발소가 등장하였습니다. 시찰단은 예전의 상투를 잘라 남은 것이 없다고 하고 있습니다. 또한 의생활에도 변화가 있었습니다. 명치촌에는 당시 일본인들이 자주 입던 서양옷을 입고 사진을 찍을 수 있도록 해 놓았습니다. 여기 전시되 옷들을 보면 당시 서양에서 입던 화려한 옷들 입니다. 이에 대해서 시찰단은 군주이하 내외 군민들이 모두 신복으로 바뀌 사치하는 풍속이 더욱 심해졌다고 평했습니다
조사시찰단은 편리한 근대 문물에 대해서는 감탄을 아끼지 않았지만, 생활문물까지 서구화된데 대해서는 어윤중, 홍영식 두 사람을 제외하고서는 대부분 부정적으로 평가했습니다. 사치풍조가 심해질 뿐만 아니라 일본 전통과 함께 정신마저 사라진다는 것 때문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