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영 파밭 가에서
삶은 계란의 껍질이
벗겨지듯
묵은 사랑이
벗겨질 때
붉은 파밭의 푸른 새싹을 보아라.
얻는다는 것은 곧 잃는 것이다.
먼지 앉은 석경 너머로
너의 그림자가
움직이듯
묵은 사랑이
움직일 때
붉은 파밭의 푸른 새싹을 보아라.
얻는다는 것은 곧 잃는 것이다.
새벽에 준 조로의 물이
대낮이 지나도록 마르지 않고
젖어있듯이
묵은 사랑이 뉘우치는 마음의 한복판에
젖어있을 때
붉은 파밭의 푸른 새싹을 보아라.
얻는다는 것은 곧 잃는 것이다.
이 시는 붉은 파밭의 푸른 새싹을 보면서 곧 묵은 사랑이 새로운 희망이라는 점을 알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시의 전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삶은 계란의 껍질이 벗겨지듯 묵은 사랑이 쉽게 사라질 때와 먼지 앉은 석경 너머로 보이지 않는 너의 마음이 움직이듯 묵은 사랑이 움직일 때와 새벽에 준 조로의 물이 대낮이 지나도록 마르지 않고 젖어있듯이 마음의 한복판에 묵은 사랑에 대해 뉘우치는 마음을 떨쳐내지 못하고 사로잡혀 있을 때 붉은 파밭의 푸른 새싹을 보아라. 그러면 묵은 것이 새로운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희망을 얻는다는 것은 곧 과거를 잃는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이 시를 구절별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이 시는 비유 + 명령 + 잠언의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시에서는 3연 모두 ‘-ㄹ때 / 붉은 파밭의 푸른 새싹을 보아라. / 얻는다는 것은 곧 잃는 것이다.’라는 똑같은 말로 마무리 되어 있다. 여러 번 같은 것을 사용하는 것은 운율을 형성하고 형태적인 안정감을 주며 의미를 강조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 ‘얻는다는 것은 곧 잃는 것이다.’에서 ‘곧’은 ‘=’의 의미이다. 얻는다=잃는다. 얻는 것이 곧 잃는 것이고 잃는 것이 곧 얻는 것이라는 의미로 서로 다른 것을 잃고 얻는 것이 아니라 잃고 얻는 것이 같은 것이라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 뿐만 아니라 ‘구색즉시신색(舊色則是新色)’도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제목 ‘파밭 가에서’는 이 시를 어떻게 해석하라는 단서가 들어 있다. 시를 읽는 사람들은 세상 사물에 대해서 잘 알아야한다. 잘 몰라도 물어서라도 알아야한다. 그래야 시의 의미를 제대로 알 수 있는 것이다. 이 시에서 제목을 생각하지 않고 보면 묵은 사랑을 잃어야 새로운 사랑이 온다는 말을 하는 것으로 보게 된다. 그러나 파밭을 그것도 파밭의 겨울과 봄을 본 사람은 이 시를 앞의 의미로 해설할 수 없다. 겨울 파밭은 추위에 얼어 시들어 붉은 색이다. 봄의 파밭은 이 붉은 파속에서 파란 파의 싹이 나온다. 겨울의 붉은 파가 곧 봄의 파란 새싹이다. 이점을 생각하고 이 시를 해석해야한다.
‘삶은 계란의 껍질이 / 벗겨지듯 / 묵은 사랑이 / 벗겨질 때 / 붉은 파밭의 푸른 새싹을 보아라. / 얻는다는 것은 곧 잃는 것이다.’는 쉽게 묵은 사랑을 벗어날 때 붉은 파밭의 푸른 새싹을 보고 얻는다는 것이 잃는다는 것과 같은 말임을 알라는 의미이다. ‘삶은 계란의 껍질이 / 벗겨지듯’은 쉽게 벗겨지는 것을 말한다. 잘 삶은 계란은 껍질이 쉽게 벗겨진다. ‘ 붉은 파밭의 푸른 새싹을 보아라’는 화자가 청자에게 묵은 사랑을 쉽게 벋어난 것 같아도 반드시 ‘붉은 파밭의 푸른 새싹을 보’라는 것이다. 그러면 묵은 사랑 속에 푸른 새싹이 나온 것이지 묵은 사랑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는 말을 하고 있다.
‘먼지 앉은 석경 너머로 / 너의 그림자가 / 움직이듯 / 묵은 사랑이 / 움직일 때 / 붉은 파밭의 푸른 새싹을 보아라. / 얻는다는 것은 곧 잃는 것이다.’에서 ‘석경’은 ‘유리로 만든 거울’이라고 한다. ‘먼지 앉은 석경’은 상대를 비추지 않는다. 그러므로 ‘먼지 앉은 석경’을 통해 볼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볼 수 있는 것은 석경을 보는 사람이 자신의 마음을 볼 수 있을 뿐이다. ‘너의 그림자’에서 ‘그림자’는 ‘마음’을 뜻하는 관습적 상징이다. ‘너의 그림자가 / 움직이듯 / 묵은 사랑이 / 움직일 때’는 보이지 않는 마음속에서 묵은 사랑이 생각날 때‘에 묵은 사랑이 푸른 새싹으로 나올 수 있게 하라는 것이다.
‘새벽에 준 조로의 물이 / 대낮이 지나도록 마르지 않고 / 젖어있듯이 / 묵은 사랑이 뉘우치는 마음의 한복판에 / 젖어있을 때 / 붉은 파밭의 푸른 새싹을 보아라. / 얻는다는 것은 곧 잃는 것이다.’에서 ‘조로의 물’은 일찍 준 물을 말한다. ‘묵은 사랑이 뉘우치는 마음의 한복판에 / 젖어있을 때’는 낯설게 말하기 방식으로 ‘묵은 사랑에 대해 뉘우치는 마음이 가득할 때’를 말하는 것이다. 이때도 뉘우침에 사로 잡혀 있지 말고 여기서 벋어나 푸른 새싹을 피워내라는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시들어 붉은 파나 그 붉은 파에서 나오는 푸른 새싹의 뿌리는 동일한 것이다. 보기에만 다른 것이다. 묵은 사랑이 곧 새로운 사랑이다. 그 사랑은 같은 사랑이다. 그러므로 벗어났다 생각하기 보다는, 묵은 사랑이 아직도 마음에 남아 있다고 생각하기 보다는, 묵은 사랑 속에서 후회하기 보다는 그 사랑을 새롭게 싹 티워라는 말이다.20120709월후0456전한성흐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