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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10]

하나님 1강 / 개론 / 신 6,4~9 / 1994.2.20

작성자큰뜻|작성시간26.06.23|조회수12 목록 댓글 0

하나님 1강-개론 / 신 6,4~9 / 1994.2.20 아침

 

 

몯고지 빌기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시여, 어둠 가운데 빛을 명하셔서 만드셨으며 사랑하시는 아드님을 보내셔서 어둠 가운데 처한 우리들에게 영원하고 거룩한 생명의 빛을 비추이신 것을 생각할 때, 우리들이 모든 몸과 마음과 뜻을 기울여서 하나님을 사랑하는고로 하나님 앞에 섭니다.

주여, 이 시간 신령과 진리로 영이신 하늘 아버지께 향하도록 하시고 우리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모든 행하신 일들을 돌아보면서 온 마음을 기울여 하나님께 절하도록 하시옵소서.

저희가 모든 허물과 빗나감 가운데 있었던 지난 날들을 돌이켜 볼 때, 어둠에 속한 일 가운데서 도무지 하나님을 올바로 찾을 수도 없었고 하나님께 모든 고마움을 돌리지 못하는고로 죽음의 일만을 행할 뿐이었사오나 하나님께서 저희를 불쌍히 여기셔서 하늘의 큰 영광을 바라보게 하셨으며

특별히 하나님의 아들로 삼으심으로 사망의 권세가 저희를 짓누르지 못하도록 큰 구원을 베푸신 것을 감사하옵나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저버리고 주께서 명하신 말씀을 등지기 일수이며,

또 많은 사람들 가운데 특별히 사랑하셔서 귀한 일을 맡기셨사오나 그 값어치를 모르고 하나님께서 베푸신 것을 만홀히 여겼던 많은 잘못을 하나님께서 기억하시고 사하시옵소서.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하시며 그 가운데서 참된 기쁨을 맛볼 수 있도록 하시기를 바라옵나이다.

오늘 이 시간 하나님의 가르침과 마음의 감격함을 가지고 주 앞에 나와서 경배하오니 하나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만나시고 베풀어주신 거룩하신 뜻을 다시 한 번 하나님께서 성신 하나님의 역사로 빛나게하셔서

감히 저희가 죄악의 눈을 가지고 하늘 영광의 아버지를 바라볼 수 없을지라도 그리스도 안에서 성신님을 좇아 하나님께서 베푸신 신령한 나라의 거룩한 잔치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시옵소서.

이 시간 저희가 무엇이관대 하나님을 기릴 수 있고 많은 세상의 잡념들 가운데 속했사오나 다 떨쳐버리고 실패의 역사건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일들이건 모든 것을 생각하면서 그 자리에 머물러있지 않게 하시고

하나님께 나오게하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오니 하나님께서는 저희를 거두어주시며

하나님 앞에 나가는 기쁨과 말씀하시고 약속하신 은혜를 베풀어주심을 힘입을 때, 그 신비한 비밀을 저희가 생각한다면 어찌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을 제할 수 있겠으며, 다른 어떤 것에 하나님의 뜻을 거역할 만한 것을 다시 생각할 수 있겠사옵나이까.

무엇보다 저희에게 바른 믿음을 하나님께서 허락하셔서 우리 앞서간 사람들이 섬겼던 하나님을 그 법을 따라서 그 거룩한 전승을 좇아서 지금 이 자리에 서있사오니, 창조주 하나님이시며 만물을 다스리시는 우리 크신 임금님께서 저희를 영광 가운데로 이끌어 올리시옵소서.

그 가운데서 하나님과 다함없는 사귐을 갖도록 하시고

우리 교회랑 각 사람에게 거룩한 힘을 내리셔서,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더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만을 사랑할 것인지를 다짐하도록 하시옵소서.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아멘.

 

 

 

 

드림 빌기

 

하나님 아버지, 우리들은 세상 울타리 가운데서 사람을 견주면서 그 안에 안주하려는 나쁜 버릇이 있읍니다.

또 하나님의 복을 가장해서 세상 사람보다 우월해보고자 하는 거만함을 부리기 일수이옵나이다.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주신 모든 것을 돌아볼 때, 지난 날 제대로 하나님께 드리지 못한 결과가 오늘 참으로 크고, 그런데도 우리는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그 나라의 영광에 참여하기를 게을리하고 알아보려고 힘쓰지 않는 가운데, 감히 하나님의 명을 따라서 모든 것을 주 앞에 드리게 되었는데 송구하기 그지없사옵나이다.

현재 이 곳과 이 때 하나님께서 주신 것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를 생각해볼지라도 매우 크고 놀라운 일인데

처음부터 지금까지 거룩한 나라의 역사를 이어오시면서 저희에게 맡기신 바가 새로운 토대 위에서 쌓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뒤를 따랐던 앞서간 선진들이 형성해 놓은 그 거룩한 터전 위에 건축하는 사람들인 것을 생각해 볼 때 주여, 저희가 믿음이 적사옵고 주께서 내리신 말씀을 받는데 게을렀던 일들이 심히 크옵나이다.

이런 상태에서 저희가 가사 드린다고 한들 우상 앞에 드리는 것과 방불하겠고, 형식 치례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마땅하기에

이 시간도 우리의 중보자이시며 구속자이신 그리스도께서 단번에 영원한 제물됨으로 하나님께서 만족하신 그 사실을 힘입고 감히 주 앞에 드리오니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살펴보시고 그 가운데 있는 모든 부족들을 깨닫게 하시고 저희가 과연 하나님 앞에 나서서 그 나라의 면모와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뜻들을 배워 알기에 힘쓰도록 하시기를 바라옵나이다.

저희가 하나님 앞에 자라지 못하고 또 하나님께서 가르치시는 것을 알지 못하고 무엇을 드리겠으며 예배가운데 드림이라는 그 형식을 좇아본들 어떠한 은혜가 있겠사옵나이까.

한 지교회가 맡겨진 그 일 자체에도 머물지 말게 하시고

역사적인 개혁교회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어떠한 뜻을 이 땅에 구현해나왔으며 바라시는가를 명백히 알게될 때 과연 저희가 어떠한 드림을 할 것인지를 하나님께서 분명히 알리시겠사오니

주여, 지난 날 모든 허물과 잘못들과 하나님의 뜻을 어김과 빗나감들을 다 사하시고, 힘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드림 가운데서 펼쳐보이도록 하시고, 하나님께서는 넉넉히 받으셔서 기쁨을 삼으시옵소서.

이러므로 우리 생각도 뒤바뀌도록 하시고 세상과는 비할 바 없이 하늘의 큰 힘과 슬기로 말미암아 넘치는 기쁨을 가지고 하나님과 더욱 사귀는 사람들로 만들어 주시옵소서.

다른 어떤 것으로 말미암아 거룩한 사람이 되지 않고 주께서 저희의 모든 것들을 다 받으셔서 새롭게 하셔야만 저희가 거룩하다는 사실을 알게 하시고

일체의 어떤 것에도 주장하는 자세를 갖지 않게 하시며 아무리 적은 것이라도 소홀히 하지 않도록 하시옵소서.

그 나라의 일꾼으로 불러내셨는데 드림으로부터 거기에 참여하겠사오니

하나님께서는 이 드림 가운데 우리의 참된 믿음을 점점 자라게 하시고, 하나님 앞에 거룩한 다짐을 갖게하사 사람의 형편에서 하나님의 뜻을 저울질하지 않게 하시고, 또한 어떤 그 종교적인 열망을 가지고 하나님을 색욕거리로 삼지 않도록 하시옵소서.

오직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거룩한 나라의 뜻이 또한 교회 가운데 그 나라의 영광이 찬란히 빛나도록 하시옵소서.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아멘.

 

 

신명기 6, 4-9

4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하나인 여호와시니

5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6 오늘날 내가 네가 명하는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7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8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여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를 삼고

9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문에 기록할지니라

 

 

오늘부터 우리 하나님에 대해서 생각해보겠읍니다.

여기 4절 말씀에 ‘이스라엘아 들으라 여호와 우리 하나님은 하나의 여호와다’하는 말씀을 합니다. 이건 이스라엘 사람들만의 고백이 아니고 모든 믿는 사람들의 고백이요 또한 우리의 고백이기도 합니다. 사람에게 가장 크고 으뜸되는 일은 뭐니뭐니 해도 하나님을 이 땅만이 아니라 영원한 그 나라에까지 끊임없이 그분을 즐기면서 섬기는 일이지요. 이것을 위해서 모든 것이 다 거기에 붙어다니는 것이지요.

 

왜 그런고 하니 로마서 14장 보면 이런 말씀 있잖아요 ‘자기를 위해서 사는 사람도 없고 자기를 위해서 죽는 사람도 없다’ 이 말 한 마디에 모든 것이 끝장나는 것 아니겠읍니까? 가만히 새길수록 우린 얼마나 이 말씀을 어기고 움직입니가 뻔뻔하게도! 우리가 잘 아는 하이델베르흐 문답서 첫 번째도 그런 것이 있읍니다 ‘사람이 이 땅에서 살고 죽는데 유일한 위로가 뭐냐?’ 할 때 바로 그리스도를 말씀하지 않읍니까. 바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고린도 전서 6장에 있듯이 ‘값주고 우리를 보배로운 피로 사내신 하나님의 것이니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자’고 바울이 말씀하셨어요. 바울이라는 사람, 바울이 그렇게 살았기 때문에 생생한 말씀을 들려준 것이지요 ‘하나님의 것이다, 그리스도의 것이다’. 대요리문답 첫 번째도 ‘사람의 가장 높고 가장 큰 으뜸이 뭐냐’고 할 때 ‘하나님을 영원토록 즐기고 영화롭게 하는 것’이라고 말씀했어요.

 

전도서에 있던가요 ‘엘로힘께서 그 올람[םלעה]을 그 아담의 아들들의 마음에 주셨다’는 말씀을 하지요. 이 올람이란 말은 영원이란 뜻이지요. 아담의 아들들의 마음에 영원을 하나님께서 주셨다 이건 필시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찾고자 하는 마음이 우리 마음 속에 뿌리박혔다는 얘기예요. 믿는 사람이건 안 믿는 사람이건 부인할 자가 없어요. 멍멍이를 빼 놓고는 원튼 원치 않던 그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다니깐요! 스스로 멍멍이를 자처하는 친구들이나 하나님을 욕하고 신을 부정하겠지요 잘난 체 하느라고. 그렇다면 모든 사람이 바로 이 하나님 또한 예수님께 묶여있을진대 우린 어떤 하나님, 어떤 예수스님을 믿고 따르는지를 돌아봐야 합니다.

 

그런데 대개 보면 자기 자신을 하나님이라고 하는 뿌럭지가 있읍니다. 믿는 사람 중에도 하나님 명령 안지키면 벌써 자기가 그 자리를 차지한 것 아닙니까? 어떤 종류의 사람들을 신으로 삼기도 하고 온갖 물건들을 하나님이라고 여깁니다. 종류를 들자면 한도 끝도 없어요 심지어 자기 스스로 꾸며낸 생각들을 하나님이라고 허튼 소리하는 아이들이 적지 않아요. 성인을 앙모하건 어버이를 높이건 또는 스승들 심지어 어느 사이비나 이단파 같은데서 교주를 하나님으로 여기기도 하지 않읍니까.

 

어저께인가 탁명환이란 사람이 처참하게 죽었다고 그러지요 글쎄 그 사람 신앙은 잘 모르지만 더러운 아이들 파헤치러 다니다가 칼맞았지요. 물건들 중에서 돈이라든가 심지어 짐승이나 풀나무 같은 것에 찔찔매는 그런 사람들 모습 보세요. 어떻게 사람이 돼 가지고 그럴까. 요즘 꼬마들 말이나 만화책 같은 것들을 보면 슈퍼맨부터 가공의 물건들 이름이 상당히 많지요. 부처, 공자 이런 것은 다 가짜 하나님들 아닙니까.

 

심지어 자본주의도 마찬가지이고 또는 각 나라마다 신에 대한 이름이나 실체들을 말하기도 하지요. 도깨비니 신령님이니 이런 온갖 세상 신들 심지어 타락한 교회, 빗나간 교회에서 이제 우리 성경에 ‘여호와’라고 나와있는 것을 조금 그럴싸하게 학문적인 뒷받침을 해서 ‘야훼’ 이런 말로 바꿔쓰기도 하지 않읍니까. 야훼나 여호와나 그 말 자체는 아무 것도 아니지만 야훼를 쓰는 그 속에 쓱 들어가있는 우상, 거짓된 하나님으로써 야훼를 찾는 것입니다. 물론 여호와를 찾는다고 해서 늘 참된 하나님을 따르는 건 아니지만 말이예요.

 

그러니까 기독교 안에도 벌써 든든하게 우상이 뿌리내리고 있다는 얘기예요 멀리 갈 필요도 없이. 어떤 친구는 건강을 위한답시고 요가 계통 하지요. 참선을 하고 또는 점쟁이들도 있읍니다. 요즘 보니까 한자 말을 다시 추구하려는 세력이 태동하니까 제일 손뼉치는 아이들 중에 한 가지는 철학관 하는 아이들, 한문 풀이하지 않읍니까 걔네들. 그러니 이거 한문을 쓰는 건 그릇된 거예요 그거 왜 써서 철학관 돈벌어 먹게 하면서 우상을 널리게 하려는지 말이예요. 한문 없으면 사주, 팔자, 궁합부터 싹 다 날라 가는 것 아닙니까?

 

또는 가짜 종교에서 알라를 추구한다던가 각 족속마다 있는 토속 미신들, 거짓 종교들 또는 스포츠 그런 것들 전부 다 거짓 하나님으로 마침내 이르게 하는 거예요! 그러면 운동하지 말란 말인가요? 새겨야지요 잘. 요즘 보니까 농구 시합 드라마 있다면서요? 손지창인지 뭔지 해서. 미쳐 발광하는 일들 아닙니까. 개중에는 소위 교회 다닌다는 부모부터 당사자가 상당수 있을텐데. 교회에서 뭘 가르치고 뭘 믿는 것인지 말이예요.

 

 

전도서 27장 7절에 그런 사람의 꼴에 대해서 통렬하게 새겨주고 있지요 ‘다만 보라 이것을 나는 찾아냈는데 그 엘로힘께서 그 아담을,’ 여기 아담은 모든 사람의 대표지요 ‘그 아담을 바르게 만드신 것을 하지만 그들은 찾았구나 많은 생각들을’ 그러니까 엘로힘이신 하나님께서 주신 것 외에 뚱딴지 같은 생각들을 찾았다는 얘기예요. 결과가 어떻게 됐겠어요? 이미 원죄로 말미암은 오염이 모든 사람에게 대대로 스며있기 때문에 더럽게 깔려 있는 앎으로 거룩하신 하나님을 찾지만 바로 알 수가 없어요.

 

로마서 1장 18절에서 23절까지 쭉 잘 가르쳐주지 않읍니까 ‘하나님께서 먼저 자신을 보여 주셨지만 하지만 사람은 뒤바꿔서 허드레로 만들었다’고. 그 우상의 결과 하나님께서 버력으로 내팽개쳐버리신 거예요. 바울이 아테네에 전도하러 갔는데 거기 많은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팻말 써놓고 섬기는 것을 보고 하나님을 증거한 적 있읍니다. 로마 제국이 그랬다는 얘기예요. 그 때 한 말씀 중에 ‘하나님을 힘입어 살며 움직임이 있다’, ‘하나님은 멀리 떠나 계신 게 아니다’ 이렇게 말씀해 주셨어요.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을 하나님이랑 닮은꼴, 그분 모양으로 지으신 것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런데서도 생각해 볼 때, 하나님이 계신 것을 굳이 밝힐 나위가 없읍니다. 철학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할 필요도 없고 또 어떤 사람이 신비한 체험을 했더니 그러니까 하나님이 계신 것이 분명하다 하는 이런 말도 다 거짓말들입니다. 우리 자체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졌는데 어디가서 하나님을 찾아요?

 

창조 가운데서 하나님의 솜씨를 드러내는 말씀이 나와있지요 ‘그 하늘들은 엘의 빛나심을 아뢰이며 그분 손들의 만드심을 알린다네 그 편판은’ 하나님께서 만물을 지으셨고 또 꾸려나가시는 가운데 손수 드러내보이시지 않읍니까. 창세기를 보더라도 모든 것을 다 지으신 뒤에 처음 사람과 사귀기 위해서 언약을 맺기도 하시고 또 어떻게 살라고 명령도 하십니다. 이것은 다 바로 참된 하나님을 섬기는 가운데서 가능한 말씀입니다. 이게 한 번 비끄러지니까 그 뒤에 카인의 후예들의 역사가 참으로 비참하고 거기에 또 똑바로 서서가려고 하는 하늘에 거하는 백성들의 삶도 만만치가 않게 됐읍니다.

 

마침내 하나님께서 더 크게 불쌍히 여기시기 위해서 약속하신 대로 주님을 보내셨읍니다. 하나님을 계시하시기 위해서 ‘나는 그 길이고 그 참됨이고 그 삶이니 하나라도 가지 못하노라 그 아버지께로 나를 거치지 않는다면’ 그러니까 참된 신은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아는 것 외에는 전부 다 가짜입니다 지옥이지요. 다른 어떤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직통하는 길이 없어요, 오직 예수를 거쳐야지만. 사도행전 17장 30절 31절에도 나오지만 이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기 때문에 뉘우치고 믿지 못하면 끝장난다고 말씀하셨어요 마지막 계시 아닙니까. 이렇게 최고로 베풀어 줬으면 눈을 뜨고 바라봐야 합니다 이 이상 다른 방도가 없다는 말씀이예요.

 

이렇게 믿고 따르는 게 쉽건만 사람들은 교만해 가지고 다른 하나님을 꽉잡고 있으면서 진짜를 업신여깁니다. 자기 생김새가 하나님의 생김샌데, 신의 존재를 떠나서 산다고 말하는 사람이 누가 있어요? 스스로 거짓말 할 뿐이지.

 

특별히 예수님께서 갈릴리에서 일하시고 또 가버나움에 들어가셨을 때 마태가 증거하기를 이사야서 9장 2절의 말씀이 이루어졌다고 하지 않읍니까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받고 …’ 마태복음 4장 16절에 나옵니다. 그러니까 그분이 증거하시는 것이 빛되신 하나님에 대해서 증거하시는 것이란 말씀이지요. 재미있는 건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건져낼 때 미쯔라임한테까지라도 하나님 자신을 나타내지 않읍니까? 에흐예 아쉐르 에흐예[היהא רשא היהא], 나는 있는 나는 있다 이런 식으로. 거기서 여호와를 이방한테도 분명히 증거하셨어요.

 

주님께서 유대인들한테 복음전할 때 생긴 사건 중에 하나를 볼지라도 우리가 참된 하나님을 아는 방법을 말씀하지요 ‘나랑 그 아버지께서는 하나로 있다’ 삼위일체 신비를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이걸 듣던 유대인들이 돌질을 하기 위해서 돌맹이들을 들어올리지 않읍니까. 너는 인간인데 니가 너를 하나님으로 만드는구나! 이런 식으로 말을 하면서. 그 때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이들이 하나님이라고 하지 않았느냐 하물며 내가 하나님이라는데 뭐가 틀렸냐’고. 그러니 그리스도를 안믿는 사람들은 지독스런 우상에 팍쪄들린 사람들인 걸 우리가 분명히 알아둬야 돼요.

 

예수님을 믿더라도 똑바로 분명히 믿어야지요 분명히 알아야지요 그렇지 않고는 자기도 모르게 우상 신앙으로 전락합니다. 이게 적은 잘못이 아니예요 십계명에도 있잖아요 ‘너한테 있지 못하겠다 다른 엘로아흐들[םיהלא]은 내 얼굴들 위에’ 이건 구속받은 이스라엘 백성들한테 호렙산에서 말씀하시는 첫 번째 계명입니다. 나외에 다른 신을 네게 있게하지 말지니라. 그러니까 우리가 교회에 속하는 것도 그렇고 신앙고백하는 것도 그렇고 분명하지 않은 것은 마침내 우상 속으로 빠지는 거예요. 중세 교회에서 로마 교회가 얼마나 우상 덩어리가 됐어요 지금도 우상 덩어리입니다 자기네는 하나님을 찾고 예수 찾는다고 하지만. 우상의 증상에 대해서는 성경은 많이 말씀하고 있으니까 우리 스스로 관찰해보시면 알겠지요.

 

그런데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어요 하나님 엘로힘은 다른 나라 신이 아니냐고. 나가서 그리스도에 대해서도 다른 나라 신 아니냐고. 이렇게 넋두리하는 친구들이 있지요. 그러면 바꿔 말해서 우리 겨레들이랑 우리가 쓰는 말글은 누가 만들어 주신 거예요? 엘로힘께서 만드셨잖아요. 그런데 어떻게 이스라엘이 믿던 신이 다른 나라 하나님이고 기독교가 외래 종교입니까? 무슨 유대교에서 나왔으며 로마교가 무슨 큰 집입니까. 전부 다 그릇된 소리들입니다! 그리스도를 하나님께서 보내셨기 때문에 믿지 못하면 벌써 하나님의 심판 가운데 있는 거예요 버림받은 상태라고 했어요. 내일 버림받는 것이 아니고 믿지 못하는 지금 하나님의 정죄를 받았다고 성경 말씀하셨어요. 정죄받은 자가 하기는 뭘 해요.

 

그런데 우리가 늘 착각하는 것은 사람이 잘나서 자기한테 만들어진 잣대를 대단한 것인 냥 앞세워 하나님을 찾아 나서지 않읍니까? 퍽 답답합니다. 성경은 말씀하시지요 니네가 날 먼저 사랑한 것이 아니고 내가 먼저 사랑했다, 내가 먼저 사랑했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먼저 드러내보이신 것입니다! 계시, 특별 계시를 하셨다는 거예요 보고 살라고, 원수 가운데서 화목하자고. 특별히 처음 사람이 허물 가운데 떨어진 다음부터 우리들에게 하나님께서는 먼저 찾아오시지 않읍니까.

 

그런데 사람이 잘난체하고 하나님한테 한 번 찾아가보자, 성의껏 모든 지식을 동원해 가지고 과학을 총동원해 가지고. 해 보지만 기껏해본다는 게 범신론이라는 걸로 나타나잖아요. 이 땅에 있는 모든 게 하나님이다, 모든 게 부처다 또는 초연신론 그래 가지고 눈에 보이는 것 말고 조금 고상한 척하는 것 있지요 저 멀리 있는 것 또는 우주밖에 어떤 실체를 딱 세워놓고 그냥 믿는 척 하는 것입니다. 이건 한 마디로 다 숙명론자들입니다. 매우 무책임과 더러움과 우상과 더불어 뒹구는 거짓말쟁이들이예요!

 

참 하나님을 찾은 사람말고는 전부 다 거짓말쟁이라고 단언 내리세요. 그런 거짓말쟁이가 어떻게 내 친구들이 됩니까? 세상의 규범 속에서야 거짓말쟁이가 안될 수도 있겠지만 하늘의 법 앞에서는 거짓말쟁이 입니다. 먼저 하나님을 바로 알아야지만 나를 바로 아는 것이 이게 당연한 순서입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보이시고 또 그 뒤에 나로 하여금 보게하셔야 하나님과 사람에 대해서 충분히 알 수 있지요 그래야 그 다음부터 첫걸음이 시작되는 건데. 이렇게 찾아오신 하나님을 자기가 스스로 찾아보겠다고 하니, 결국은 미혹받을 수밖에 없어요. 사람의 꼴에 대해서 성경은 많은 말씀을 하지만 ‘하루살이한테도 눌려죽을 사람이다’ 이런 멋진 말씀을 했어요. 그 다음 바람에 나뒹구는 잎사귀 소리에도 그냥 혼비백산. 그런데 어떻게 하나님을 찾읍니까 너무나 어리석은 것이지요.

 

 

여기 6장 4절 히브리말이 상당히 재미있게 돼 있지요. 처음에 들어라 하는 말씀이 슈마[עמש]에서 아인[ע] 자로 끝나고, 마지막에 하나다 하는 말씀 에하드[דחא] 원문보면 슈마 할 때 그 아인 자랑 에하드 할 때 달레트[ד]자를 큰 들자로 썼어요. 그 두 개를 다 갖추면 에드[דע]자가 됩니다. 증거한다 이런 말이예요 말 풀이를 해보면. 재미있는 말놀이인데, 한글로는 도무지 다른 어떤 걸로 살릴 수 없읍니다. 슈마, 에하드 이건 한 마디로 철학을 대표로 세워 온갖 자연신론이라든가 또는 유신론들을 한 마디로 날려버리는 대단한 선언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한 여호와시다, 그걸로 끝난 거예요.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건지신 일들을 이런 저런 사건들을 통해서 쭉 드러내보이시고 있는데 믿음으로 말미암아 점점 휘영청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서는 점점 밝은데로 나오도록 이끄십니다. 바로 하나님의 말씀에서 누굴 증거하시냐 하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뭘하시는 분이신지 이걸 점점 밝히십니다. 그런데 왜 어둠 속으로 기어 들어갑니까? 그건 분명히 우상 숭배지요. 우리 성격도 어떻게 보면 그래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밝아야 되지 않읍니까? 우상숭배자들 가만히 꿰뚫어 보세요 어둡지요. 방황한다는 얘기예요.

 

하나님에 대한 구속 계시는 누구나 보아서 알 수 있도록 하시지만, 사람이 망가졌기 때문에 특별한 사람에게만 하나님을 믿도록 하셨어요. 이걸 우리가 성경의 구원하신 역사를 보면 충분히 알수 있지요. 우리가 교회 2000년 역사를 살펴볼 때 사탄이 숱한 싸움질을 걸어온 것을 봅니다. 교회사 책 아무거나 사 가지고 한 번 쭉 훑어 보세요 그러면 많은 일들, 이방이 교회를 공격한 것이건 또는 교회 안에 이단들이 발생한 사건들이든 모든 사건들이 한 마디로 사탄이 덤벼든 건데 하나님을 말살하기 위한 거예요. 지금도 마찬가지지요 모든 쌈박질, 싸움판의 마지막은 늘 하나님을 어떻게 하든지 저버리도록 속이기도 하고 괴롭히기도 합니다. 정치가 어떻고 경제가 어떻구 결국은 사람의 마음으로부터 하나님을 빼낼라고. 그러니 다 모든 일을 잘 경계하고 판단을 해내야만 돼요 ‘무엇보다도 너희 마음을 지켜라 생명의 근원이 여기서 나오는구나’.

 

 

그런데 여기 6장 4절에 있는 이런 고백이 그 뒤 교회 이천년사 가운데 신조, 신경 보면 쫙 나와있읍니다. 사도신경 보세요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성부에 대해서 거기 나와있고, 그 뒤 그리스도, 그 뒤 성령 하나님 그렇게 나와 있지요? 니케아 신조도 그렇게 나와 있지요, 처음에 하나님에 대해서 척하니 나오고 그다음 우리가 알고 있는 아타나시우스 신조는 모두 44가지 물음으로 44가지 쪽으로 돼 있는데 세 번째부터 스물 여덟 번째까지가 하나님에 대한 거예요. 그거 우리 가끔 읽어 보시는지 모르겠읍니다. 강력한 요청이 아직 없어요 다시 이거 손봐야 하는데. 그당시 하나님을 말살하려는 심각한 공격을 뚫고 그 사람이 쫙 정리해놓은 것 아닙니까 하나님에 대해서. 그 다음 칼케돈 결의같은 것도 있읍니다. 거긴 주로 기독론이 많이 나오지만.

 

우리가 잘 아는 하이델베르흐 요리문답 129개 중에서 26번에서 28물음 보면 거기 아버지 하나님에 대해서 세 가지를 말씀합니다. 지으신 분, 꾸려나가시는 분, 유익하게 하시는 분. 그 다음 으뜸 스카취 칸훼션을 살피면 거기는 35조각으로 돼있는데 첫 번째 딱 한 조각에서만 하나님을 가르치고 있어요. 그 다음 버금 헬베티아 칸훼션에서는 30가름이 있는데 3째 가름에서 7째 가름까지 나오는데 거기에 특이하게 형상 문제도 다루고 있고 하나님을 어떻게 경배하고 어떻게 부르는가 하는 것도 덧붙이고 있어요.

 

그 다음 벨직 고백서는 37절인데, 첫째에서 셋째 쪽까지 하나님께서 행위와 말씀으로 계시하심을 가르치고, 그 다음 갈리아 믿음의 고백서는 40가름인데 첫 번째랑 두 번째 그리고 일곱 번째 여덟 번째 가름에 하나님을 말씀하는데 그 중간에 있는 3장에서 6장까지는 하나님 말씀을 가르치고 있어요. 처음에 하나님 그 다음 성경 그 뒤에 다시 하나님. 깔벵 선생님의 큰 영향 가운데 만들어진 것이 불란서 고백서 입니다.

 

그 다음 우리가 잘 아는 도르트레히트 신조 이게 총 59쪽인데 첫 번째 주제 18쪽이예요, 그거 전체가 하나님에 대해서 썼지요 소위 칼빈의 5대 교리 가운데 첫 번째예요. 그 다음 우리가 잘 아는 웨스터민스터 신앙고백 총 33장에서 둘째부터 다섯째까지가 하나님에 대해서 나와있고 그 뒤에 첨부된 대요리, 소요리 가운데도 하나님에 대해서 알려주고 있읍니다.

 

 

이거 쭉 보니까 하나님에 대해서 대개 가장 앞에다가 놓고 가르치는 것을 살피게 되지요. 보통 그래서 교의신학에서 하나님에 대해서 가르칠 때 하나님의 계심, 하나님의 본바탕, 그분의 됨됨이, 셋 하나이심, 작정과 예정, 지으심, 꾸려나가심 이런 것들을 주제로 조직신학 처음에 신론[神論]으로 가르칩니다 한자말로. 그런데 이러한 교회, 몯고지의 발자취를 가만히 살피면 결국 사람들은 자기네 맘대로 하나님을 주무르려는 악습이 있어요.

 

자기 맘대로 한 번 해보고 싶고 그러다 보니까 여러 빗나간 가르침들이 계속 교회를 괴롭히고 교회 안에서 돋아나는 것을 우리가 살피게 될 때, 이 하나님에 대해서 아는 것이야 말로 첫걸음 입니다! 다른 것 아무리 말해봐야 하나님, 아무리 예수님을 믿는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에게 도달하지 않는 것은 전부 다 비꾸러지게 돼 있어요. 복음주의가 뭐예요? 예수 믿읍시다 그 다음 어떻게 한다는 거예요? 예수님을 거쳐서 성부 하나님께 이끄시게 돼 있는데 왜 하나님한테까지 못가요?

 

우리 보통 신학, 신학교니, 개혁신학이니 할 때 한자말로 신학[神學]이라고 하지요. 신학교는 보통 세미나리[seminary]라고 미국아이들 말로 그렇게 하는데, 라틴말로 그 세미나리를 분석하면 세멘[semen]은 모자리를 말하지요 벼를 심을 때 가장 바탕이 되는 것 그래서 지금 한글로 옮겨서 ‘신학교’는 세메나리 라는 말 뜻이랑 보통 차이가 있는 게 아니예요! “못자리 배움터”하면 참 좋겠어요. ‘하나님에 관한 못자리 배움터’ 이게 신학교예요 라틴말로 한다면. 신학이란 말이 헬라말로 쎄오스[θεος]에다 로기아[λογια] 합성어입니다 이것도 직역해 보면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말한다 생각한다 그런 말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신학의 ‘신’자도 홀로 하나님을 뜻하는 것이고 그 다음 하나님을 임자말로 볼 수도 있고 부림말로도 볼 수 있읍니다 하나님을 말하던가 아니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 요것에 대해서도 정리가 안된 상태로 신학이란 말을 맘대로 쓰고있읍니다! 말뿌리가 어떻게 됐고 또 교회의 역사 가운데서 이 신학이 뭘 어떻게 가르치는가? 왜 이걸 하나님께서 세우셔서 하나님을 증거토록 하는지 이걸 알아야 합니다.

 

성경은 말씀하고 있지요 ‘여호와를 두려워함이 슬기와 앎의 머리’ 이렇게 쉬운데도 이분을 섬기지 못한다니깐요 참 어리석어요. 섬기려면 똑바로 섬겨야 되는데 엉성하게 섬기는 사람인지 아닌 사람인지 시시껄렁한 사람도 적지 않읍니다. 기껏 경건의 모양들만 보일 뿐이지. 하나님께서 계시하시는 하나님의 말씀, 그 바른 말씀을 오직 몯고지, 교회가 그 말씀을 옮기는 것과 그 말씀을 풀어 밝히는 데서만 나타내도록 돼 있지요. 다른 어디에서 하나님을 알 길이 없어요!

 

하나님의 말씀을 다른 여러 가지 겨레말로 똑바로 옮기고 똑바로 옮기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옮긴 그 말씀을 풀어 선포를 하는 것으로 결국 하나님을 증거하거든요. 그런데 요즘 볼 때 대한성서공회는 빗나가지 않았읍니까? 이건 결국 하나님을 뽀개버리는 작업이예요! 심각한 단체예요 그거는. 지금 우리 보는 개역성경 당장 파헤치고 싶지만 아직 이것을 대체하는 성경을 만들지 못하니까 지금 할 수 없이 보거든요. 참 괴로움이 점점 많아져요.

 

또 강단 보면 벙어리 개 같지 않읍니까? 바르게 말씀을 풀어 밝히면 하나님이 나타나는데, 하나님인지 우상인지 아리까리하지 않읍니까. 장로교 예장 통합측이랑 저기 여의도 순복음파랑 이단 논쟁있잖아요. 조용기 허튼소리 한다 제사 드리라고 하고 재림을 언제 한다고 하고. 그것 다 강단의 빗나감이거든요. 신학교도 마찬가지 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은 하나님을 사랑하시는지? 어떻게 사랑하시는지? 이게 없다면 반드시 세상이나 돈이나 자기, 궁극적으로 사탄을 사랑하겠는데. 물어보면 또 사탄 사랑한다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겠지요 이 가운데서? 나쁜 거니까.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우린 흐리스토스 아에수스를 제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지? 하나님을 모르면 해 볼 수 없지 않읍니까? 제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를 따르지 못하는 사람은 결국은 그리스도를 등지는 사람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헛 열심으로 마음은 하나님에게서 멀리 떨어져있었지요 마침내 우상 숭배로 들끓게 됐어요. 그러고 모르면서 계속 해나가다가 결국 멸망받고 말았어요. 경건의 능력은 마다하고 모양만 꾸며가지고는 유치한 속임수인데.

 

 

말씀을 정리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과 그 하나님에 대해서 가르친 교회의 가르침인 교리에서 빗나가면 그 때부터 금방 캄캄해지고 얼마나 더럽고 방황하는 사람이 되는지! 말씀은 내 길의 빛이요 등이요 이런 말씀이 있듯이 그 말씀에서 증거하는 분은 하나님 입니다. 캄캄한데 빛을 만드셨고 또 캄캄한데 빛되신 그리스도를 보내셨읍니다. 그런데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 말씀과 교리를 어기고 얕봅니까? 우상이지요.

 

또 한 가지는 나는 온통 더러워있고 힘없음을 알아야만 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오직 하나님께서만 너그러우심을 베풀어서 나를 이끌어야지만 된다는 그런 단계로 나아가잖아요. 하나님의 주권이라고 할지. 그러므로 교회에서는 머리이신 흐리스토스로 마침내 늘 하나님이랑 사귐이 있도록 하는 것이지요 다른 어디에는 없어요.

 

요한 일서 5장 19절에서 21절 보세요 초대 교회 당시 편지에 간절한 당부가 있지요‘또 아는 것은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고 온 세상은 악한 자안에 처한 것이며 또 아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러 우리에게 지각을 주사 우리로 참된 자를 알게 하신 것과 또한 우리가 참된 자고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니 그는 참 하나님이시오 영생이시라 자녀들아 너희 자신을 지켜 우상에서 멀리하라’ 똑같은 말씀이예요.

 

전도서 12장 1, 2절 읽고 마치겠읍니다 ‘너는 청년의 때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가 가깝기 전에 네 창조자를 기억하라 해와 빛과 달과 별들이 어둡기 전에 빛 위에 구름이 다시 일어나기 전에 그리하라’ 기도 드리겠읍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이 말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건 또는 생각 가운데 마음 가운데 간직하건 여러 가지 일 가운데 드러내건 하나님을 떠나서 홀로 있는 것이 하나도 없음을 아옵나이다.

그런데도 저희에게 큰 복을 베푸셔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뽑아 내셨고 또한 찾아오사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큰 구원을 베푸셨는데, 우리가 하나님을 알기를 힘쓰지 못한 잘못이 많사오니 이것을 다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을 마땅히 알아야 될 때 알지 않게 되면, 세상 신이 저희들을 속이게 되는고로 그리스도를 멀리하게 되고 십자가를 피하게 되는 욕심꾸러기가 되옵나이다.

하나님 아버지여, 옛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이끄시고 보이시는 곳에 갈 때마다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는 것에 크게 한탄을 했고 두려움을 가지고 더욱 하나님께 순복한 사실을 보게 되고 거룩한 분노를 갖고 복음을 선포했읍니다.

오 하나님이여, 왜 저희에게는 그런 거룩한 분노가 일지 못하고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그 큰 복과 힘을 영광스럽게 드러내지 못하는지 혹시 저희가 하나님을 온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서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닌지요?

하나님이여, 저희에게 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갈급함과 깨닫기에 온 힘을 먼저 쓰는 것을 게을리 하는지 필시 육신의 욕망이 저희를 사로잡는 것은 아닌지 늘 살펴보도록 하시옵소서.

이미 저희가 하나님에 대해서 잘 안다고 자부할지라도 다시 한 번 하나님의 말씀에서 가르치신 것과 또한 많은 교회를 공격한 그 무서운 사탄의 공격으로부터 진리를 드러낸 교리의 가르침에서 우리 선각자들이 정리해 놓은 하나님에 대한 가르침을 다시 한 번 힘써 배워 알도록 하셔서, 오직 하나님께 영광, 하나님 앞에서 삶이 점점 영글어가도록 하시옵소서.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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