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와 잠과 꿈
심상근
2003. 7. 3.
일기는 어떤 면에서 천주교의 고백성사와 같다.
대상이 하얀 종이 대신 신부님이지만.
자기의 생활과 삶을 구태여 되도리켜 본다는 것은 귀찮은 일일 수도 있다.
그냥 살면 되지 무엇을 꼬치꼬치 되집어 보노?
물론 태생에 많이 달렸을 것이다.
미국 옛날 카우보이들에게 일기를 쓰라면 이런 식으로 쓸지도 모른다.
‘주먹 싸움 세 번. 권총 결투는 없었음.’
그러나 모두가 카우보이처럼 단순하게 살 수는 없다.
특히 사춘기 무렵에는 모두가 자기를 거울에 비추어보고 주위 일들을 곱씹어 보게 된다.
이는 나는 법을 익히는 새와 같다.
새가 나는 법을 배우는 것을 티비에서 본 적이 있었다.
절벽 위에 위치한 둥지에서 뛰어내린다. 어미가 밀어내는 것으로 기억한다. ‘못된 엄마!’
날개를 퍼떡거려 보지만 결국 땅에 떨어져 산지사방으로 뒹군다. 털고 일어나서 뒤뚱뒤뚱 걸어 올라가 그 둥지로 돌아간다. 그리고 다시 낙하!
새는 이렇게 몇 시간 정도 나는 법을 배우면 된다. 날아다니면서 곤충이나 잡아먹으면 되는, 즉 카우보이 비슷한 ‘인생’이므로.
소는 더 간단하다.
하루, 외갓댁 바깥 마당에서 평소와 같이 입을 벌리고 먼산을 바라보고 앉아 있었는 데, 옆에 매어둔 암소가 훔치적거리며 소요를 피우길래 돌아다 보았다.
이윽고 갓난 송아지가 나왔다.
어미 소는 탯줄은 물론 태와 모든 것을 모조리 먹었다. 청결을 위한 것으로 나는 생각한다. 썩으면 파리 등이 모여들고..
그리고는 갓난 송아지를 핥기 시작했다.
물끼 투성이었던 송아지가 보송보송해질 때까지.
이윽고 털이 뽀얗고 일어섰다.
정말 기가 막히게 귀여웠다.
그러자 송아지는 바로 기립 시도에 들어 갔다.
일어서려다 주저 앉고, 다시 일어서려다 주저 앉고.
수 분 이내에 일어서는 법을 터득힌 이 갓난 송아지는 곧 그 황토흙 마당을 어정어정 아장아장 걷기 시작했다. 훔찔, 비틀, 훔찔 하면서.
새처럼 창공을 나를 필요도 없이, 그냥 어정어정 걸으며 어미 젓을 먹다가 좀 크면 풀이나 뜯어먹고, 아무데나 방뇨하고 변을 보고, 생전 목욕이나 샤우어도 하지 않고..
사람처럼 핸드폰도 필요 없고, 공부 할 필요도 없고, 취직할 필요도 없고, 생일 잔치, 결혼식 같은 것도 하지 않고, 투표도 안 하고..
감당할 능력이 있건 없건, 잔뜩 복잡한 사회를 만들어놓고 인간들은 고생이 막심이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 주중이면 학교에 갔다. 그 딱딱한 의자에 앉아 공부를 하기 위하여.
공부를 열심히 하면 장래 인생의 여정이 좋게 될 것이라를 우리는 훈시 혹은 암시를 통하여 노상 전달받았지만, 꼭 그렇게 믿지는 않았다.
여하튼 우리는 새보다는 더욱 많은 기술을 연마해야함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학교에 안 가면 어머니들은 입에 거품을 물고 ‘너 죽고 나죽자!’식이었으므로 안 갈 수도 없었다.
그러므로 우리의 생각은 새보다 훨씬 복잡했다.
‘창공에 나는 새도 주께서 먹이거늘,’ 인간들을 어련히 신이 잘 돌보겠느냐는 종교의 가르침은 좀 다른 차원의 이야기였고, 우리는 매일의 숙제들과 제삿날처럼 후딱후딱 돌아오는 월말 고사 기말 고사 준비에 고단한 삶을 살았다.
새끼 새가 이윽고 성장하면 어미 새는 새끼 새를 절벽 위 둥지에서 밀어낸다. 이제는 날라보라고, 그리고 네 끼니는 네가 해결하라고.
밑이 까마득하게 내려다 보이는 절벽 위에서 그 새끼 새는 얼마나 큰 두려움에 싸여 있었을까?
우리는 그 사춘기 무렵, 모든 것을 곱씹는 버릇이 있었다. 흡사 갓난 송아지가 눈에 보이는 풀들을 모두 씹어 보듯이.
그 것이 우리에게는 세상을 나는 법을 배우는 길이었다.
그렇게 여러 일들을 곱씹으며 우리는 더욱 성숙하고 더욱 현명해지고 싶었다.
그 과정를 도울 수 있다고 생각하시어 일기를 쓰라고 이병무 선생님은 강요하시었겠지.
‘왜 이병무 선생님을’x개’라고 애들이 불렀을까?’
16회인 아내에게 물었다.
‘못 생기셨잖아.’
‘못 생겼다고 그런 별명을 지어? 행동이 좀 딱딱하시고 유연한 데가 없으셨지. 그래서 아이들이 얕본 것도 있을꺼야.’
‘나중에 경기여고로 가셨어.’
‘실력은 인정받은 모양이구먼.’
우리가 문자로 일기를 안 써도 잠을 자는 동안 우리의 마음은 일기를 쓴다고 나는 믿는다.
하루를 사는 동안 우리는 상처를 받는다고 나는 믿는다. 피곤이라고 불러도 좋다. 어쨋던 우리의 마음에는 여기저기 휘저음의 자국이 남는다.
누구한테 불친절했을 때 느낀 죄책감, 누가 나에게 불손했을 때 느낀 노여움, 자그만 후회, 자그만 번뇌, ‘오늘 이렇게 처리한 그 일을 저렇게 처리했었으면 나았을지도 몰라’ 하는 식의 궁리, ..
이러한 찰과상과 같은 얕은 성처들, 혹은 혹가다 경험하는 깊은 상처들이 우리의 마음을 하루 종일 할퀴고, 이윽고 잠자리에 들면 우리의 잠재 의식은 청소를 시작한다고 나난 믿는다.
큰 빌딩에는 밤이 되면 청소부들이 바쁘다.
이 청소부들처럼, 그 잠재 의식은 내일을 위하여 지울 메모리는 지우고, 정리할 가치가 있는 매모리는 한 켠에 저장해 놓고..
이러한 청소 작업 중 잠꼬대도 한다. 소리도 지르기도 하고.
7 시간 정도의 청소가 끝나면 우리의 마음은 눈이 온 뒤의 앞마당처럼 다시 깨끗하고 말끔한 상태로 하루를 시작한다. 정상적인 날에는.
그러나 걱정 혹은 고민이 많은 시기에는 그러한 밤 청소가 우리의 마음을 그렇게 깨끗이 씻어주지 못할 때가 있다.
어느 상처는 수 십 년의 청소에도 불구하고 씻어지지 않는다.
지금은 아주 잘 나가는 후배 중에 삼년 재수를 하여 겨우 입학이 된 사람이 있다. 지금 나이에도 그는 꿈을 꾼다고 한다. 아무리 학교를 찾아도 못 찾는 꿈을. ‘재수할 때 입은 상처가 컸었던 모양이지.’
마음이 선선한 그는 남의 일처럼 허허거리면 이야기했다.
이제는 일기를 안 써도 되는 나이일까?
이제는 자는 동안 우리의 마음을 청소하는 작업이 사춘기 때보다 용이한 것일까?
종수는 어려서 쓴 일기들이 나중에 읽으면 찟어버리고 싶을 정도롤 유치하게 생각되었다고 이야기했다.
어린 새들도 나르는 법을 배우는 그러한 시기에 일기를 썼다면 그렇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아이고, 유치했어!’
더 이상 그렇게 열심히 배울 필요가 없는 나이에 들어선 우리들.
일기를 쓴다면 십 대에 쓴 일기와 성격이 다르겠지.
그 이야기들을 동창 웹사이트에 올리는 것도 좋겠지. 극히 사적인 일이 아니라면. 늙어서는 어떻게들 생각하고 사는지 서로 궁금하니까.
심상근
2003. 7. 3.
일기는 어떤 면에서 천주교의 고백성사와 같다.
대상이 하얀 종이 대신 신부님이지만.
자기의 생활과 삶을 구태여 되도리켜 본다는 것은 귀찮은 일일 수도 있다.
그냥 살면 되지 무엇을 꼬치꼬치 되집어 보노?
물론 태생에 많이 달렸을 것이다.
미국 옛날 카우보이들에게 일기를 쓰라면 이런 식으로 쓸지도 모른다.
‘주먹 싸움 세 번. 권총 결투는 없었음.’
그러나 모두가 카우보이처럼 단순하게 살 수는 없다.
특히 사춘기 무렵에는 모두가 자기를 거울에 비추어보고 주위 일들을 곱씹어 보게 된다.
이는 나는 법을 익히는 새와 같다.
새가 나는 법을 배우는 것을 티비에서 본 적이 있었다.
절벽 위에 위치한 둥지에서 뛰어내린다. 어미가 밀어내는 것으로 기억한다. ‘못된 엄마!’
날개를 퍼떡거려 보지만 결국 땅에 떨어져 산지사방으로 뒹군다. 털고 일어나서 뒤뚱뒤뚱 걸어 올라가 그 둥지로 돌아간다. 그리고 다시 낙하!
새는 이렇게 몇 시간 정도 나는 법을 배우면 된다. 날아다니면서 곤충이나 잡아먹으면 되는, 즉 카우보이 비슷한 ‘인생’이므로.
소는 더 간단하다.
하루, 외갓댁 바깥 마당에서 평소와 같이 입을 벌리고 먼산을 바라보고 앉아 있었는 데, 옆에 매어둔 암소가 훔치적거리며 소요를 피우길래 돌아다 보았다.
이윽고 갓난 송아지가 나왔다.
어미 소는 탯줄은 물론 태와 모든 것을 모조리 먹었다. 청결을 위한 것으로 나는 생각한다. 썩으면 파리 등이 모여들고..
그리고는 갓난 송아지를 핥기 시작했다.
물끼 투성이었던 송아지가 보송보송해질 때까지.
이윽고 털이 뽀얗고 일어섰다.
정말 기가 막히게 귀여웠다.
그러자 송아지는 바로 기립 시도에 들어 갔다.
일어서려다 주저 앉고, 다시 일어서려다 주저 앉고.
수 분 이내에 일어서는 법을 터득힌 이 갓난 송아지는 곧 그 황토흙 마당을 어정어정 아장아장 걷기 시작했다. 훔찔, 비틀, 훔찔 하면서.
새처럼 창공을 나를 필요도 없이, 그냥 어정어정 걸으며 어미 젓을 먹다가 좀 크면 풀이나 뜯어먹고, 아무데나 방뇨하고 변을 보고, 생전 목욕이나 샤우어도 하지 않고..
사람처럼 핸드폰도 필요 없고, 공부 할 필요도 없고, 취직할 필요도 없고, 생일 잔치, 결혼식 같은 것도 하지 않고, 투표도 안 하고..
감당할 능력이 있건 없건, 잔뜩 복잡한 사회를 만들어놓고 인간들은 고생이 막심이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 주중이면 학교에 갔다. 그 딱딱한 의자에 앉아 공부를 하기 위하여.
공부를 열심히 하면 장래 인생의 여정이 좋게 될 것이라를 우리는 훈시 혹은 암시를 통하여 노상 전달받았지만, 꼭 그렇게 믿지는 않았다.
여하튼 우리는 새보다는 더욱 많은 기술을 연마해야함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학교에 안 가면 어머니들은 입에 거품을 물고 ‘너 죽고 나죽자!’식이었으므로 안 갈 수도 없었다.
그러므로 우리의 생각은 새보다 훨씬 복잡했다.
‘창공에 나는 새도 주께서 먹이거늘,’ 인간들을 어련히 신이 잘 돌보겠느냐는 종교의 가르침은 좀 다른 차원의 이야기였고, 우리는 매일의 숙제들과 제삿날처럼 후딱후딱 돌아오는 월말 고사 기말 고사 준비에 고단한 삶을 살았다.
새끼 새가 이윽고 성장하면 어미 새는 새끼 새를 절벽 위 둥지에서 밀어낸다. 이제는 날라보라고, 그리고 네 끼니는 네가 해결하라고.
밑이 까마득하게 내려다 보이는 절벽 위에서 그 새끼 새는 얼마나 큰 두려움에 싸여 있었을까?
우리는 그 사춘기 무렵, 모든 것을 곱씹는 버릇이 있었다. 흡사 갓난 송아지가 눈에 보이는 풀들을 모두 씹어 보듯이.
그 것이 우리에게는 세상을 나는 법을 배우는 길이었다.
그렇게 여러 일들을 곱씹으며 우리는 더욱 성숙하고 더욱 현명해지고 싶었다.
그 과정를 도울 수 있다고 생각하시어 일기를 쓰라고 이병무 선생님은 강요하시었겠지.
‘왜 이병무 선생님을’x개’라고 애들이 불렀을까?’
16회인 아내에게 물었다.
‘못 생기셨잖아.’
‘못 생겼다고 그런 별명을 지어? 행동이 좀 딱딱하시고 유연한 데가 없으셨지. 그래서 아이들이 얕본 것도 있을꺼야.’
‘나중에 경기여고로 가셨어.’
‘실력은 인정받은 모양이구먼.’
우리가 문자로 일기를 안 써도 잠을 자는 동안 우리의 마음은 일기를 쓴다고 나는 믿는다.
하루를 사는 동안 우리는 상처를 받는다고 나는 믿는다. 피곤이라고 불러도 좋다. 어쨋던 우리의 마음에는 여기저기 휘저음의 자국이 남는다.
누구한테 불친절했을 때 느낀 죄책감, 누가 나에게 불손했을 때 느낀 노여움, 자그만 후회, 자그만 번뇌, ‘오늘 이렇게 처리한 그 일을 저렇게 처리했었으면 나았을지도 몰라’ 하는 식의 궁리, ..
이러한 찰과상과 같은 얕은 성처들, 혹은 혹가다 경험하는 깊은 상처들이 우리의 마음을 하루 종일 할퀴고, 이윽고 잠자리에 들면 우리의 잠재 의식은 청소를 시작한다고 나난 믿는다.
큰 빌딩에는 밤이 되면 청소부들이 바쁘다.
이 청소부들처럼, 그 잠재 의식은 내일을 위하여 지울 메모리는 지우고, 정리할 가치가 있는 매모리는 한 켠에 저장해 놓고..
이러한 청소 작업 중 잠꼬대도 한다. 소리도 지르기도 하고.
7 시간 정도의 청소가 끝나면 우리의 마음은 눈이 온 뒤의 앞마당처럼 다시 깨끗하고 말끔한 상태로 하루를 시작한다. 정상적인 날에는.
그러나 걱정 혹은 고민이 많은 시기에는 그러한 밤 청소가 우리의 마음을 그렇게 깨끗이 씻어주지 못할 때가 있다.
어느 상처는 수 십 년의 청소에도 불구하고 씻어지지 않는다.
지금은 아주 잘 나가는 후배 중에 삼년 재수를 하여 겨우 입학이 된 사람이 있다. 지금 나이에도 그는 꿈을 꾼다고 한다. 아무리 학교를 찾아도 못 찾는 꿈을. ‘재수할 때 입은 상처가 컸었던 모양이지.’
마음이 선선한 그는 남의 일처럼 허허거리면 이야기했다.
이제는 일기를 안 써도 되는 나이일까?
이제는 자는 동안 우리의 마음을 청소하는 작업이 사춘기 때보다 용이한 것일까?
종수는 어려서 쓴 일기들이 나중에 읽으면 찟어버리고 싶을 정도롤 유치하게 생각되었다고 이야기했다.
어린 새들도 나르는 법을 배우는 그러한 시기에 일기를 썼다면 그렇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아이고, 유치했어!’
더 이상 그렇게 열심히 배울 필요가 없는 나이에 들어선 우리들.
일기를 쓴다면 십 대에 쓴 일기와 성격이 다르겠지.
그 이야기들을 동창 웹사이트에 올리는 것도 좋겠지. 극히 사적인 일이 아니라면. 늙어서는 어떻게들 생각하고 사는지 서로 궁금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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