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상협은 K리그에서 꾸준함의 상징과 같은 선수였다. 16년 동안 140개가 넘는 공격포인트를 기록했고, 두 차례 K리그1 베스트11을 수상했다. 특히 서른 살이 넘어 부활의 날개를 펼친 것으로 많은 선수의 귀감이 됐다. 갑작스럽게 은퇴 소식을 전한 임상협을 ONSIDE가 만났다.
PROFILE 임상협
생년월일 1988.07.08
포지션 윙어
팀 전북현대-부산아이파크-상주상무-수원삼성-제주유나이티드-포항스틸러스-FC서울
프로통산 기록 476경기 104골 39도움
A매치 데뷔 2013.08.14(대한민국 0-0 페루)
지난 4월 3일 임상협은 자신의 SNS 계정을 통해 현역 은퇴를 공식 발표했다. FC서울과 기존 계약이 끝난 뒤 재계약, 새로운 팀에서의 출발 등을 모색했던 그는 K리그가 개막하고 한 달이 지난 뒤 돌연 은퇴를 선언했다. K리그2와 홍콩, 호주 등 해외에서도 오퍼가 있었지만 그는 26년 간의 선수 커리어에 마침표를 찍기로 했다.
임상협은 ONSIDE를 만난 자리에서 순전히 자신의 의지였다기 보다는 여러 상황이 만든 갑작스러운 결정이었다고 설명했다. 선수 생활 연장도 가능했지만 K리그1의 명문 팀에서 마무리를 하는 것이 다음 챕터로 가기 위한 결정이라는 점이 크게 작용했다. 은퇴 이후에도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 특히 K5리그 소속의 성동FC 투게더의 디렉터로 한국 축구의 저변 확대와 하부리그 활성화에 기여하고 있다.
잘생긴 K리거로 늘 언급됐던 화려한 외모와 달리 피치 위에서는 많은 활동량과 투쟁적인 플레이, 팀을 위한 헌신을 많이 보여준 측면 공격수였던 임상협. 그는 자신의 축구 인생을 “한번에 이룬 것은 없었고, 늘 좌절하고 다시 일어서서 도전하며 꿈에 한 걸음씩 다가섰다”라고 회고했다. 축구 선수 임상협이 걸어온 시간을 함께 추억해보려 한다. 비슷한 고민을 안고 있는 후배들이 귀담아 들을 만한 메시지가 있을 것이다.
서울 유니폼을 입고 뛴 2024년이 마지막 시즌이 됐다
선수 생활을 마무리한 지 7개월이 지났는데도 얼굴이나 몸은 여전히 현역 같네요.
선수 때만큼은 아니지만 운동을 꾸준히 하며 몸 관리를 하고 있습니다. 아직은 선수 시절 수준으로 유지는 되는 것 같아요. 운동을 통해 삶의 에너지를 얻을 수 있으니까요. 선수 생활을 마친 지 얼마 안 돼 몸이 근질거리니까 생활축구를 통해 꾸준히 뜁니다. 웨이트 트레이닝도 많이 하는 편입니다.
많은 이들의 예상과 달리 2024시즌을 끝으로 16년의 프로 생활에 마침표를 찍었습니다. 대부분 팬들은 더 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은퇴를 하게 된 과정은 외부에 자세히 알려지지 않았네요.
은퇴를 계획하고 한 건 아니에요. 작년에 FC서울에서 뛸 때 몸 상태가 괜찮았고, 저도 올해 선수 커리어를 이어갈 줄 알았는데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은퇴를 했습니다. 마지막까지 현실을 받아들이기 쉽진 않았어요. 이적시장 마감 전에도 국내외에서 오퍼가 있었던 건 사실이고요. (Q. K리그2와 홍콩, 호주 팀에서 얘기가 있었다고 들었거든요.) 그래도 나이가 들어가며 선수 생활의 마무리에 대한 기준점과 생각을 평소부터 갖고 있었어요. 오퍼는 감사했지만, 제 기준점에 못 미치는 상황이었죠. 최상위 리그의 좋은 팀에서 마침표를 찍고 은퇴하는 게 그래도 가장 아름다운 모습일 것 같았어요. 제2의 인생을 시작할 때, 최고 레벨에서 마무리했다는 것이 디딤돌이 될 수 있어요. 1~2년 정도 더 할 수 있지만, 달리 생각하면 언젠가는 가야 할 길을 빨리 가는 것이니까 은퇴를 받아들였습니다. 지금은 후회 없습니다.
아무리 커리어가 훌륭한 선수라도 자신이 원하는 모습으로 은퇴하기란 어려운 것 같습니다. 친구인 기성용 선수는 서울에서 마무리할 줄 알았는데 포항으로 이적했죠.
인생이란 게 바람대로 다 안 되는 거 같아요. 또 다른 친구인 고요한 코치도 작년 초 많은 박수를 받으며 은퇴했지만, 제가 알기론 선수 생활에 대한 의지가 더 있었어요. 성용이의 경우 원했던 그림은 당연히 FC서울에서의 은퇴였던 걸로 아는데… 참 어렵네요. 저 또한 계획대로 은퇴하길 바랐지만 안 됐고요. 그런 모습을 보면 아쉽고, 서글프죠. 저는 그 정도는 아니었지만 한 팀의 레전드로서 더 대우받을 수 있는 분위기가 축구계에 전체적으로 형성되면 좋겠습니다.
프로에서만 7개 팀을 거쳤습니다. 최근 K리그 행사에서 해당 팀들의 유니폼을 다 들며 임상협 에디션을 보여주기도 했던데요. 만일 은퇴 행사를 갖는다면 어디에서 하고 싶나요?
거쳐간 모든 팀에서 할 수 있다면 너무 좋겠지만, 쉽지 않죠. 은퇴식을 꼭 하고 싶다는, 그런 미련은 없습니다. 다만 아쉬운 건 제가 서울에 남을 줄 알았고, 더 할 거라 생각한 서울 팬들께 마지막 모습을 못 보여드리고 떠났잖아요. 서울에서 작별 인사 정도는 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바람은 갖고 있습니다. 저의 마지막을 보여주는 모습이니까, 마지막 팀에서 인사하는 기회를 얻고 싶습니다.
선수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축구 명문 학교를 거쳤습니다. 대동초, 문래중, 장훈고면 당시 서울에서 성장하는 선수가 다닐 수 있는 최상의 루트였습니다.
문래초등학교 시절 매일 친구들과 놀이삼아 축구를 하다가, 문래중 감독님 눈에 띄었어요. 그분이 대동초등학교로 가는 걸 주선해 주셨어요. 당시 육상 대회에서도 성적을 잘 내서 부모님은 운동 신경이 있다고 생각을 하시고 축구 선수의 길을 후원해 주셨어요. 4학년 2학기에 전학을 가서 대동초 축구부에 들어갔죠. 문래초에서 4학년까지 반장이었고, 대동초로 전학 가서도 5학년때 반장을 하게 됐어요. 사실 축구를 하려고 전학 간 거라 어렵다고 했는데, 당시 담임 선생님이 ‘네가 인기가 많아 학생들이 뽑았으니 해야 한다’며 어떻게든 도와주겠다고 하셔서 했었습니다. 6학년 때는 축구부 주장을 해야 해서 더는 못했고요. 부모님이 매일 차로 등하교시켜 주시고 고생하셨죠. 그 뒤에 문래중을 갔고, 장훈고로 진학했어요. 시기적으로 좋은 팀과 좋은 감독님들을 만났죠.
축구를 하면서 이걸 직업으로 삼아도 되겠다는 자신감을 가진 시기는 언제였나요?
초등학교 때는 잘했어요. 당연히 국가대표가 될 거라 믿었어요. 중학교 1학년 때도 3학년 형들과 함께 경기를 뛰었어요. 당시엔 정말 드문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중2 때 부상이 왔고 3학년까지 재활로 거의 날렸어요. 고등학교에 간신히 진학했지만 자신감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죠. 원래 키가 작았는데 고2 때 신체적 성장이 급격히 이뤄지고 힘과 스피드가 붙으며 지금의 제 포지션을 확실히 잡게 됐죠. 그 전에는 공격수, 미드필더, 수비형 미드필더까지 내려갔어요. 스피드가 붙으니까 윙어를 보게 됐는데, 그러고 처음 출전한 대회에서 어시스트 상을 받으며 경쟁력을 구축했죠. 당시 이규준 감독님, 백기홍 코치님 지도력이 좋아서 장훈고에 정말 잘 하는 선수들이 많이 모여서 주전으로 뛰는 게 힘들었어요. 조수혁, 박종우, 양준아, 구본상, 김동섭, 윤동민, 황순민, 박수창, 하강진, 지금은 고인이 된 강지용까지. 제 동기들, 그리고 위아래로 무려 18명이 K리그를 갈 정도의 대단한 멤버들이었습니다. 그 안에서 정말 노력 많이 했어요. 단 하루도 빠지지 않고 개인 운동을 나갔거든요.
장훈고를 졸업하고 K리그 직행이나 국내 대학 진학이 아닌 일본 류츠케이자이대학교로 향했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로는 정말 독특한 선택이었던 것 같아요.
그 시절 J리그는 C계약이라는 게 존재해서 외국인 선수를 어려서부터 데려와 키울 수 있었어요. 그래서 한국 선수들이 고교 졸업 후 J리그로 많이 갔죠. 저도 그런 분위기 속에 J리그로 가고자 했는데 잘 안 풀렸죠. 그때 류츠케이자이대학교에서 제안이 왔고 장학생으로 갈 수 있었어요. 나카노 유지 감독님이 오랜시간 축구부를 이끌고 오셨는데, 언제든 프로에서 오퍼가 오면 보내주겠다고 약속하셔서 가게 됐죠. 지금 나카노 감독님은 일본대학축구연맹 회장님으로 활동 중이시고, 한국 대학축구연맹과도 많은 교류를 하고 계세요. 그때 류츠케이자이대학교 축구부가 부원이 150명이고 7군까지 있었어요. 저희 때 프로로 16명이 갔거든요. J3리그 팀들과도 자주 경기를 하면서 일본 축구 시스템도 알 수 있었던 시간이었습니다.
최근 박주호 해설위원의 유튜브에 출연해 일본을 같이 다녀왔고, 카가와 신지 선수를 만나기도 했죠. 일본에 2년 정도 있었던 걸로 아는데 일본어가 꽤 능통해서 놀랐어요.
제가 갔을 때 축구부에 통역해 줄 사람이 없으니 생존을 위한 일본어를 배웠죠. 친구들이 많은 도움을 줬어요. 원정 경기를 가면 어쨌든 일본인 친구와 한 방을 써야 하니 할 수밖에 없었어요. 학교에서도 저 같은 외국인 학생들을 위해 따로 일본어 수업을 해주며 많이 배려해줬죠. 듣는 건 거의 다 되는데, 말하는 건 유창한 편은 아닙니다. 생존을 위한 일본어만 가능합니다.(웃음)
원클럽맨만큼 사랑받은 다(多)클럽맨
K리그에서만 7개 팀을 거쳤다
2009년 전북 현대에 입단했습니다. 당시 전북 왕조가 막 시작되던 때였죠. 2년 동안 전북 유니폼을 입고 뛰었습니다.
J2리그 미토 홀리호크 입단 얘기가 있었는데, 고민 끝에 K리그로 가기로 마음먹으며 드래프트 신청을 했죠. 저도 예상 못했는데 운 좋게 1순위로 전북이 뽑아줬죠. 가보니 좋은 선수들이 정말 많더라고요. 신인인데 최강희 감독님이 좋게 봐주셨어요. 동계훈련 때 제가 팀에서 가장 많은 골을 넣은 걸로 기억합니다. 당시 숙소 룸메이트가 김상식 베트남 대표팀 감독님이었는데, 프로생존법에 대한 조언을 많이 해 주셨어요. 원정을 가면 이동국 선배님과 같은 방을 썼는데 역시 많이 배웠고요. 그런데 전북이 계속 좋은 선수를 보강하다 보니 경쟁에서 밀렸죠. 아무래도 제 포지션에서는 외국인 선수들이 우선적으로 뛰니까요. 그래도 프로 입단하고 첫 시즌에 우승 일조한 경험은 정말 좋은 경험이었습니다. 서정진, 이현승 같은 또래 선수들과 경쟁하며 배운 것도 많고요. 특히 최강희 감독님의 승부욕은 평생 잊지 못할 것 같아요. 연습 때부터 지거나 위축되는 모습 보이는 걸 싫어하셨어요. 그때 배운 게 제 프로 생활의 밑거름이 됐습니다.
2011년 2대2 트레이드를 통해 부산 아이파크 유니폼을 입으며 본격적으로 이름을 알렸습니다. 트레이드 당시에는 반대 급부로 전북에 간 선수들이 더 유명한 선수들(정성훈, 이승현)이라 기대가 크지 않았는데, 2011시즌에만 10골을 터트렸습니다.
그때는 트레이드에 선수 거부 의사는 반영이 안 되던 시기였어요. 저도 경기를 뛸 수 있는 기회를 더 얻고 싶었고 부산으로 가기로 했죠. 이창현(당시 이요한) 형이랑 함께 트레이드 돼 갔는데 부산 팬들이 저를 그렇게 환영하지 않는 분위기였어요. 출정식 때도 제가 듣고 있는 걸 알면서 구단 측에 왜 트레이드를 했냐고 항의를 해 마음이 다치기도 했죠. 그래도 그런 분위기 때문에 더 오기를 갖고 여기서 잘하겠다는 마음을 먹을 수 있었습니다. 그게 그 시즌 좋은 퍼포먼스로 나왔던 것 같아요.
부산행을 이끈 안익수 감독은 당시 고강도 훈련으로 유명했지만, 그만큼 어린 선수들의 성장에도 큰 역할을 했던 지도자로 기억됩니다. 그때 잘생긴 선수들이 많은 부산의 별명이 아이돌파크였지만, 선수들은 정말 투쟁적으로 뛰었죠.
그때는 저도 간절한 상태로 왔으니까 그 힘든 훈련을 이겨내고, 안익수 감독님 눈에 들려고 열심히 했어요. 정말 행운이었죠. 안익수 감독님을 만나면서 축구 선수 임상협이 본격적으로 탄생했으니까요. 모든 면에서 축구를 크게 배웠어요. 훈련은 정말 힘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안에 담긴 철학이나 목적은 분명했고, 배울 게 많았습니다. 나중에 FC서울에서도 감독님이 윤종규, 이태석, 이한범, 김주성 같은 선수들도 크게 발전할 수 있도록 도와주셨어요. 그 선수들도 저처럼 안익수 감독님을 만나 큰 성장을 이뤘죠. 팀과 선수의 성장이라는 면에서는 안익수 감독님이 정말 뛰어난 역량을 지닌 분이 아닌가 싶습니다.
2013년 다시 한번 멋진 시즌을 보냈고, 안익수 감독이 성남으로 떠난 뒤 부임한 윤성효 감독과의 궁합도 좋았었죠. 그해에 국가대표팀에도 발탁됐습니다.
윤성효 감독님은 저를 인정해 주셨어요. 항상 편하게 해주셨죠. 부산에서 2년 간 좋은 활약을 한 덕분에 좋은 오퍼가 많이 왔는데 감독님이 직접 면담을 하며 팀에 남아달라고 요청하셨습니다. 대신 운동장에서 제가 하고 싶은 걸 할 수 있게 배려해 주습니다. 그 시절에 윤성효 감독님 얼굴이 들어간 부적이 유행이었는데, 저도 골 퍼포먼스를 하면서 감독님께 보답했고요. 그해에 제가 대표팀도 가고, 이듬해에는 베스트11에도 선정됐잖아요. 선수의 마음을 편하게 만들어 주시며 갖고 있는 걸 최대한 뽑아내는 지도자였어요.
A대표팀 경력은 2013년 페루전 한 경기로 끝났습니다. 닿을 듯 닿지 않은 경계선에서 좌절감은 없었을까요?
A대표팀은 정말 아쉽습니다. 더 노력하고, 더 잘했으면 대표팀을 자주 오간 선수가 될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요. 그래도 제 경력에 A매치 출전이 있다는 것은 위안이죠. 대표팀은 감독님들이 선택을 하는 곳이고, 정말 좋은 선수들을 놓고 비교하잖아요. 그래도 더 열심히 했다면 하는 아쉬움은 남죠. (Q. 대신 프로에서 장수 선수로 생존할 수 있는 나름의 전략 같은 것을 만든 것 같습니다.) 뭔가 제 인생의 도전이 한 번에 되진 않았어요. 그런데 남들보다 빨리 일어나고 깨닫는 걸 반복하면서 다음 번 도전에는 목표를 달성했고요. 신은 공평하다는 생각입니다. 제가 한 만큼 딱 얻었으니까요. 노력 이상의 결과가 나오면 자만하게 되잖아요. 롱런을 할 수 있었던 것도 자만하지 않고 계속 노력하게끔 세상의 이치가 돌아갔구나, 라고 생각합니다.
2014년 커리어 첫 K리그1(당시 K리그 클래식) 베스트11에 뽑혔습니다.
후반기에 골이 계속 터지면서 의식을 하기 시작했죠. 제 포지션은 늘 최고의 외국인 선수들이 활약하는 곳이라 후보에 드는 것도 어려웠어요. 그 시즌에 득점왕(수원삼성 산토스 14골)과 3골 차이로 끝났을 거예요. 베스트11은 프로 선수로서 꼭 받고 싶은 상이어서 더 동기부여를 갖고 했죠.
2011년부터 4년 동안 최고의 순간을 보내다가 국군체육부대(상무)를 갔습니다. 상주상무에서도 2년 연속 엄청난 활약을 펼쳤는데 군팀에서 얻은 것은 무엇이었나요?
당시 부산에서 시간이 갈수록 힘든 점이 있었어요. 승부에 대한 집착이 컸고, 지면 힘들었어요. 제가 팀을 이끌어가는 그룹의 선수였기에 그랬던 것 같습니다. 이기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이 많았는데 그게 점점 스트레스가 됐죠. 상무에 가 보니 정말 좋은 선수들이 많았어요. 제 입대 동기가 이용, 이승기, 황일수, 박기동, 김성환, 양동원, 박진포, 배일환 등이었어요. 그런 동기들을 믿고 부담을 내려 놓으니까 축구가 더 쉽고 잘 되더라고요. 상무에서 즐겁게 축구를 했어요. 군인 신분으로 감내해야 할 어려움도 있지만, 축구적으로는 그런 편안한 마음이 선수로 또 한번 성장하는 힘이 됐습니다.
전역 후 부산을 바로 떠날 거라 예상했던 사람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팀이 강등됐음에도 잔류했죠. 이듬해에 승격을 이루지 못했고, 당시 조진호 감독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는 일이 발생하기도 했습니다.
상무에 있는 동안 아이러니하게 상주가 승격하고, 부산이 강등됐어요. 부산으로 복귀했는데 1부 팀에서 오퍼가 많았어요. 강등이 됐으니 부산이 저를 못 잡을 거라 생각했는데 상무에서의 두번째 시즌을 함께 한 조진호 감독님이 부산으로 오시면서 상황이 변했어요. 감독님이 구단에 저를 잡아달라고 하셨어요. 저도 마음은 복잡했지만 잔류를 선택했죠. 그때 부산이 승격할 수 있는 멤버를 갖췄고, 승점도 잘 땄는데 승격을 못한 게 너무 아쉽죠. 조진호 감독님까지 시즌 중에 돌아가시면서 너무 혼란스러웠고요. 부산이 2부 리그 팀인데도 FA컵 결승까지 갈 정도로 멤버가 좋았거든요. 제가 시즌 막바지에 부상으로 결장했는데, 여러모로 아쉬웠어요.
한 번에 이룬 성공 없다, 넘어지면 일어서는 법을 배운다
경쟁, 도전, 인내의 연속이었던 날들
2018년 수원삼성으로 이적합니다. 당시 수원 팬들이 엄청나게 환영했고, 서정원 감독도 큰 기대를 걸었죠. 결과적으로 보면 부산이나 상주에서 보여준 퍼포먼스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수원이 그 전부터 계속 저를 원했어요. 저도 가고 싶다는 마음이 컸죠. 수원이 이적료도 꽤 지불했어요. 당시 수원 왼쪽에는 염기훈이라는 큰 산이 있었어요. 또 23세 이하 의무 기용 제도가 본격화되면서 전진우 선수가 중용됐죠. 양 측면 공격에서 제가 3순위였어요. 그래서 리그보다는 23세 이하 제도가 없는 AFC 챔피언스리그와 FA컵(현 코리아컵)에 주전으로 나가는 상황이 됐습니다. 강팀으로 갈수록 경쟁이 심화되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죠. 이전에 안익수, 윤성효, 박항서, 조진호 감독님 모두 저를 우선 순위에 두고 믿음을 주신 팀에서 뛰다가 수원에서는 제가 1번이 아닌 위치에서 경쟁해야 하는 상황이 된 거죠. 처음 마주한 상황에서 제 멘탈이 그걸 견디지 못했고, 활약이 기대만큼 안 나왔던 거 같아요.
부진이 길다가 가시마와의 챔피언스리그 4강전에서 대활약을 했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상대팀 골키퍼였던 권순태 선수의 물리적 가격이 발생해 양국에서 엄청난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날 제가 몸이 너무 좋았어요. 초반에 제 쪽에서 기회가 생겼고 팀이 2대0으로 이기고 있었죠. 순태 형은 전북에서 함께 생활했던 동료예요. 그날 왜 그랬는지 모르지만 그런 행동이 나왔죠. 끝나고 형이 연락을 주며 사과를 했어요. 그 상황 이후 경기 흐름이 바뀌었고, 판정도 좀 애매해지면서 저희가 그 경기를 놓치는 바람에 결승을 못 갔어요. 결승을 갔다면 그때 수원이 우승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흐름은 확실히 그랬거든요.
수원에서 이후 2년은 프로 커리어에서 가장 빛을 잃은 시간이었습니다. 2019년에는 시즌 중도에 제주로 임대를 다녀오고, 2020시즌도 침묵하다 AFC 챔피언스리그에서 이름값을 하며 수원에서의 시간을 마무리했습니다.
결론은 제가 부족했죠. 멘탈의 문제가 컸고요. 그래도 배운 게 많은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가끔 부모님과 대화를 하면 “그때 수원을 가는 게 아니었다”라고 하시거든요. 그런데 수원에서의 시간 덕에 제가 선수 생활을 더 연장할 수 있었다고 답해요. 그런 시간이 늘 소중했어요. 그 시기엔 힘들지언정, 그 아픔이 자산이 되니까요. 그래도 마지막에 최선을 다하길 잘한 것 같아요.
그때 수원이 정상빈을 포함해 어린 선수들 위주로 시즌 종료 후 열리는 챔피언스리그를 준비했어요. 코로나 팬데믹 시기라 챔피언스리그는 시즌 종료 후 보너스 시즌 개념이었고, 구단은 리빌딩에 더 신경 쓴다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래서 저처럼 계약 종료가 확정된 선수는 안 가는 분위기였어요. 그런데 박건하 감독님이 제게 같이 가자고 먼저 제안 주셨어요. 함께 최선을 다했고, 마지막에 8강까지 가는 모습을 팬들께 보여드렸죠. 팬들도 선수단의 노력과 진심을 알아주신 것 같아요. 저도 그때 유종의 미를 거둔 것에 박수와 격려를 보내 준 수원 팬들을 보면서 박건하 감독님께 감사했어요.
만 33세에 포항으로 이적했습니다. 솔직히 많은 이들은 큰 기대를 하지 않았던 것 같아요. 그러나 완벽하게 부활하며 2021시즌을 축구 인생 최고의 순간으로 만들었습니다.
마지막 도전을 놓고 고민했어요. 다른 팀의 오퍼도 있었지만 포항이 AFC 챔피언스리그를 나간다는 점이 가장 매력적이었어요. 안전보다는 도전을 택했습니다. 포항에서 신광훈, 신진호 같은 마음이 잘 맞는 고참들을 만난 게 큰 힘이 됐어요. 처음에 신광훈 선수 차를 타고 클럽하우스로 가는데 도심을 서서히 벗어나 산 속으로 들어가니까 “어? 어?”했어요. 그런데 거기 지내면서 정말 즐거웠어요. 축구에 전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첫 시즌에는 제가 서른살을 넘은 고참인데도 클럽하우스에서 살았어요. 후배들이 저 보고 또 다른 ‘클럽하우스 관리인’, ‘송라 지박령’이라고 할 정도였죠.(웃음) 정말 잘 먹고, 잘 쉬고, 운동을 열심히 할 수 있었어요.
2021년 챔피언스리그는 하나의 사건이었죠. 울산이나 전북이 아닌 포항이 동아시아 최고의 팀이 돼 결승전에 진출했으니까요.
조별리그 당시에는 제가 주전이 아니었어요. 그런데 여름에 송민규 선수가 전북으로 떠나면서 제가 자리를 잡았어요. 김기동 감독님 입장에선 선택지가 저 밖에 없었고, 저도 감독님의 믿음에 보답하려고 했죠. 챔피언스리그에서의 활약을 기점으로 확 올라왔어요. 태국에 모여 치른 조별리그는 포항이 가까스로 올라갔지만 16강 세레소 원정에서 승리하며 반등했죠. 당시 8강과 4강 토너먼트를 전주에 모여서 했습니다. 8강에서 나고야와 재회했죠. 포항이 이미 조별리그에서 0대3으로 완패했고, 전력이 정말 좋은 팀이라 열심히 준비했어요. 그날 제가 2골을 넣고 3대0으로 이기면서 울산과 4강에서 붙었죠. 당시 울산도 전력이 훌륭한 팀이었는데 혈투 끝에 승부차기 승리로 결승까지 갔어요.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은 제가 서 본 무대 중 가장 컸고, 준비부터 느낌이 달랐어요. 구단에서도 비즈니스석으로 선수들을 사우디아라비아까지 데려갈 만큼 신경 썼고요. 사실 그 시즌 포항의 전력은 결승행을 이룬 게 기적이라고 생각될 정도였어요. 게다가 결승 앞두고는 이승모, 강현무 두 선수가 군문제와 부상으로 빠졌죠. 끈끈함으로는 정말 자신 있었는데, 결승전에 가보니 6만 관중에게 압도를 당하면서 정신을 차리지 못했어요. 포항의 경쟁력을 다 보여주지 못했죠. 큰 경기 경험도 중요하다고 느꼈어요. 그런 중압감을 이겨낼 큰 배포가 있어야 큰 선수가 된다는 걸 느꼈어요.
포항과 2년 계약 종료 후 서울로 갔습니다. 입단 첫 시즌부터 부주장이 됐고, 전반기는 출발이 좋았는데 후반기 들어 팀이 흔들리면서 본인 퍼포먼스도 흔들렸습니다.
그 전년도에 서울에 부임한 안익수 감독님이 함께 하자고 제안을 주셔서 재회하게 됐어요. 주장은 일류첸코 선수지만 당시 경기에 많이 못 나갔어요. 그래서 실제 경기에서는 제가 주장 완장을 차는 경우가 많았어요. 그런데 시즌을 치르면서 팀밸런스가 깨졌고, 결국 성적 부진으로 안익수 감독님이 물러나셨죠. 그때는 저 스스로 많이 내려놨어요. 팀도 33라운드에 전북에게 패하며 파이널B를 가게 됐고요.
최고의 커리어를 만들어 준 김기동 감독과 2024시즌 서울에서 재회했습니다. 베테랑으로서 자기 몫을 다 하며 후반기 팀의 반등을 이끌었습니다.
김기동 감독님이 서울로 오신다고 할 때 좋았죠. 저를 잘 아는분이시니까. 감독님이 처음엔 힘들어 하셨어요. 서울이라는 팀에 대해 이해하려고 노력을 많이 하시면서 제게 많은 걸 물어보시더라고요. 그 나이가 되니까 개인보다는 팀이 잘 되는 걸 생각하고, 실제로 시즌을 치르면서 서울이 팀으로서 잘 되는 것에 행복감을 크게 느꼈어요. 서울이 전북을 원정에서 5대0으로 이기며 징크스를 끊고, 5연승을 했습니다. 90분을 다 못 뛰어도 그 안에 있다는 게 행복했어요. 기성용 선수가 시즌 중반에 부상으로 빠지면서 고참은 저 혼자 남았기 때문에 운동장 안팎으로 어떻게든 도움이 돼야 되겠다고 생각했고 그 노력이 최종 4위라는 팀 성적으로 나와 행복했죠.
K5리그 디렉터? 한국 축구 뿌리부터 본다!
임상협이라는 선수는 화려한 외모가 주는 이미지와 다르게 꾸준함, 성실함, 저돌적인 플레이가 강점이었습니다. 잘 모르는 팬들은 플레이를 막상 보고 놀랐던 것 같아요.
오히려 감사한 부분이죠. 그래서 국제대회에 나가면 상대 팀들은 방심하는 거 같아요. 공을 예쁘게 찰줄 알았던 선수가 몸으로 막 치고 달리고 하니까.(웃음) 생긴 거랑 정반대 스타일이라서 더 좋아해주신 팬들도 많으셨고요. 제가 항상 운동 끝나고 슈팅 연습을 별도로 많이 하고 들어가요. 골키퍼들에게 늘 부탁했어요. 서울 와서도 그러니까 후배 선수들이 같이 하자고 해요. 최고참이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며 따라와줬어요. 팀 전체가 더 연습하는 분위기가 형성되고, 그게 감독님과 구단에게도 얘기가 전해졌죠. 제 평가를 높여줬다고 생각해요.
또 다른 이미지는 어느 팀에 가든, 어떤 지도자를 만나든 인정 받고 사랑받았다는 점인 것 같아요. 구설수와 안티가 별로 없는 선수. 요즘 시대에 쉽지 않은 일이죠. 수원과 서울, 전북, 포항까지 K리그를 대표하는 명문 구단이고 라이벌 의식이 있는 팀들인데 이적 이후에도 팬들과의 관계는 깔끔한 편이었습니다.
축구를 하면서 승부에 강한 집착을 가졌어요. 경기장에서는 늘 잘하고 싶었고, 제 포지션에 맞는 역할을 하고 싶었고, 골을 넣고 싶었습니다. 그걸 준비하는 모든 시간은 축구에 맞추고, 절제를 많이 했어요. 몸에 나쁜 행동은 피하고, 몸에 좋은 걸 하려고 했어요. 제가 가장 행복한 건 축구를 잘 하고, 골을 넣을 때의 그 감정이었거든요. 그 감정을 계속 맛보고 싶어서 실패하면 더 노력했어요. 그 노력 중 하나가 절제와 자기 관리였습니다. 그런 부분에서 팬들이 알아봐주시고 공감해주신 게 아닌가 싶습니다.
은퇴 후에도 성실하게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출연이나, K리그 관련 행사에도 등장하는데 아직은 선수 이후 인생에 대한 큰 방향은 잡히지 않은 상태인가요?
초등학교 4학년 2학기부터 축구를 시작해서, 지금까지 한 길만 보고 달려왔어요. 은퇴 후 지금까지는 저한테 일종의 휴식을 주는 시간으로 삼고 있어요. 이제는 다양한 경험을 하고 싶어요. 그래서 축구 말고도 뭘 좋아하는지, 뭘 하면 행복한지 그 목표를 찾고 있는 과정입니다. 지도자도 생각은 하고 있습니다. 아마 축구와 관련된 일을 하게 될 테니까 선수 시절에 미리 B급까지는 따 놨습니다.
최근 K5리그 소속의 성동FC 투게더의 디렉터를 맡은 것도 눈길을 끌었습니다. 어떤 연유와 계기로 일을 하게 됐나요?
은퇴하고 쉬려는 찰나에 성동구에서 연락이 왔어요. 정원오 구청장님을 비롯한 관계자 분들과 몇 차례 미팅을 하면서 생각보다 기반이 잘 잡혀 있는 팀이라는 걸 알게 됐습니다. 선수들의 재기를 돕는 팀, 여성팀, K5리그와 K7리그, 유소년 팀까지 시스템이 구축돼 있고 구에서도 의지를 갖고 지원하고 있더라고요. 디렉터를 제안 받았을 때 팀에 들어가서 제가 갖고 있는 경험과 지식, 철학을 공유하면 좋은 시너지가 나겠다는 생각으로 수락하게 됐습니다.
K5리그 팀의 디렉터는 어떤 일을 하는 건가요?
모든 걸 다 합니다. 선수로도 활동하고요. 코칭도 합니다. 거기 있는 분들이 바라는 수준에 맞는 코칭을 해드려요. 구단 행정 업무에서도 필요한 도움을 드리고요. 스폰서십을 연결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지금은 제가 도와드리는 것보다 배우는 것 같아요. 가끔 경기를 하면 FC서울을 비롯해 제가 뛰었던 팀의 팬들이 찾아와서 응원도 해주세요. 최근에는 플래카드와 제 유니폼까지 걸어 놓으셔서 놀랐어요. 외국을 보면 높은 레벨의 리그에서 잘했던 선수들이 고향으로 돌아가 하부리그에서 생활축구 일원으로 뛰거나 운영진으로 참가하는 경우가 많아요. 그러면 그 선수의 팬들도 궁금해서 오죠. 그런 선순환 구조가 우리나라에서도 확장됐으면 좋겠습니다.
K5리그, K7리그의 잠재력이나 특징은 어떻다고 파악하고 있습니까?
안에 들어와 보니 그 나름의 분위기가 있더라고요. 일반 생활축구와 다른 진지한 준비 분위기가 있어요. 다만 시설 면에서 조금 더 좋은 축구를 하기 위한 개선이 필요할 테고요. 저희 성동은 홈인 살곶이체육공원 내 축구장 시설을 쓰는데, 구청장님이 상당히 신경 써 주셔서 선수들이 만족합니다. 서울시에 구가 상당히 많은데, 구마다 성동FC 투게더나 양천TNT FC처럼 구와 연계된 지역사회 팀이 자리 잡으면 그게 한국 축구 전체의 발전으로 이어지리라 봐요. 지역사회에서 중심이 되는 팀들이 역을 하면 승강제도 한층 다이내믹해질 거거든요. 이미 서울시와 각 구에는 체육시설이 상당히 구축돼 있기 때문에 그걸 조금만 개보수해서 활용하는 건 어렵지 않을 거라 봅니다. 제가 선수로서 많은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그 부분에서 일정 역할을 하려고 생각합니다.
현재 다음 챕터를 위해 그리고 있는, 축구 선수를 졸업한 축구인 임상협의 가장 큰 꿈은 무엇입니까?
축구를 할 때 가장 행복했던 사람이라 팀이 이길 때의 행복을 넘어서는 쾌감이 제 인생에 또 있을까 싶어요. 그런 행복을 어떻게 다시 느낄지, 그 방법을 찾아가는 과정이에요. 결국 축구와 관련된 일을 하지 않을까요? 그게 지도자일지, 행정가일지, 방송인일지는 모르겠습니다. 제 인생은 결국 축구를 빼면 아무것도 아니니까요. 은퇴를 계획했다면 그 챕터를 여는 게 더 빠르고 정확했을 거지만 제가 3월을 앞두고 은퇴를 하다 보니 그 부분의 타이밍이 좀 늦었어요. 그래서 지금은 제가 행복할 수 있는 일을 찾아가는 단계입니다. 성동FC 투게더의 디렉터처럼 한국 축구의 저변을 위해 가치 있는 경험도 하고 있고요. 결국 그 답을 곧 찾지 않을까 싶습니다. 새로운 답을 찾고 그 길로 나아갈 때도 많은 응원 부탁드립니다.
* 이 글은 KFA 기술리포트&매거진 ONSIDE 9월호 ‘INTERVIEW’ 코너에 실린 기사입니다.
글=서호정
사진=이연수, FAphotos, 한국프로축구연맹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