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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로 본프로야구]최고의 옆구리투수,박충식

작성자최강삼성(김재일)|작성시간05.06.24|조회수115 목록 댓글 1

정말 대단했다. 막강 타선은 아니었지만 한 번 폭발하면 걷잡을 수 없었던 해태의 타선을 24살의 신인이 싱커로 잠재웠다. 더군다나 당시 시즌 최저 방어율을 기록하며 당대 최고투수 선동열 선수을 상대로 주눅 들지 않는 강심장을 선보인 것이다. 만약 삼성 타자들의 방망이가 연장 15회까지 허공을 가르지만 않았더라면 번번이 해태의 수비수들에게 걸려 무승부로 끝나지만 않았더라면 그는 최후의 승리자가 되었을 것이다.

아직도 프로야구의 명승부를 꼽을 때 어김없이 등장하는 93년 한국시리즈 3차전. 그 중심에 있었던 90년대 최고의 옆구리 투수 박충식 선수를 소개한다.


이종범에 밀려 삼성에 입단하다


아시다시피 박충식 선수는 광주상고를 나온 광주출신의 선수였다. 아마야구 때부터 국가대표로 선발되면서 당장 프로에서도 통할 것으로 평가받던 그였다. 하지만 93년 1차 지명에서 연고지 팀이었던 해태가 국가대표 유격수 이종범 선수를 지명했고 고향은 아니지만 전라도 연고지 팀이었던 쌍방울마저도 언더핸드 투수 성영재 선수를 지명하고 만다. 그는 결국 빼어난 기량에도 불구하고 2차 지명으로 밀리게 말았다. 바꿔말하자만 당시 이 세 선수를 놓고 많은 고민을 해야했던 해태와 쌍방울의 고충 또한 이해가 가는 부분이다. 한편으로는 만약 쌍방울이 이종범 선수를 지명하고 박충식 선수가 해태로 성영재 선수가 삼성으로 지명이 되었다면 당시 프로야구 판도가 어떻게 바뀌었을까 하고 생각해보기도 한다.  

2차 지명으로 밀린 그는 김성길, 신경식 두 선수를 쌍방울에 트레이드하여 얻은 2차 상위 지명권을 보유한 삼성에 입단하게 된다. 수많은 신인선수 농사에서 많은 실패를 경험한 삼성이 모험이라면 모험일 수도 있는 선택이었다. 하지만 후에는 탁월한 선택임을 증명하게 된다.


한국시리즈 15회 완투, 일약 전국구로 거듭나다


앞서 언급했듯이 93년은 삼성에게 정말 대단한 한 해였다. 그때처럼 신구조화가 완벽하게 이루어졌던 삼성은 과거에도 그리고 지금까지도 없었다고 자부한다. 

개막전부터 김상엽-김태한 선수에 이어 3선발로 낙점이 된 박충식이 아마 때와 마찬가지로 뛰어난 활약을 보이며 강력한 원-투-쓰리 펀치를 형성한다. 특히 돋보이는 것은 그의 완투 능력이었는데 신인임에도 불구하고 7완투 2완봉으로 마치 김시진 선수와 같은 데뷔 초 강력한 완투형 투수의 모습을 보인다. 

그리고 맞이한 한국시리즈 3차전. 비록 에이스인 김상엽 선수가 첫 경기를 내줬지만 2차전에서 김태한 선수가 그 때까지 단 6명뿐이었던 한국시리즈 완봉승 선수 명단에 이름을 올린다. 덕분에 삼성은 당초 목표였던 1승 1패를 달성하고 대구에서 3차전을 맡게 된다. 당연히 3차전은 3선발인 박충식 선수의 선발 등판이었고 해태는 한국시리즈에 강한 문희수 선수가 선발을 맡게 된다. 그리고 이 때부터 “강심장” 박충식 선수의 신화가 시작된다.

해태는 6회 1-1 동점 상황에서 당시 구원과 방어율 신기록을 세운 선동열 선수를 투입하는 초강수를 둔다. 아마 신인 선수가 최고의 선수와 맞붙으며 오는 심리적 압박감을 노린 수로 보였다. 하지만 박충식은 그 기대를 무참히 깨버린다. 여전히 구위는 대단했고 오히려 회를 거듭할수록 싱커의 위력은 더해져만 갔다. 7회들어서는 반대로 선동열 선수가 1점을 내주며 2-1 패전의 위기까지 몰리게 된다. 하지만 박충식 선수 역시 8회초 한 점을 내주고 2-2 상황에서 연장전으로 돌입하게 된다. 

10회초 투구수가 100개가 넘긴 선동열 선수 대신 '마당쇠' 송유석 선수가 투입된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삼성 마운드는 박충식 선수가 홀로 지키고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끝난 한국시리즈 3차전 2-2 무승부. 결국 많은 사람들의 기대와는 달리 팽팽했던 경기는 끝까지 결판이 나지 않았고 사상 초유의 한국시리즈 15회 경기는 그렇게 막을 내렸다. 하지만 이 경기를 통해 박충식은 일약 전국구 스타로 거듭나게 된다.

이후 그는 이 경기의 후유증 탓인지 다음 등판한 경기에서 부진을 거듭하고 만다. 그리고 팀 또한 그해의 한국시리즈를 해태에게 내주고 만다.


혹자들은 구단에서 강요한 한국시리즈 15회 완투가 그의 선수생활을 단축시켰다고 한다. 하지만 다음 해의 스탯을 보더라도 그 경기가 박충식 선수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고는 할 수 없다. 물론 당시 믿을만한 투수가 없었던 삼성으로써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지만 오히려 본인의 강한 승부 근성이 자신을 마운드에 서게 한 요인이었을 것이다. 실제로 이미 수차례 권영호 투수 코치가 마운드에 올라왔었고 그 때마다 권 코치는 몇 마디 던지고는 그대로 마운드를 내려갔다. 그 때의 권 코치의 심정과 팬들의 심정은 다를 바 없었을 것이다. 그가 내려오지 않고 승리를 따내기를 바라는 마음. 바로 그것이었을 것이다. 이 경기는 그에게 실보다는 더욱 자신감을 갖게 되었던 득이 더 컸을 것이다.




무너진 삼성 마운드의 희망


93년의 영광과 달리 94년은 삼성에게 기억하고 싶지 않은 시즌일 것이다. 처음으로 5위라는 참담한 성적표를 받아 쥐면서 가을잔치에 초대되지 못한 아픔을 겪었기 때문이다. 93년 주축이 된 김성래, 강기웅 선수 등 노장 선수들이 줄줄히 부상으로 낙마한게 그 원인이었다. 하지만 박충식 만큼은 마운드에서 성준 선수와 함께 팀내 최다인 14승을 거두며 대단한 활약을 한다. 김상엽 선수가 단 2승에 그치면서 그가 에이스 역할을 대신한 것이다. 특히 그는 13완투에 3완봉승을 거두며 무려 203이닝을 던지는 철완을 과시하기도 했다. 또한 많은 이닝수에도 불구하고 2.34에 불과한 방어율은 그를 정상급 투수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95년에는 방위 복무라는 핸디캡에도 불구하고 19경기 9승 6패 방어율 3.16이라는 빼어난 성적을 거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무너진 마운드는 좀처럼 일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김상엽 선수가 부활하기는 했지만 대체 투수가 부족했다. 기대를 걸었던 최한경, 김인철, 곽채진, 안윤호 등의 선수들이 기대에 못 미치는 활약을 보였기 때문이다. 삼성은 김상엽, 박충식, 김태한으로만 야구한다는 악평까지 쏟아질 정도였다. 결국 95년 역시 삼성은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2년 연속 5위라는 늪에 빠지게 된다.


백인천 감독이 취임한 96년. 마운드 보강이 절실했던 삼성은 전병호, 최재호, 박태순, 최창양, 김헌수 선수 등 투수를 영입하는데만 무려 15억이 넘는 돈을 쏟아 붓는다. 하지만 당시 계약한 선수 중 아직까지 활약하고 있는 선수가 전병호 선수 한 명이라는 점으로 볼 때 이 스카웃은 실패로 보는 편이 맞다. 

한편 팀의 리빌딩 작업을 진행중이던 백인천 감독은 기존의 주전 선수들을 배제하고 김한수, 김태균, 최익성, 신동주, 이승엽, 박석진 선수 등 젊은 선수들을 중용하기에 이른다. 이렇게 삼성에게는 중요한 전환점이라고 할 수 있는 96년이었지만 성적은 오히려 94, 95년보다 안 좋은 6위에 그친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도 박충식 선수는 부상으로 부진한 김태한, 김상엽 선수를 대신해 삼성 마운드의 중심축으로 활약한다. 

방위 복무중이었지만 선발-중간-마무리 할 것 없이 전천후로 등판 29경기 8승 2패 12세이브 방어율 2.01이라는 대단한 성적을 거둔 것이다. 출전이 가능했던 경기가 홈경기 63경기 인점을 감안하면 홈경기 때 두 경기 중 한 번 꼴로 등판한 셈이다. 만약 그마저 없었다면 삼성은 6위 자리마저도 위협받았을지 모른다.


 

에이스 본색, 그러나 부진으로 트레이드 되다


97년 삼성은 다시 백인천 감독의 지휘 아래 대단한 타선을 구축하는데 성공한다. 특히 중거리 타자에서 장거리 타자로 변신해 홈런왕을 차지한 이승엽 선수의 등장은 명가재건에 탄력을 받는다. 특히 문제점으로 지적되던 기동력이 신동주, 최익성 선수의 등장으로 어느 정도 해소하게 되었다. 그리고 지속적으로 출장하던 김한수, 김태균, 정경배 선수도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타선에서의 리빌딩에 성공했지만 투타는 여전히 조화를 이루지 못했다.

물론 군복무를 마치고 본격적으로 합류한 박충식 선수는 그 해 역시 13승의 성적을 거두면서 삼성 마운드의 희망으로 군림했다. 하지만 선발 투수였던 박충식 선수와 김상엽 선수만 두 자리 승수를 거두었을 뿐 나머지 선수들은 여전히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마무리에서 김태한 선수가 활약하기는 했지만 이 때도 마운드에서는 세 선수로 야구한다는 비난은 피하기 어려웠다.


우즈 선수와 이승엽 선수의 홈런 신기록 대결로 열광했던 98년에도 그는 11승 10패라는 성적을 거둔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것이 그의 마지막 불꽃이었다. 이후 그는 99년 부상으로 단 3경기에만 출장했다. 2000년에는 부상으로 단 한 경기도 뛰지 못한다. 

이때 한국시리즈 우승에 목말라 있던 삼성은 2001년 김응용 감독의 영입으로 보다 공격적인 투자를 시작한다. 당시 약했던 베터리와 에이스급 투수의 보강을 위해 김동수, 이강철 을 영입한 것이다. 물론 10년 넘게 삼성 마운드의 에이스로 추앙받던 김상엽 선수 역시 보호 선수에서 제외되는 마당에 2년간 부진에 시달리던 박충식을 보상선수 명단에 넣어줄 삼성은  아니었다. 하지만 다행히 90년대를 대표하는 두 투수를 LG와 기아가 그냥 둘 리 없었다. 결국 박충식 선수는 이강철 선수의 보호 선수로 기아 유니폼을 입게 된다. 그가 광주팬들의 많은 지지를 받고 있는 것도 그를 지명하게 한 요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김상엽, 박충식 선수와 함께 90년대 삼성 마운드의 핵이었던 김태한 선수 역시 2002년 SK로 트레이드된다. 결국 라이온즈에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세 선수는 원 소속팀이 아닌 다른 팀에서 프로생활을 마감해야 했다.)


마지막 불꽃, 그리고 은퇴


기아 유니폼을 입은 그는 절치부심하여 선수생활의 마지막 불꽃을 태운다. 주로 중간계투로 나오며 2001년에는 3승 2패 3세이브, 2002년에는 5승 3패 8세이브 12홀드의 녹록치 않은 기량을 보여준다. 부상으로 2년간이나 신음했음에도 불구하고 기아의 명가재건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투수로 인정받은 것이다. 하지만 다시 불꽃을 피우며 다시 자리를 잡는가 했던 그는 2003년 팔꿈치 부상으로 전반기 단 한 차례도 1군 엔트리에 들지 못하는 결국 은퇴를 결심, 선수 생활을 마감하고 만다.


현재 그는 모든 생활을 접고 아내가 공부하고 있는 호주에서 생활하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현지에서 야구교실을 여는 등 아직도 야구에 대한 식지 않는 열정을 보이고 있다. 또한 당분간은 호주에서 생활하지만 본인은 야구인인 만큼 어떠한 형태로든 다시 야구계로 돌아올 것이라는 반가운 소식도 들을 수 있었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호주 생활을 빨리 정리하고 그가 코치로서 국내 프로야구에서 활약할 날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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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썬버드주장(정상봉) | 작성시간 05.06.24 좋은 게시물이네요. 스크랩 해갈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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