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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딩고' 김상엽, 포스트시즌의 추억

작성자(김병헌)민정아빠|작성시간09.02.24|조회수1,854 목록 댓글 1

2000년대 삼성의 에이스'는 배영수다. 그러나 1990년대만
해도 '만딩고' 김상엽이 삼성 마운드를 이끌었다. 현재 김상엽은
후진 양성을 위해 대구 영남대 투수코치로 일하고 있다
(사진=스포츠춘추)

10월 12일 대구구장에서 열린 준플레이오프 3차전에서 삼성이 롯데를 꺾으며 3전 전승으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다. 12년 연속 포스트시리즈 진출 팀답게 삼성은 시종일관 롯데를 압도했다. 그 가운데 '푸른 피의 에이스' 배영수의 공이 컸다. 1차전 선발로 나선 배영수는 롯데 타선을 5이닝 6피안타 3실점으로 막으며 "롯데에 비해 선발진이 약하다"는 야구전문가들의 예상을 뒤엎고 삼성에 첫 승을 안겼다.

12년 연속 포스트시리즈 진출의 출발점이 되는 1997년에도 그랬다. 당시 삼성은 이승엽, 양준혁, 신동주로 이어지는 중심타선의 맹활약으로 팀 타율 2할7푼7리, 팀 홈런 165개(이하 리그 1위)를 기록하며 리그 최강의 화력을 과시했다.

그러나 팀 방어율 4.23(리그 7위)에서 보듯 마운드는 형편없었다. 특히나 선발진이 골치였다. 선참 성준이 7승 7패 평균자책 3.31로 선발진을 이끌고 박충식과 전병호가 각각 13승 6패 평균자책 4.32, 10승 8패 평균자책 4.93으로 ‘10승 투수’반열에 올랐지만, 성준은 많은 이닝을 소화하지 못하고 박충식과 전병호는 평균자책이 4점대라는 게 문제였다.

당시 삼성이 믿을 선발투수라곤 12승 6패 평균자책 3.35를 기록한 '만딩고' 김상엽뿐이었다. 해태 선동열(삼성 감독)에 이어 프로야구 사상 최초로 연봉 1억 원을 돌파한 김상엽은 삼성의 실질적인 에이스였다. 그러나 준플레이오프와는 인연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게 1990, 1991, 1992년 준플레이오프에 3년 연속 출전해 총 10 2/3이닝을 던졌지만 무승 1패 평균자책 4.11을 기록했을 뿐이었다.

조창수 삼성 감독은 김성근(SK)감독이 이끄는 쌍방울 레이더스와의 준플레이오프 1차전을 앞두고 누굴 선발로 쓸 것인지 장고에 들어갔다. 이윽고 1차전 선발로 '김상엽'을 호명하는데.

준플레이오프 1차전 삼성 선발로 배영수가 출전해 팀에 첫 승을 안겼다. 역대 삼성의 강속구 투수 계보를 따지자면 당신에 이어 김진웅, 배영수 순인데. 공교롭게도 김진웅은 당신의 대구고, 배영수는 경복중 후배다.

(배)영수가 팔꿈치 인대 접합수술 뒤 고생을 많이 했다. 포스트시즌에선 에이스의 역할이 중요한데 영수가 제 몫을 다했다. 강속구 투수라…. 나와 영수는 투구 스타일이 좀 다르다. 난 체격 자체가 전형적인 파워피처 스타일이지만 영수는 한눈에 봐도 호리호리하다(웃음). 음, 김진웅은 글쎄.

많은 야구전문가들의 예상과 달리 준플레이오프는 삼성의 3연승으로 끝이 났다.

1차전 삼성이 이겼을 때 3차전에서 끝날 줄 알았다. 삼성에서 준플레이오프 준비를 잘한 까닭도 있지만 마무리 오승환이 버틴 중간계투진이 원체 강했다. 경기를 이래 보면 볼수록 삼성이 안 이기겠나 싶었다.

1997년 준플레이오프 삼성 승리의 주역

1997년 준플레이오프 쌍방울전에서 호투하고 있는 김상엽.
옆에 보이는 1루수가 이승엽이다(사진=삼성)

올시즌 삼성은 정규시즌 4위로 12년 연속 포스트시즌 진출이라는 대기록을 세웠다. 당신의 마지막 전성기라 할 수 있는 1997년이 대기록의 출발점이었다. 1997년 쌍방울과 맞붙은 준플레이오프 1차전 삼성 선발이 바로 당신이었다.

당시 삼성은 백인천 감독님이 시즌 중 물러나고 조창수 감독님이 팀을 이끌던 시절이었다. 상대팀 쌍방울 사령탑은 김성근 현 SK 감독님이었고. 내가 전반기는 좋지 않았지만 후반기 성적은 괜찮았다. 거기다 역대 준플레이오프 성적은 신통치 않았지만 플레이오프 성적이 좋았다. 이런 기록들을 바탕으로 조 감독이 날 1차전 선발로 기용하신 것 같다.

예상이 적중했다.

그때 준플레이오프는 3전 2선승제였다. 내가 2경기 가운데 한번은 선발, 한번은 구원으로 나가 2승을 거뒀다. 덕분에 시리즈 최우수선수(MVP)에 뽑혔다. 하지만 그러면 뭐 하나. 그해 한국시리즈에 진출도 못했는데(웃음).

당신의 현역기간 동안 삼성은 최고의 전력을 갖췄음에도 매번 한국시리즈에서 고배를 마셨다. 특히나 당신은 통산 준플레이오프 평균자책 2.66, 플레이오프 평균자책 2.25, 한국시리즈 평균자책 3.15를 기록하는 등 큰 경기에 강했지만 우승번지를 끼는 데는 번번이 실패했다.

1990년 LG와 치른 한국시리즈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1차전을 지고 2차전을 치를 때다. 내가 9회 2사 3루까지 1점만 내줘 삼성이 2-1로 LG를 앞서고 있었다. 한 타자만 잡으면 1승1패 동률을 이뤄 3, 4차전이 열리는 대구에서 끝장을 볼 수 있었다.

그 한 타자가 누구였나.

김영직 선배였다.

'영감' 김영직이라.

그때 내 필살기가 파워커브였다. 김 선배를 상대로 파워커브를 힘차게 뿌렸는데.

당시 당신의 파워커브를 공략할 수 있는 대한민국 타자는 많지 않았다.

나도 그때야 알았지만 그 가운데 김 선배가 있었다. 기다렸다는 듯 파워커브를 받아쳐 중전안타를 기록하지 뭔가. 결국 연장 11회말 밀어내기 볼넷으로 2-3 역전패를 당하고 말았다. 만약 삼성이 그 경기에서 이겼다면 3연승을 거두며 한국시리즈 우승기를 흔들 수 있었을 것이다.

LG도 LG지만 해태가 삼성에겐 거대한 장벽이었다. 지금도 1회초에는 해태 티셔츠를 1회말에는 삼성 티셔츠로 갈아입으며 양팀을 응원하던 <스포츠춘추>가 기억난다.

해태에는 선동열이라는 당대 최고의 투수가 있었다. 게다가 한국시리즈마다 적재적소에 문희수, 김정수 같은 영웅들이 튀어나왔다.

큰 경기를 앞두고 '해태가 삼성보다 준비를 더 많이 한 게 아니냐'는 지적도 있었다.

과거 일부에서 '삼성 선수들이 밤마다 술을 마시는 통에 해태에게 진 게 아니냐'는 소문을 냈는데 이 자리에서 말씀드리지만 절대 사실이 아니다. 되레 술을 많이 마시고 다닌 해태 같은 팀은 소문이 안 나더라(웃음). 그것보단 응집력의 차이였다고 본다. 팀워크는 양팀 다 좋았지만 큰 경기에서의 응집력에서 해태가 삼성보다 앞선 게 아니었나 싶다.

매번 해태에 지는 통에 한국시리즈마다 삼성이 엄청난 당근을 내걸며 우승을 독려했다고 들었다.

지금 돌아봐도 삼성은 정말 선수단 지원에 있어선 최고의 팀이었다. 한국시리즈에 진출할 때마다 일본에서 전문 마사지사를 불러 투수들을 돌보게 했다. 1996년 한국시리즈에 올랐을 때 구단 고위층에서 했던 말이 기억난다.

무슨 말이었나.

"해태를 이기고 우승만 하면 너희들이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고액의 보너스를 챙겨주겠다"고. 그러면 뭐하나. 해태한테 또 졌는데(웃음).

당시 삼성에 지금의 진갑용처럼 좋은 포수가 없었다면 사정이 달라지지 않았을까.

1990년대 삼성에는 노장 포수들이 많았다. 포수가 나이가 들면 블로킹, 송구 기량이 떨어지는 것과 동시에 캐치 능력도 저하되게 마련이다. 투수들이 엄청 예민하다. 공을 던졌을 때 포수 미트에서 '펑펑'소리가 나면 그렇게 신이 날 수 없다. 하지만 노장 포수들에겐 그런 걸 기대할 순 없다. (진)갑용이가 오기 전과 오고 나서의 삼성 팀 평균자책을 확인해 보라. 큰 차이가 있을 거다.

무엇보다 역대 삼성 포수 가운데 강견이 없었다는 건 크나큰 아쉬움이었다.

1993년 해태와 한국시리즈에서 만났다. 2승1무1패로 삼성이 앞서고 있었다. 속으로 '이번엔 해태를 잡겠다'싶었다. 그런데 이게 웬걸. 내리 3경기를 내주고 말았다. 이유가 뭔지 아나. 당시 이종범이 안방 드나들 듯 도루를 해도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한국시리즈에서 도루를 7개나 성공시키는 동안 아웃이 1개도 없었으니 말 다한 거 아닌가(웃음).

야구의 시작

대구고 시절의 김상엽

야구보다 유도를 먼저 시작했다.

그렇다. 초등학교 5학년 때까지는 유도선수였다. 김태한(현 삼성 투수코치)씨가 내 대구초등학교 선배다. 그 형이 동네야구를 참 잘했다. 내도 야구를 하고 싶은데 유도 때문에 아이들과 어울릴 수가 있어야지. 그래 아예 유도 그만두고 동네야구를 하다 야구부가 있는 경상중으로 진학했다.

경복중에서 대구고로 진학했다. 당시 야구 좀 한다는 선수들은 대구상고나 경북고로 진학하게 마련이었는데.

그때 경복중이 야구는 잘했어도 선수들 키가 다 고만고만했다. 내 빼고 거의가 150cm대였다. 우야겠노. 내가 대구고에 입학하는 조건으로 중학교 동기 8명을 데리고 갈 수밖에.

대구고의 에이스였다.

경복중 3학년 때부터 조금씩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왜냐? 내 혼자 다 던졌거든(웃음). 대구고에 진학해서도 똑같았다. 보자, 언제더라(기억을 더듬다가)맞네. 1987년. 그해 대붕기에서 내가 4경기 완투를 하면서 우승을 했다꼬. 그런데 4일 쉬고 나니까 감독님이 이번엔 봉황대기대회에 참가해야한다는 거라. 나갔지. 거기서도 4경기 모두 내가 던졌다.

혹사도 그런 혹사가 없는 셈이었다. 봉황대기대회 결과는 좋았나.

(고개를 흔들며)8강에서 천안북일고랑 맞붙었는데 그해 천안북일이 전국대회 3관왕을 했다. 좀 전력이 셌겠나. 지금도 천안북일 멤버가 눈에 선하다. 지연규, 지화선, 김정민 등 쟁쟁한 선수가 많았다. 그런 선수들을 상대로 가뜩이나 피곤한 상태에서도 잘 던졌다. 경기 중반까지 우리가 4-0으로 이기고 있었으니까. 아, 그런데.

그런데?

그날 포수 사인이 안 보일 정도로 비가 억수로 쏟아졌다. 포수가 한번 일어나면 직구, 두 번 일어나면 변화구를 던지는 식으로 사인을 주고받았다(웃음). 갑자기 무너졌다기보다 계속 누적된 피로와 악천후가 불리하게 작용했다. 아쉽게 천안북일에 지면서 전국대회 우승 꿈도 사라졌다. 그때 알았어야 했다. (혼잣말로 중얼거리며)내랑 우승이랑은 인연이 없다는 걸….

‘초고교급 대어’로 불리며 삼성에 입단했다. 당시만 해도 프로보다는 대학 진학을 선택하는 선수들이 많았는데.

사실 삼성 입단 전에 연세대에 진학하기로 도장까지 찍은 상태였다. 그런데 삼성이 참 집요할 정도로 내를 스카우트하려고 애를 썼다. 아버지가 결국 삼성 스카우트 설득에 넘어가고 내도 프로에 대한 꿈과 로망이 있었기 때문에 대학은 뒤로 미루고 프로에 발을 들였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 대학에 갔어도 좋지 않았을까 싶다.

1989년 계약금 1천500만 원, 연봉 1천200만 원을 받고 삼성에 입단했다. 그해 삼성 고졸 신인 가운데 최고 몸값이었다.

당시 ‘아마추어 넘버 1’이었던 강기웅 선배가 2천500만 원인가를 받고 삼성 유니폼을 입었다.(주:3천200만 원) 그것과 비교하면 분명 적은 돈이 아니었다.

그때 삼성엔 입이 쫙 벌어질 만큼 대단한 스타들이 많았다.

입단예정 신인들도 기존 선수들과 함께 훈련했다. 그때 2달가량 김시진 선배와 웨이트트레이닝을 같이 한 게 기억난다. 뭐 선배들 보면 숨도 제대로 못 쉴 지경이었지. 그런데 희한하게 내가 정식 입단할 즈음이 되니까 박영길 감독님은 해임되시고 장효조, 김시진, 오대석 선배는 롯데로 가셨다.

강속구와 파워커브로 승승장구한 20살 에이스

1990년 20살의 김상엽. 삼성의 10년을 이끌 투수로 예상됐던 그는
당시 대구 경북지역의 꿈나무들에겐 우상이었다(사진=삼성)

1989년 4월 8일 사직 롯데전이 데뷔 무대였다.

아마 그 경기가 그해 개막전이었을 거다. 원래는 선발로 내정돼 있었다. 하지만 코치진이 “어린 선수가 개막전 선발로 등판해 자칫 부진하면 사기가 떨어질 수 있다”고 만류해 진동한 선배가 선발로 나섰다. 그런데 진 선배가 2회를 채우지 못하고 물러났다. 이후 이문한 선배가 던지다 내가 4회 바턴을 이어받았다.

데뷔 첫 승을 구원승으로 따냈다는 뜻인데.

(손을 흔들며)그게 아이다. 내가 마운드에 올랐을 때만 해도 삼성이 롯데를 4-1로 이기고 있었다. 중간에 내가 1실점했어도 8회까지 4-2로 앞섰다. 그런데 8회 2사 2, 3루에서 롯데 타자의 타구가 3루수 실책으로 연결되며 졸지에 4-4 동점이 됐다. 결국 9회 오대석 선배에게 3루타를 맞고 장효조 선배에게 끝내기 안타를 맞으며 데뷔 첫 경기를 패전으로 장식했다. 졸지에 삼성 출신 롯데 선수들한테 등을 찔린 거다(웃음). 만약 그때 이겼더라면 상승세를 타며 신인왕까지 도전했을 거다.

실제 데뷔 첫 승도 아슬아슬했다.

그해 여름이었을 거다. 역시 상대팀은 롯데였다. 9회까지 1-0으로 롯데 타선을 완봉으로 막고 있었다. 2아웃을 잡고 나니까 내야 선배들이 몰려와 장난을 치기 시작했다. 3루수였던 김용국 선배가 좀 농담을 잘 하시나. “상엽아, 니 최연소 완투 완봉이면 KBO(한국야구위원회)에서 각각 100만 원 씩 총 200만 원을 상금으로 주는 거 알제. 잘 던지래이”하는데 이거 갑자기 신경이 쓰이기 시작하면서 죽겠지 뭔가. 딱 한 타자만 잡으면 돈이 200만 원인데.

그 한 타자를 잡기 어려운 게 야구 아닌가.

맞다. 연속 볼넷을 허용하며 1, 2루 위기를 맞았다. 정동진 감독이 뛰어올라와 “이기, 지금 뭐 하자는 플레이가?”하며 흥분하셨다.

화가 많이 난 모양이다.

그게 아니라 젊은 녀석이 혹여 사기라도 떨어질까 걱정하셨던 거다. 정 감독님이 등번호도 직접 달아주실 만큼 날 아끼셨다. 등번호 이야기가 나와서 하는 말인데 난 원래 47번을 달고 싶었다. 그런데 정 감독님이 과거 요미우리 자이언츠 투수 에가와 스구루를 좋아하셨던 모양이다. 에가와 등번호가 30번이었다. “에가와처럼 좋은 투수가 되라”며 박동경 선배의 등번호 30번을 빼앗아 내게 주셨다.

결국 한 타자는 어떻게 됐나.

마무리 투수 권영호(현 영남대 감독)선배가 올라왔다. 롯데 마지막 타자가 권 선배의 초구를 기다렸던 모양이다. “딱!”하고 소리가 나는데 정말 타구가 장난 아니게 잘 맞았다. 그런데 세상에 (김)용국이형이 그림 같은 다이밍 캐치로 잡지 뭔가. 그렇게 프로 데뷔 첫 승을 따내며 그해 3승을 거뒀다.

다음해인 1990년 12승 6패 18세이브를 기록하며 삼성의 에이스로 불리기 시작했다.

그땐 정말 멋모르고 던졌다. 코칭스태프가 나가라면 그냥 나갈 뿐이었다. 더블헤더 낮 경기에 선발로 나간 뒤 밤 경기에 마무리로 뛴 적도 있었으니까.

삼성 구단 사상 시속 150km를 자유자재로 던진 강속구 투수는 당신이 처음이지 싶다.

원래 직구가 빨라야 시속 147km 정도였다. 그런데 1993년 (주:8월 26일 인천 태평양전)무사사구 완봉을 거둘 때 분석지를 보고 깜짝 놀랐다.

왜 놀랐나.

시속 150km 이상의 강속구가 수도 없이 찍혀 있었다. 다른 사람은 둘째 치고 내가 가장 놀랐다. 그런데 희한하게 그날 이후 시속 150km 이상의 강속구를 자주 던졌다. 아,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1995년 미국 베로비치 다저캠프에 갔을 때 피터 오말리 당시 LA 다저스 구단주가 내 공을 보고 “니 몇 키로나 나가노”하고 물었다. 오말리 구단주를 보면서 내 ‘딱’ 한마디만 했다.

뭐라고 했나.

“150.”

시속 150km?

(고개를 끄덕이며)오말리 구단주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니 뭐라캤노. 150? 진짜가?”하고 물었다. 그래 다시 뻣뻣한 자세로 “150”하고 대답했다(웃음). 그때 시속 150km는 택도 없었지만 어디 강속구 투수의 자존심이란 게 그런가.

흔히 ‘시속 150km 이상의 강속구 투수는 타고 난다’고 하지 않나.

일단 운동을 많이 한다고 시속 150km 던질 수 있는 건 아니니까 타고 난다는 게 맞는 소리일 수 있다. 하지만 시속 143, 144km 던지는 투수들도 가능한 게 시속 150km 강속구다. 어째서 그런지 아나.

특별한 투구폼이라도 있나.

(손을 흔든 뒤 자세를 바로잡으며)자신감이다. KIA 윤석민을 봐라. 데뷔 뒤 성적이 나기 시작하면서 시속 150km가 넘는 강속구에 투구도 한층 성숙해졌지 않나. 아무리 좋은 투수도 1군에서 기회를 잡지 못하면 흔들리게 마련이고 2군으로 내려와 허송세월을 보내면 은퇴로 연결될 뿐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강속구 투수는 자신의 의지와 주위의 믿음이 결합돼 탄생하는 게 아닐까 싶다.

김상엽이 직접 파워커브 그립을 쥐었다. 실밥 두 줄을 모두 잡고
던지는 김상엽의 파워커브는 웬만한 투수들의 직구보다 빨랐다
(사진=스포츠춘추)

당신이 에이스가 된 배경 가운데 파워커브도 큰 몫을 담당했다. 한국야구사에서 당신의 파워커브는 명품 변화구로 인정받고 있다.

사실 내가 슬라이더를 못 던졌다. 고교 때도 슬라이더를 던지지 못해 주로 커브를 던졌다. 1990년 마티 디메리트가 삼성 투수코치로 오면서 그에게 파워커브를 배웠다.

당신의 파워커브는 실밥 두 줄을 모두 잡고 던지는 이른바 '2줄 커브'였다.

나도 처음 마티 코치의 파워커브 그립을 보며 '이기 미친나'했다(웃음). 하지만 계속 던지다보니까 확실히 달랐다. 손가락을 실밥 한쪽에만 걸쳐 던지는 일반적인 커브보다 타자 앞에서 빨리 떨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실제로 한창 때 파워커브가 웬만한 투수의 직구와 맞먹는 시속 130km 중반까지 나오지 않았나. 무엇보다 마티 코치가 지금 롯데의 제리 로이스터 감독처럼 옆에서 계속 '잘한다'하니까 자신감이 붙어 더 잘 던질 수 있었다.

1993년 13승 6패 8세이브 170탈삼진을 거두며 해태 선동열을 탈삼진 6개 차로 제치고 대망의 탈삼진왕에 올랐다. 처음이자 마지막 개인 타이틀 수상이었다.

당시 선동열 선배는 '국보급' 투수였다. 그분의 그림자만 밟아도 영광이던 시절이었다. 아무리 내가 잘했어도 선 선배와 맞대결을 펼칠 때는 속으로 '내 할 일만 하고 나오자'하는 마음가짐이었다. 내가 이기고 싶다고 이길 수 있는 경기가 아니었다.

짙어지는 그림자, 부상과 스티브 블래스 증후군

1992년에는 권영호의 은퇴로 공백이 된 마무리 투수를 맡기도 했다. 당신이 비운 선발자리는 이태일이 13승 7패를 기록하며 훌륭하게 메웠는데.

(이)태일이형은 나보다 1년 늦게 입단했다. 데뷔 첫해 초반에 8패를 하다가 후반기 서울에서 첫 승을 따낸 뒤 11연승인가를 거뒀을 거다.

이태일은 삼성 구단 최초의 노히트노런 투수였다. 요즘도 연락이 되나.

한동안 소를 키우셨는데 요즘은 뭐 하시는지 잘 모르겠다. 내가 23살 때 그 형한테 술을 배우지 않았나(웃음). 이름이 비슷하신 한분은 내가 미국에서 어렵게 운동하고 있을 때 밥을 사주시면서 격려해 주셨는데.

'천하의 김상엽'이 23살 때 술을 배웠다라.

고교 때 친구들은 술, 담배를 다했어도 내는 남들이 들으면 웃을지 모르지만 담배는 고사하고 술도 진짜로 입 근처에도 안댔다. 합숙을 해도 자정이 넘어 자 본 적이 없다. 늘 일찍 자고 다음날 일찍 일어나 운동하는 것만 신경 썼다. 프로에 들어와서도 초반까지는 그랬다.

세상은 그런 당신을 색안경을 끼고 바라봤다. 1990년 화려한 시즌을 보냈지만 다음해 성적이 곤두박질 쳤다. 발목부상이 원인이었지만 이때 "자기관리에 실패해 부상을 입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만감이 교차하는 듯)그때 기억이 새록새록 난다. 1990년 성적도 좋았지만 공이 시속 150km가 나오는 등 몸 컨디션이 절정이었다. 그해 시즌 종료 뒤 정동진 감독님이 떠나시고 김성근 감독님이 부임하셨다. 당신도 잘 알겠지만 김 감독님이 운동을 좀 많이 시키나. 그런데 내는 괜찮겠나 싶으셨던지 훈련을 많이 안 시키셨다. 제주도로 훈련을 갔는데 내를 잘 보셨는지 1, 2군을 왔다 갔다 하는 입단동기를 룸메이트로 배정해주셨다. (묘한 표정을 지으며)난 지금도 글마 때문에 야구인생을 망쳤다고 생각한다.

그 친구가 당신을 못 살게 굴었나.

인마가 밤만 되면 술을 마시고 들어오는 기라. 내? 술 같은 소리한다. 내는 진짜로 그때는 술을 입에 한 방울도 안 댔다니까. 그냥 훈련만 끝나면 곪아 떨어져 자는 게 제일 좋았다꼬. 하루는 인마가 또 술을 마시고 자정이 넘어 귀소한기라. 그런데 이 자슥이.

싸우기라도 했나.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인마가 이불에 가려져 있으니까 내 다리를 못 보고 그냥 밟은 거다. 아킬레스건을 받치는 연골이 죄다 끊어져 4개월간 기브스를 해야 했다. 와, 그때 생각하면 진짜 지금도 눈이 디비진다.

1991년 부상 탓인지 6승 6패 7세이브로 전해에 비해 성적이 뚝 떨어졌다.

4월 3일 기브스를 풀고 4월 5일 개막전에 출전했다. 전반기 2달까지는 그런대로 할 만했는데 겨울에 운동을 제대로 못해놓으니까 더워질수록 구속이 떨어졌다. 그때 굉장히 고민을 많이 했다.

고민은 많이 했지만 다음해 성적도 8승 12패 15세이브로 1990년과는 거리가 멀었다.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다가)야구선수에게 가장 무서운 병이 뭔지 아나. ('모르겠다'고 하자)고민이다. 야구선수가 고민에 빠지기 시작하면 결국 자신감이 사라진다. 왜 그 뉴욕 양키스 전 2루수 척 노블락이 걸렸던 '송구 못하는 병' 있지 않나.

'스티브 블래스 증후군' 말인가.

(고개를 끄덕이며)내가 그 병을 앓았다. 김성근 감독님도 기억하실 거다. 하루는 잠실구장에서 선발로 나와 공을 던졌는데 거짓말처럼 공이 사라졌다.

그게 무슨 뜻인가. 공이 사라지다니.

포수 미트에도 공이 없고 타자도 친 적이 없는데 공이 사라진 거다.

혹시.

(한숨을 내쉬며)맞다. 오른손에 공이 그대로 있었다. 공을 던진다고 힘껏 던졌는데 공이 손에서 빠져나가질 않은 거다. 생전 처음 경험하는 일이었다. 그때 어찌나 자괴감이 들던지…. 내가 이래선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드는데 그날 이후 정말 열심히 운동했다.

2008년 김상엽(사진 좌)과 1999년의 김상엽. 인생에서 가장 무서운 타자는 '세월'이다

맹훈련 덕분인지 1993년 13승 6패 8세이브 평균자책 2.58로 화려하게 부활했다. 하지만 1994년 2승 2패 평균자책 4.74로 다시 부진에 빠지며 '격년제 에이스'란 소릴 들었다.

1994년 6월부터 아프기 시작한 허리가 문제였다. 그해 24 2/3이닝 밖에 소화하지 못했다.

어쩌다 허리를 다친 건가. 항간에는 훈련을 게을리 했기 때문이라는 볼멘소리가 있었는데.

1991년인가 경산 훈련장에 숙소(필승관)을 짓는데 웨이트트레이닝기구를 죄다 선수들이 옮겨야 했다. 신인 때라 무거워도 무겁다고 말을 할 수 있나. '꾹' 참고 나르다 방심한 순간 허리를 삐끗했다. 1, 2달가량 아팠는데 어느 시점이 되니까 괜찮아졌다. 하지만 그 다음 겨울부터는 조금씩 허리통증이 길어져 어느 날부터는 1년 내내 아팠다.

'허리부상'이야말로 투수에겐 최대 적이다.

1989년 데뷔 때는 보폭이 여섯 발에서 일곱 발이었다. 하지만 허리가 아프면서부터 다섯 발로 줄더니 어느 날 보니까 내가 서서 던지고 있었다. 허리가 아프니까 몸을 당최 낮출 수가 없었다.

자신이 스타인지 몰랐던 스타

김상엽은 자신이 얼마나 대단한 스타인지 몰랐다. 만약 그가
그걸 알았다면 한국야구사는 다시 쓰여졌을지 모른다(사진=삼성)

1990년 대구매일신문은 당신을 가리켜 '제2의 선동열'이라는 수식어를 쓰며 '삼성의 10년을 이끌 차세대 에이스'로 평가했다.

1995년까지만 해도 억대연봉은 선동열 선배가 유일했다. 그 이후 첫 억대연봉자가 된 이가 바로 나였다.(주:1996년)지금이야 박진만, 심정수(이하 삼성)등 몇 십억 원씩 받는 선수들이 수두룩하지만 그땐 어디 그랬나.

하지만 당신은 선동열과는 다른 이미지로 야구계에 알려졌다.

내가 왜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는지 모르지만….(깊은 한숨을 내쉬며)난…난 스스로를 최고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당신이 너무 어린 나이에 스타가 된 게 이유라면 이유일지 몰랐다.

(눈을 감은 채로)한창 전성기 때 대구 동성로를 추리닝 바람으로 돌아다녔다. 그날 경기가 끝나면 새벽 1, 2시까지 시내를 거리낌 없이 돌아다니기 일쑤였다. 그래도 그게 잘못된 것인지 몰랐다. 사람들의 주목을 한 몸에 받는 스타라면 격을 갖춰 행동했어야 하는데 그때 난 누가 보거나 말거나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뭐 그때 내가 프랜차이즈 스타이기나 했겠냐마는.

무슨 소린가. 당신은 당시 대구· 경북의 프랜차이즈 스타였다. 세상 사람들은 다 아는데 당신만 모르고 있을 뿐이었다.

….

삼성에서 당신을 스타로 키우려 무진 애를 썼다.

옛날 제일모직 빌트모아 CF 기억나나.(고개를 끄덕이자) 당시 모델이 나였다. 삼성에서 그렇게 밀어줬는데, 그 옛날 내를 그리 밀어줬는데….(주:1992년 6월3일자 주간야구엔 김상엽이 삼성전자 해외법인 SEJ 냉장고 잡지모델에 뽑혔다는 기사가 실려 있다)

당신의 사소한 부주의가 좋지 않은 이미지를 만들었고 사실과 다른 소문을 키웠다.

그때 알았어야 했다. 내가 삼성의 에이스이고 대한민국 최고 투수 가운데 한명이란 걸 정말 알았어야 했다. 당시 날 좋아하던 팬들을 지금 만나면 죄송할 뿐이다. 너무 방심하며 살았다.

유명선수에겐 이른바 '스폰'이 꼬이게 마련이다. 당신도 예외는 아니었을 것 같다.

(입맛을 다시며)왜 없었겠나. 요즘도 이래 보면 선수뿐만 아니라 지도자에게도 '스폰'이 달려든다. 화가 나는 건 내 현역 때 '스폰'하던 이들이 지금도 똑같은 짓을 한다는 거다. 한번은 그이 보고 "쇼핑하지 마라. 차라리 그 돈으로 선수들 글러브를 선물하라"고 충고하기도 했다.

쇼핑?

그이들은 백화점에서 쇼핑을 하듯 선수들을 골라내 술을 사주면서 친분을 과시하는 걸 낙으로 삼는다. 돈이 없어야 쇼핑을 멈추지 돈 있을 동안에는 수시로 선수들을 바꿔가며 그렇게 살 사람들이다. 혹여 선수가 2군이라도 내려가 봐라. 한 두 번은 밥이라도 사주겠지만 더 부진하다 싶으면 다른 선수로 말을 갈아탄다. 그걸 선수들도 알아야 한다.

혹여 젊은 날의 방황으로 후회되는 것이 있다면 야구 말고 무엇이 있나.

그 많던 친구들은 다 사라지고 이제 2, 3명밖에 남지 않았다. 살면서 가장 후회되는 건 좋은 친구를 많이 사귀지 못했다는 것이다.

에이스의 몰락

1999년 허리부상 이후 재활 중인 김상엽. 10년 전 삼성의
에이스 고지를 향해 달렸던 그는 10년 뒤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가운데 LG로 트레이드는 추락을 맛봤다(사진=삼성)

1999년 12월 LG로 이적했다. 공교롭게도 며칠 간격으로 한때 삼성을 대표하던 에이스 2명이 팀에서 밀려났는데.

그해 11월 28일 (박)충식이가 이강철(해태)선배의 삼성 이적에 따른 보상선수로 해태로 떠났다. 나도 며칠 있다가 삼성과 계약한 김동수(LG)선배의 보상선수로 LG유니폼으로 바꿔 입었다.

LG로 이적한 뒤 일본 스프링캠프 때 좋은 소식이 들렸다.

거기서 시속 140km중반까지 구속이 나왔을 거다. 주니치 드래건스와 연습경기에서 무척 잘 던졌다. 그때 잠시 롱토스를 잘못 해 어깨가 아프긴 했지만 귀국 뒤 호전돼 해볼만 하다는 생각을 했다.

2000년 4월 9일 잠실 삼성전에 선발로 출전했다.

1999년 한해 푹 쉰 터라 2년 만의 실전이었다. 게다가 상대팀이 친정이다 보니까 많이 긴장했다. 1회 1사 주자 1, 3루 위기에 몰렸는데 마침 삼성 4번 타자가 이승엽이었다. '이걸 어떻게 처리하나' 고민하다가 싱커를 던졌는데 (이)승엽이가 "딱!" 친 공이 운 좋게 글러브 안으로 들어왔다. 당연히 병살로 이어져야 했는데.

실패했나.

공을 잡자마자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지만 3루 한번 보고 2루도 한번 보고, 그 다음에 1루로 던졌다. 당연히 세이프지.

병살기회가 무산된 뒤 훌리오 프랑코와 찰스 스미스의 각각 희생플라이와 2루타를 맞으며 2점을 내줬다. 결국 3회 4실점한 뒤 마운드에서 내려왔다.

그 경기 마치고 한화전에 한 번 더 출전했다. 이번에도 잘 던지다 제이 데이비스에게 역전 홈런을 맞았다. (씁쓸한 미소를 짓다가)그즈음 팔꿈치가 참을 수 없을 만큼 아팠다. 결국 그해 6월(주:13일) 오른쪽 팔꿈치 뼈 제거수술을 받았다.

1년간 재활했지만 이번에는 어깨에 이상이 온 것으로 알고 있다.

(담담한 표정으로)정규시즌이 시작될 즈음 어깨가 아파 병원에 갔더니 어깨인대가 늘어났다고 했다. 수술 뒤 1, 2년 꾸준히 재활하면 극복할 수 있다고 했는데 그 세월을 또 어떻게 참나 싶었다. LG에서도 나에 대한 미련이 별로 없어 보였고.

그래서 은퇴를 결심했나.

그즈음 시카고 화이트삭스에 계시던 이만수(SK)코치님께 이메일을 보냈다. 안부인사도 드릴 겸 조언을 듣고 싶었다.

답장이 왔나.

(고개를 끄덕이며)이 코치님이 “어깨수술하고 무조건 재활해서 복귀해”하고 말씀하셨다. 하지만 따르지 못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 이 코치님 말대로 했으면 어땠을까 후회도 된다.

최고의 지도자가 되고 싶다

영남대 투수코치로 활동 중인 김상엽. 자신의 성공과 실패를
거울 삼아 후배 선수들이 반성은 하되 후회없는 선수생활을
하길 바라고 있다(사진=스포츠춘추)

2001년 9월 LG에서 퇴단했다. 은퇴한 야구선수들의 말을 빌리자면 '구단 문을 나서는 순간 눈앞이 깜깜하다'고 하던데.

야구 그만 두고 구단을 나설 때만 해도 '더러운 세상. 내 야구 아니면 뭐 먹고 살게 없는 줄 아나'하고 호기를 부렸다. 그런데 막상 야구 그만두고 대구로 내려와 사회생활을 하려니까 그게 아니었다. 자살하는 사람들의 심정을 이해했을 정도라면 말 다한 거 아닌가.

당신 정도의 지명도라면 취직 정도는 쉽지 않나.

섬유공장을 경영하는 친구가 하루는 "니 놀면 뭐 하노. 부사장으로 와 가꼬 영업도 배우면서 제2의 인생을 살아보라"고 권유했다. 연봉도 7, 8천만 원 사이로 주겠다고 했는데 성의는 고맙지만 발이 그쪽으로 가질 않았다.

그래서 다시 야구계로 돌아왔나.

아니다. 한동안 야구를 의식적으로 피했다. 하루는 여자친구(지금의 아내)가 그러더라. "왜 당신은 야구했다는 사람이 사진이나 기념패가 아무 것도 없느냐"고. 창고에 집어넣었으니 있을 리가 있나. 하지만 야구는 마약이다.

야구는 마약이다? 음.

2003년 1월 권영호 영남대 감독님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현역 때 못한 걸 코치가 돼서 해보라"고.

현역 때 못한 것이라면 '우승'을 말하나.

그렇다. 고교 때는 전국대회, 프로가 돼서는 한국시리즈 우승을 향해 있는 힘을 다했지만 한 번도 우승을 경험해보지 못했다.

2004년 드디어 소원을 풀었다.

(환하게 웃으며)그해 대통령기 전국대학야구선수권대회에서 영남대가 우승을 차지했다.

이종욱(두산), 이재영(LG), 손승락(경찰청)등이 당신의 영남대 제자들 아닌가.

(손을 저으며)난 권 감독님 옆에서 보좌한 것 밖에 없다.

그러고 보면 한국프로야구 2천 안타 기록자들이 모두 영남대 출신이다.

맞다. 전준호, 양준혁 선배가 영남대 졸업생이다.

당신의 경험과 인생의 교훈이 제자들에게 유효할 수도 있을 텐데.

음, 그 친구들에게 그런 말을 자주 들려줬다.

어떤.

"네가 최고라고 생각하라"고. "누가 뭐래도 네가 최고"라고. 다행히 그 친구들은 성격이 밝아 모두 그렇게들 생각하고 있었다(웃음).

'명선수 출신이 명감독 되는 게 힘들다'고 하지 않나.

나도 처음엔 그랬다. 선수가 지도에 따라오지 못하면 대뜸 "니는 와 이것도 몬하나"하고 채근 먼저 했다. 하지만 지금은 잘 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고 가능한 선수들과 대화를 많이 나누려 한다. 기회가 되면 해외로 코치연수를 다녀오고 싶다.

당신의 파워커브를 이제는 제자들을 통해 봐야할 것 같다.

후배들에게 가르치곤 있는데 그립이나 투구 메커니즘을 익히는 걸 무척 힘들어 한다.

야구와 화해한 뒤 창고에 보관했던 사진과 기념품은 어떻게 했나.

지금은 잘 닦아서 거실에 진열했다(웃음). 이유가 있다. 아이들 때문이다. 4살(민성), 2살(시우)짜리 아들만 둘이다. 아이들에게 아빠가 얼마나 야구를 사랑했는지 보여주고 싶었다.

이름 : 김상엽(金相燁)
생년월일 : 1970년 05월 11일
체격 : 187cm / 95kg
이력 : 대구고-삼성-LG-영남대 코치
프로입단 : 1989년
통산성적 : 78승 56패 49세이브 752탈삼진
경력 : 1987년 대붕기 최우수선수상
1993년 탈삼진왕
1997년 올해의 재기상
1997년 준플레이오프 MV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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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열기회장(홍인표) 작성시간 09.04.26 그렇다면 김태한 코치가 수창초등학교를 졸업한 우리 선배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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