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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작품

[스크랩] 펌) 고진오

작성자맘비니이성주|작성시간16.06.30|조회수110 목록 댓글 0

전시기간 : 2010.11.27-12.7

전시장소 : 부평 구올담 갤러리

인천시 부평구 부평동 185-1(032-528-6030)

 

 

변주되는 사유의 흔적들

-고진오의 회화를 바라보는 하나의 시각-

                                                                                                          박황재형(시각이미지비평가, 작가)

 

 오마주와 패러디를 중심으로 만들어지는 작가 고진오 회화는 모든 독립적인 존재들이 끊임없는 변주를 일으키며 서로 어우러진다. 시간과 사유의 흔적으로서 채집된 대상들이 자신의 의지나 의미를 더욱 내밀화 하면서도 인연을 따라 서로 만나고 헤어진다. 모든 것에 대한 확신과 사물들 자체의 명백한 신분이 결여되어 가고 있는 오늘, 새로운 의미와 방향성의 기호체계가 모색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고진오의 회화는 예술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이 아니라 예술이라 불리는 것은 도대체 무엇일까라는 질문으로 시작되며, 예술이라는 동일성, 하나의 문화 정체성에 대한 의문을 풀어가는 도구라 할 수 있다.

 

 

문화든 예술이든 개인이든 모든 것은 그 자체로 자기 동일화 되지 않는 속성을 가진다. 다시 말해 우리는 스스로 '나'를 명징하게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때 주체의 형태를 갖출 수 있는 것은 오직 자기 자신과의 비동일성, 즉 자기 자신과의 차이를 통해서만 희미하게나마 가능할 뿐이다. 타자와의 차이로서만이 내가 드러나기 때문이다. 자신과의 차이 없이는 자신의 예술 혹은 문화적 동일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이유로 바로 여기, 이 지점에서 작가 고진오는 오늘에 관해 진지하게 묻는다. 어제와의 연속 속에서 하나의 단절을 시도하며 다시 연속에 관해 끝없이 되묻고 있다. 겹치는 시간, 휘는 세월, 흔적으로 존재하는 연속.

고진오는 이렇게 스스로 묻고 답하는 것 같다. 나라는 기호는 어떤 근거로도 나와 동화될 수 없다. 나는 나 속에 나와 다른 어떤 이물질이 매일 자라고 있음을 느낀다. 나는 나와 다르고, 결국 나는 매일 그 차이에 의해서만 나를 알아본다. 나는 그 내부부터 균열이 발생해 나의 중심은 기우뚱하게 해체되고 있다. 나는 다른 나 없이, 타자 없이는 나를 말할 수 없다. 하지만 타자는 단순히 내 바깥에 있는 타인이 아니라 내 속에서 시시각각으로 자라나는 타자다. 그런데 이런 타자와 동일화되어야만 비로소 나를 알아볼 수 있는 나는 누구인가?

 

 

이번 전시를 위해 만들어진 고진오의 회화는 목적지의 변경과 타자를 암시한다. 하나의 중심을 분열시키는 작업을 통해 타자를 향한 열림을 시도한다. 그것은 역사와 시간의 해체를 통해 앞으로 도래할 사건으로서의 오늘을 지칭하며, 중심과 주체를 버리고 하나의 이름조차 갖지 않는 어떤 다른 곳이다. 거창한 이름의 예술적 본질이라는 것에 대항하여 다시, 그리고 다른 사유가 가능한지를 묻기 시작한 것이다.

 

 

오마주(hommage)는 '존경' 또는 '경의'를 뜻하는 불어다. 말 그대로 오마주란 작가가 자신이 존경하거나 영향을 받은 특정한 작가나 작품에 대한 존경을 자신의 작품 속에서 표현하는 것을 말한다. 고진오의 오마주 역시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패러디라는 측면에서는 일반적인 속성과는 차이를 보인다. 원래 패러디(parody)란 말은 '대응노래', '파생적인 노래'라는 뜻의 고대 희랍어 'parodia'에 그 어원을 두고 있다. 일반적으로 패러디는 원작을 개작하거나 변형시킨 작품을 통해 풍자와 위트, 아이러니를 내포하고 있다. 전대의 혹은 당대의 지배적인 신념체계 속에 내포된 억압적 특성이나 허위의식을 폭로하려는 예술가의 태도가 반영되어 나타난다. 그러나 고진오의 패러디는 이와 같은 일반적 속성보다는 경험 속에 녹아 있는 시간과 그 시간의 흔적을 이입하고 통섭과 절합을 시도하는 하나의 사물로 작용한다. 현실계와 상상계를 넘나드는 환상계의 시각적 구현을 위한 하나의 방법론인 셈이다.

 

 

관계론적 존재론의 입장을 취하는 고진오의 회화에서 하나의 존재는 독립된 개채로 해석되지 않고, 모든 주변과 상호 교통하며 변주되어 다층적 해독을 기다린다. 만물은 흐른다(panta rhei)고 설파하며 현상의 끊임없는 변전에 주목했던 헤라크레이토스처럼 고진오 역시 변한다는 것은 이것에서 저것으로 바뀌어 가는 것이고 이것과 저것이 시간적으로 상관관계에 있다고 본다. 그것은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닌 포일적 불일이불이의 이중 교차적 존재방식으로서, 모든 존재가 상관적 관계의 매듭임을 말하는 것이므로 독존적 존재방식을 거부하는 것이다. 이 세상의 어떤 것도 자기 스스로 홀로 서는 실체가 아니라, 반드시 다른 것과의 관계에 의하여 생기하고 또한 다른 것과의 관계가 끝나면 소멸하므로 관계론적 존재론에 입각한 작가 고진오의 회화에서 사소한 사물이나 사태는 없다.

 

하지만 세계는 이미 걸러지지 않은 말들과 이미지들의 통제가 불가능한 상태이며, 그것들은 시시각각 거의 무차별적으로 넘쳐나고 있다. 이런 표현의 과부하 상태에서의 어리석음이란 결코 말하려하지 않거나, 보려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사실 우리를 더 맥 빠지게 하는 것은 표현들의 자유로움을 억압하거나 강요하는 것조차도 불가능한 아무런 흥미가 없는 제안들이다.

고진오의 작업은 역사란 단지 조건들의 집합에 불과하고 그 조건들이 아무리 최근의 것이라 하여도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는 그 조건들의 집합들로부터 부단히 도주해야 한다는 점을 명료하게 보여준다. 이미 겪은 경험들을 이야기로 만들어내는 주석 달기가 아니라 대상 속으로 스며들어 그들에 육화되고, 그들로부터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고진오의 회화는 주체나 정체성을 강요하는 강박 증세나 편집증적 자아도취가 아니라 사막이나 바다를 가로지르는 횡단의 시도라 할 수 있다. 그것이 고진오의 하늘이 그냥 하늘일 수 없고, 구김이 그냥 구김이 아니라 중첩된 시간과 사유의 흔적으로 번역될 수 있는 이유일 것이다.

 

 

고진오의 회화는 변주되는 사유의 흔적,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흔적이 있다는 것은 시간적으로 뒤져있다는 것이며 의미의 현전은 흔적의 보존에 의해 기능하므로 그에게 흔적은 생성의 동력인 셈이며 그런 동력으로 그는 조금씩 나간다. ‘나갔다’이거나 ‘나갈 것이다’가 아닌 몸을 바닥에 붙이고 눈을 껌벅거리며 나아간다. 그러므로 그의 속도에 맞추지 못하는 눈에는 그가 더 느리거나 혹은 더 빠르게 보일 지도 모른다. 작가 고진오의 작업이 황혼녘에 날아오르는 미네르바의 부엉이기보다는 정오의 숲을 거닐다 만나는 뮤즈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물론 주어진 자유와 선택의 가능성을 어떻게 사용해갈지는 온전히 수많은 타자의 집합체인 그, 아니 그들 스스로의 몫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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