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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작품

[스크랩] `알브레히트 뒤러`

작성자맘비니이성주|작성시간10.07.21|조회수367 목록 댓글 0

 

신을 뛰어넘은 화가'알브레히트 뒤러'



 

    Dürer: Self-Portrait
    SELF-PORTRAIT at 22,
    1493, linen, 22 3 17 5 8 inches (57 45 cm)

    르네상스 시대의 대학자 에라스무스는 동시대인 알브레히트 뒤러(1471~1528)에 대해 극찬하는 글을 남겼다. 뒤러가 고대의 가장 위대한 화가로 꼽히는 아펠레스(기원전 4세기에 활동한 화가로 현존하는 작품은 없으나 고대 문필가들의 예찬으로 그의 재능과 명성을 짐작할 수 있다)보다 더 훌륭하다는 것이다. 아펠레스는 사물을 제대로 표현하기 위해 색채를 필요로 했지만, 뒤러는 도화지 위에 그려진 선만으로도 빛과 그늘, 입체감과 깊이감을 완벽하게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을 그 이유로 들었다.

    착하고 잘생긴 아들
    1490년부터 94년 사이에 뒤러는 독일과 프랑스로 여행을 떠났고, 이 여행 중에 세 점의 자화상을 제작했다. 그 중 세 번째 초상화는 캔버스에 그린 것으로 금발의 긴 머리에 잘 생긴 젊은이로 당시 유행하던 복장을 한 그림이다. 이 작품은 약혼녀에게 보여줄 그림을 하나 보내라는 부모님의 요청에 따라서 여행 중에 스트라부르에서 그려서 고향으로 보낸 것이다. 그림 위쪽에는 1493년이라는 연대와 “나의 일은 위에서 정한 대로 이루어질 것이다.”라는 글이 보인다. 이는 부모가 정한 결혼을 따라야 하는 심경을 나타낸 것으로 뒤러는 사랑의 행운이나 행복한 결혼을 상징하는 에링기움이라는 풀을 들고 있다. 1494년 긴 여행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온 뒤러는 그해 7월 7일 아그네스 프레이와 혼인한다.

    뒤러의 <가족사>에 따르면 “내가 집에 돌아왔을 때 한스 프레이는 나의 아버지와 협상을 하고 있었고, 딸 아그네스를 200플로린의 지참금과 함께 내게 주었다”라고 적고 있다. 뒤러의 장인은 뉘른베르크에서 유명한 상인이었으며, 장모는 그 도시 권력자 가문 출신이었다. 이런 집안과 혼인 맺은 것을 보면 뒤러의 가문도 사회적인 지위가 나쁘지 않았던 것 같다.

    하지만 자식이 없었던 뒤러 부부의 결혼 생활은 그다지 행복하지 않았다. 뒤러는 결혼한 해에 이탈리아로 혼자서 여행을 떠났는가 하면, 1520년경 부인이 유일하게 동행한 1년 간의 플랑드르 여행 중에도 부부가 함께 식사한 것이 스무 번도 안 되었다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뒤러는 늘 그 지역의 귀족이나 고위 성직자, 인문주의자들과 어울렸고 약속이 없는 날에는 여관집 주인과 식사를 했으며, 부인은 시종과 함께 따로 식사를 했다는 것이다.

    사실 뒤러의 아내는 200플로린의 지참금을 지불하고 시집온 그저 평범한 여인이었다. 그에 반해 뒤러는 결혼 초 중세적인 의미의 장인 신분에서 날이 갈수록 예술가의 재능이 쌓여, 이미 르네상스 시대의 지식인 계층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그가 만나는 사람들은 동료 장인들이 아니라 인문학자요 과학자들이었으며 주교를 비롯한 고위 성직자, 군주, 황제 등 당대 최고의 권력자들이었다.

    뒤러의 생애는 예술가의 지위가 바로 뒤러를 기점으로 하여 일개 장인 계급에서 그 사회 최고의 지식인 계층으로 급상승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예술가의 이같은 지위 상승은 동시대의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같은 이탈리아 르네상스 대가들에게서도 볼 수 있는데, 독일에서는 뒤러가 이런 상황을 주도하고 있었다.

    Dürer: Self-Portrait
    Self-Portrait, 1498

    화가의 귀족처럼 고결하다
    이번에는 신사의 모습이다. 이 작품은 화가가 첫 번째 이탈리아 여행에서 돌아온 후 제작한 것이다. 아마도 뒤러는 인문주의가 활짝 핀 르네상스의 본고장에서 예술가의 지위 상승에 대해 통감했던 것 같다.
    뒤러는 이 작품에서 반측면인 긴 금발의 곱슬머리를 어깨까지 멋스럽게 내리고, 손질이 잘 된 콧수염과 턱수염이 있으며 흰색 바탕에 검정으로 포인트를 준 현대적인 의상에 하얀 장갑까지 끼고 있다. 바로 귀족 청년의 모습이다. 의상의 앞부분에는 겉옷을 고정시키기 위해 흰색과 푸른색의 실을 꼬아서 만든 줄이 보이는데 의상의 색상과 잘 어울린다. 손에 장갑을 낀 것은 귀족적인 풍모를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15세기 중반까지 당시 사람들이 입던 위상은 서로 비슷했다고 한다. 15세기 말이 되면서 계급의 차이를 보여주는 의상이 등장했다.

    뒤러는 자신의 달라진 위상을 이 자화상을 통해 자랑스럽게 알리려는 듯하다. 창문 너머에 풍경을 그리던 방식은 이탈리아와 플랑드르에서 크게 유행한 것이다. 창틀 바로 아래 뒤러의 모노그램과 글자가 보인다.
    “1498 나는 여기에 스물 여섯 살의 내 모습을 그렸다. 알프레히트 뒤러.”
    뒤러 특유의 대문자 A안에 D가 잇는 모노그램은 이 무렵부터 등장한다. 모노그램이란 바로 이 즈음 독일에서 나오기 시작한 것으로 두 개 이상의 문자를 조합하여 형상을 만드는 것인데 화가들은 모노그램을 사인처럼 사용했다. 뒤러는 대부분의 작품에 모노그램으로 서명을 했다.

    Dürer: Self-Portrait in a Fur Coat
    Self-Portrait in a Fur Coat, 1500

    이제 화가는 신이다.
    뒤러는 세 번째이자 마지막 자화상에서 스스로를 예수님처럼 그렸다. 마치 그리스도의 이콘을 연상시키는 작품이다. 이 작품을 안토넬로 다 메시나의 <구원자 예수>와 비교해 보면 놀랄 만큼 유사점이 많다. 가슴까지 그린 정면의 형상, 손의 모양, 글자의 삽입, 검은 배경 등이 그것이다. 다만 메시나의 그리스도는 축성을 내리는 손인데 반해 뒤러는 자신의 옷을 만지는 사실적인 모습이다. 뒤러가 메시나의 이 작품을 직접 보았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뒤러가 1495년에서 96년 사이에 베네치아를 여행하고 왔으니 짧은 기간 그곳에서 활동한 메시나의 작품에 대해서는 충분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지금까지의 자화상은 거울을 보고 그린 측면의 모습이었는데 여기서는 왜 이콘의 예수님 형상처럼 정면으로 그렸을까?

    파노프스키의 해석에 따르면 여기서는 예술가의 창의적인 능력이 창조자이신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것임을 암시한다고 볼 수 있다. 예술가와 신을 동일시한 것이다. 이 같은 개념이 탄생한 것은 바로 르네상스 시대이다. 그림 오른쪽 여백에는 “1500년 뉘른베르크 출신의 알브레히트 뒤러는 28세 되던 해에 나 자신을 영원히 변치 않는 색상으로 그렸다.”라는 내용이 씌어 있다.

    이 작품이 제작된 1500년은 그리스도교에서는 특별한 의미가 있는 희년이다. 희년은 25년마다 돌아오는데 가톨릭에서는 희년이 되면 자신의 죄를 사함받고 구원받을 수 있다고 믿었다. 당시 교황 알렉산데르 6세가 1500년을 성스러운 해로 정하자 수많은 사람들이 희년에 면죄받기 위해 로마로 몰려들었다고 한다. 이 같은 역사적인 의미가 있었던 해에 뒤러는 자신의 모습을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그렸다. 자신의 직업에 대한 천재성을 뛰어넘어 자신의 능력을 신으로부터 부여받았다고 생각한 것이다. 혹은 자신이 바로 신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 작품 이후에 뒤러는 더 이상 자화상을 그리지 않았다. 하기야 자신의 모습을 신의 모습처럼 그리고 나서 어떤 다른 모습으로 더 그릴 수 있겠는가.

    다만 자신의 모습을 스케치로 그려놓은 것이 한 점이 있는데 이번에는 알몸이다. 그는 예술을 위해서라면 스스로 옷을 벗을 수 있는 사람이었는지도 모른다.


    Portrait of Barbara Dürer,1490

    Portrait of the Artist's Father
    Portrait of Dürer's Father, 1490


    Portrait of the Artist's Mother, 1514

    근면한 아버지 검소한 어머니
    뒤러는 자화상 외에도 초상화를 남겼다. 그 중에는 부모님을 그린 것도 있는데 당시 부부 초상화의 전통대로 서로를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다. 얼굴은 반측면이고 가슴 아래 손까지 그린 것 등이 스승 볼게무트의 영향을 보여준다. 당시에는 부부 초상화를 그려서 자신의 저택에 걸어놓는 풍습이 있었는데, 뒤러의 부모는 화가 아들 덕분에 그려져 영원할 수 있는 행운을 얻었다. 이들 부부는 뒤러를 포함하여 열여덟 명의 자녀를 두었지만 한스와 엔드레스를 포함하여 세 형제만 남고 모두 사망했다고 하니, 뒤러의 집안에는 출생과 사망이 끊이지 않았을 것이다.

    뒤러의 <가족사>에 따르면 부친은 평생 힘든 일을 마다하지 않고 일한 근면한 사람이었다. 여기서는 모피코트에 모자를 쓰고 있으며 손에는 묵주를 들고 있다. 화면의 왼쪽에는 1490이라는 작품의 연대와 작가의 모노그램이 그려져 있다. 연대와 사인은 이후에 써넣은 것이다. 아버지와 마주한 어머니는 30세 정도로 추정되며 당시 독일 여인들이 사용하던 흰색 두건을 착용하고 있다. 긴 코에 윤곽이 뚜렷한 모습에서 뒤러가 모친을 닮았음을 알 수 있다. 그녀 역시 묵주를 들고 있지만 남편의 것에 비하면 아주 작다.

    이 작품이 그려지고 25년 후인 1514년에 뒤러는 또다시 어머니의 모습을 그렸는데 이번에는 많이 늙은 모습이다. 스케치가 완성되고 몇 달 후 그녀는 사망했다. 광대뼈가 튀어나오고, 목에 주름이 가득한 깡마른 노파의 모습이다. 어느 곳도 미화시킨 구석이 없지만 평생을 근면하고 검소하게 산 어머니에 대한 아들의 존경과 애정을 엿볼 수 있다. 뒤러는 1504년부터 14년 어머니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모시고 살았다. 데생 작품은 뒤러가 가장 소중하게 간직한 작품들 가운데 하나이다.


    Portrait of Michael Wolgemut, 1516

    화가의 세 남자
    초상화가로서 뒤러의 능력은 다른 세남자의 초상화에서도 알 수 있다. 사물을 관찰하고 그것을 지나칠 정도로 정교하게 재현하던 뒤러의 방식은 모자를 쓴 젊은 남자의 초상화에서도 또렷이 나타난다. 이 젊은 남자가 누구인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뒤러의 동생인 한스 뒤러라고 주장하는 학자가 있다. 화면의 대부분을 얼굴이 차지하고 있으며 가슴 위까지만 그려졌다. 얼굴을 봐서는 냉정하고 강인한 성격의 소유자인 것 같다. 어깨의 일부를 서로 다른 비례로 잘라내는 바람에 인물이 동적으로 보이며, 당시의 정형화한 유형에서 벗어나 신선한 느낌이다. 눈썹은 하나하나 셀수 있을 듯하며 두 눈동자에는 실내에 비친 창까지 그려져 있어서 정교함의 진수를 보는 듯하다. 어떠한 장식도 하지 않은, 한 평범한 인간을 이토록 인상 깊게 그려내는 것은 전적으로 화가의 능력이다. 왼쪽 위에 1500이라는 그림의 연대가 큼지막한 글씨로 씌여 있지만 그림과 훌륭한 조화를 이룬다.

    뒤러의 초상화는 1515년경 다시 한 번 변화를 겪는다. 가장 독일적이고 가장 뒤러적인 특성으로 돌아갔는데 <미카엘 볼게무트>는 이 같은 변화를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초록을 배경으로 한 스승 볼게무트의 모습에서는 한 노인의 내면이 절절히 묻어나는 듯하다. 노화된 피부와 암시적으로만 그려진 모피는 뒤러가 정교한 붓질 없이도 얼마든지 섬세하게 표현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모든 것이 절제되어 있지만 스승의 빛나는 눈에서 여전히 강인한 인간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이 작품을 보고 있노라면 고흐가 뒤러의 시대에 살았다면 아마도 이렇게 그리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냉정하면서도 평화로운 노인의 모습은 어느 경지에 다다른 대가의 솜씨를 유감없이 보여준다. 이 작품의 오른쪽 여백에 다음과 같은 문구가 보인다. “알프레히트 뒤러가 1516년 스승 미카엘 볼게무트의 초상화를 그리다.” 이 그림이 제작되고 3년 후인 1519년 볼게무트가 세상을 떠나자 뒤러는 다시 “그는 82년을 살았으며 1519년까지 살다가 해가 뜨기 전 성 안나의 날에 세상을 하직했다.”라는 문장을 추가로 삽입했다.


    Portrait of Oswolt Krel, 1499

    또 다른 남자 초상화의 주인공은 뒤러와 동시대인이자 동향인이었던 오스볼트 크렐이다. 중앙에는 주인공 초상화가 있고 패널의 양쪽 날개에는 휘장을 든 털북숭이 인간들이 보인다. 초상화가 단순히 인물만을 그린 것이 아니라 바로 가문의 영광을 드러내고 있음을 보여준다. 젊은 오스볼트 뒤에 붉은 천과 풍경이 있다. 이 사람은 뉘른베르크의 부유한 상인이었다. 부를 과시하려는 듯 모피코트를 강조하고 있으며, 검은 옷과 앞이 깊이 파인 흰색 블라우스가 대비를 이룬다. 손에 낀 반지도 그의 지위를 짐작케 한다. 주인공은 비스듬히 아래쪽을 바라보고 있는데 마치 무언가에 놀라기라도 한듯 미간에 잔뜩 힘이 들어가 있다. 베니치아에서는 성모님 뒤에 푸른색 천을 늘어뜨리는 방식이 유행하고 있었는데 이 인물의 배경에 쓰인 붉은 천도 베네치아 성화의 영향인 듯하다.

    뒤러는 이탈리아나 플랑드르보다 뒤늦게 초상화를 시작했지만 결과적으로는 독일 초상화를 그 어느 지역 못지 않은 독보적인 것으로 발전시켰다. 스케치, 유화, 템페라화, 판화를 막론한 다양한 재료와 테크닉으로 초상화를 제작함으로써 표현의 영역을 확대해갔다. 그는 초상화를 종교화와 어깨를 겨루는 장르로 승격시켰으며 이후 북유럽의 초상화는 뒤러의 작품 없이는 설명하기 힘든 것이 되었다.

    고종희의 <르네상스의 초상화 또는 인간의 빛과 그늘>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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